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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쓰임받는 행복 (행 13:20-23, 삼상 17: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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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받는 행복 (행 13:20-23, 삼상 17:41-49)


I. 쓰임 받는 사람

어떤 분이 죽은 개를 안고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저의 애완견이 죽었습니다. 불쌍한 이 개의 장례예식을 치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목사님 왈 “안타까운 일이지만 개를 위해 장례예식을 가질수는 없습니다.”
개 주인이 봉투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천만원 헌금으로는 장례헌금이 모자라는 모양이군요. 한 오백만원쯤 더 보태 아랫마을 성당에라도 가 봐야겠군요.” 
목사님 천만원, 오백만원이란 말에 눈이 커지면서 얼른 죽은개를 받아 안았습니다. “왜  진작 이 개가 개신교인이란걸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아무리 힘이 들어도 불평없이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이 있습니까?
·사역을 할수록 에너지가 생기는 일이 있습니까?
·얘기를 하고 또 해도 자꾸 얘기하고 싶어지는 일이 있습니까?

흔히들 그 일을 은사라고 합니다. 
물론 다른 차원이긴 합니다만 열정이라고 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2013년도 교회사역 100개 200개를 준비한 사역박람회를 통해 
사역신청서를 받았습니다. 오늘도 많이들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신자 작정카드를 통해 주님의 지상명령 – 복음전도 사역에 쓰임받으시길 바랍니다.

사실한 봉헌을 통해 금년에 예배드리는 일에도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요 행복은 쓰임받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꽃 한송이를 사며 가게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꽃을 선물하면 주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받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가게 주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꽃을 판 내가 제일 행복합니다.”

같은 말입니다만 
우유를 아침마다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진정한 행복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시간 저는 하나님에게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나님,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만한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이 선택했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 두 질문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약자라도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 그는 위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일찍이 루소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섬기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모두 영광스런 사역자가 되는 꿈을 꾸십시요.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고, 내가 섬길 사역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역자가 되었다고 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사역은 지식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돈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더구나 이름 주어졌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고 싶는 비전, 열정이 선행되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유능한 사람인데도 버림당한 사람이 있고 무능한 사람인데도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버림받은 사람의 대표로 사울을 들고 있고 쓰임 받은 사람의 대표로 다윗을 들고 있습니다. 

오랜 후에 있었던 사도 바울의 설교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13:22) 

「내가 그를 쓰겠다」- 다윗을 쓰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버리시고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십니까?
잘나고 똑똑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만 쓰실까요?

II. 하나님은 약자를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첫 번째 이유는 대단히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다윗이 약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들어 쓰십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이새는 일곱 아들과 함께 몸을 성결하게 하고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8형제 중 막내로서 아버지도 그에게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왕이 될 면접시험에 다윗은 빠져 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묻기를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사무엘상 16:11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 막내라는 말은 단순히 형제 서열상 막내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약자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했습니다. 약자를 택했습니다. 세상은 강자 순으로 선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막내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막내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약한 자,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사울 임금이 버림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왕이되면 제사장이 하는 제사까지 다 집례할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는 자신을 위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울 임금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막내가 하나 있기는 한데 만나 보나마나입니다. 신통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형님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막내야,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임금이 나올 모양이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러 갈테니 넌 여기서 양을 치고 있거라.”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형님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명 난 아니야. 난 심부름이나 해야지.’

여기 약자란 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이기겠다고 덤비는 사람이 제일 미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버리시고 지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여러분 밀림지역 여행을 하다가 곰잡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곰이 다니는 길을 찾아 나뭇가지에 바위 하나를 메달아 둡니다. 
곰이 비켜 가면 될텐데 바위에게 시비를 겁니다. 
그러다가 머리로 바위를 들이 받습니다. 밀려갔던 바위가 곰을 내려칩니다. 
이번엔 곰이 더 쎄게 들이 받습니다. 
그렇게 몇 번하는 사이 곰이 쓰러져 죽으면 끌고가 곰탕 해 먹는 겁니다. 

-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이 강하게 쓰십니다.
- 내가 져줄 때 이기게 하십니다.
- 내가 낮아질 때 높여 주십니다. 

III. 하나님은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두 번째, 우리를 주목시키는 단어는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이 나온다면 다윗도 관심을 가지고 쫓아 왔을 법도 한데 다윗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습니다.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옥중에서 모범적인 죄수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깊은 밤 성전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베드로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쓰셨습니다.

특별히 ‘양을 치고 있었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장차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능한 사람도 쓰십니다. 죄가 많은 사람도 쓰십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쓰는 법은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어린 양입니다. 
때문에 자기라는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자기 영성관리, 자기 입술 – 즉 언어관리, 자기 건강관리가 잘된 사람이 쓰임받습니다. 
나아가 인간관리가 잘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자기 동생을 지키기는 커녕 동생을 해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때 가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중요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동생 아벨은 아버지 어머니가 지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해쳐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우리의 목장 가족을, 믿음의 가족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맡겨진 사역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내 교회를 행복한 교회로 잘 지켜야 합니다. 

회사든 교회든 -

첫째는 믿고 사람을 맡길 수 있어야 하고, 둘째 돈을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낙제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도 낙제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형님들이 다 떠나간 그 자리에서 혼자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교회 구석 구석 사역의 빈자리를 찾으십시오. 찬양대 자리도 아직 많이 비어있습니다. 펑크가 났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바로 당신이 그 자리를 지키십시요. 
교사, 예배안내, 차량안내, 예배봉사, 숲관리... 구석구석 빈자리들이 있을 것입니다. 

IV.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가 
본문 16:7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더운 여름날 배꼽티를 입고 교회에 나오는 청년을 나무랐더니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외모를 날씬하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각종 진귀한 화장품, 성형수술, 심지어 양악수술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몸을 어느 정도 건강하고 아름답게 지키는 일은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중심을 가꾸는 일은 그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됩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이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정말 배꼽티라도 입고 다녔단 말인가요.
오늘 본문을 한 장 넘겨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멋진 다큐멘타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모두 주눅이 들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나타나 사울 임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나 정도의 용맹이면 해 볼만 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계속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면 골리앗까지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옳습니다. 역대하 1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임금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나도 저를 버렸다”(삼상15:23)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높이실 때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죠엘 코메스키라는 분이 전세계 목자, 교사 등 사람을 섬기는 소그룹 리더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어떤 리더에게서 열매가 나타나는가?

- 그가 얼마나 경험이 많은가?
- 그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
- 그가 얼마만큼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 더 나은 하나님과의 관계
- 더 나은 사람과의 관계
- 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통해 열매가 나타나더라는 겁니다.
- 그래서 2월 셋째주일부터는 매주일 오후 3시 우리교회 리더들만을 위한 특별한 기도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 우리교회 목자와 교사들이 감당하는 그 사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나누려고 합니다. 
- 우리교회 목자와 교사들이 얼마나 귀한 분들인가 하는 마음을 나누려고 합니다. 

V.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을 쓰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리더기도회를 통해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합니다. 
그러므로 넷째, 하나님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을 쓰십니다. 

본문 마지막절 사무엘상 16:13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사무엘상 18:10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옛날 번역엔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야료란 이유 없이 생트집을 잡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귀신에게 붙들리면 귀신의 종이 되고 성령에 감동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51:11) 다윗은 궁궐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왕관을 거두어 가는 것 보다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는 것보다 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 더 두려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VI. 다섯째,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임금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녀야만 했던 고통스런 훈련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신은 떠나고 악신이 그를 괴롭힙니다. 

이때 귀신을 쫓아내는 음악가를 찾게 되는데 이때부터 다윗은 왕궁에서 살게 됩니다.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왕궁에 들어와서 임금이 하는 일을 어릴 때부터 배우도록 하나님이 그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누가 알았겠어요.

사울 임금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 왕이 되기까지 자그마치 15년간을 쫓겨다니는데 때로는 엔게디 굴속으로, 때론 이웃나라 블레셋과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팔레스타인 산지, 평야, 사막 구석구석 사울의 군사를 피하여 도망 다녔지만 그것이 도망 다닌 생활이 아니라 전국의 곳곳, 이웃나라까지 군사 지리를 몸소 답사하고 익히는 훈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성경에 분명하고도 똑똑히 기록되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삼상 16:18, 18:28)는 말씀입니다.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하고 싶습니다. 댓가를 지불한 사람만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성공은 앉아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저희들 공부할 때 했던 말들이 있습니다. 

①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② 공부할 때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③ 성공이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댓가를 지불한 사람만이 찾아온다. 
이런 훈련과정을 통해 신앙과 인격이 무르익은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 쓰십니다.
김치가 맛을 제대로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는 과정을 거친답니다.

-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 한번 죽습니다.
- 씻은 다음 통배추 배를 갈라 또 죽입니다.
- 소금에 절여 다시 죽입니다.
- 매운 고춧가루 짠 젓갈에 절여지면 다시 한번 죽습니다. 
- 끝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마지막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때 비로소 김치는 제맛을 냅니다.
우리 복음 사역자, 교회 사역자들도 자기 죽음의 경험없이는 제맛을 낼 수 없습니다. 성질도 고집도 자기주장도 이기심도 죽어져 교회를 행복하게 사역을 맛있게 만드는 겁니다. 

VII. 결론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행복을 아십니까?
초등학교때 눈이 오는 날 –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그 많은 학생 중 내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류영모! 우리 집에 가서 내 운동화 좀 가져 오너라.”
교장선생님이 내 이름을 아신다. 콧노래를 부르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내 이름 아시죠”♪
그 많은 학생들 중 내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때 그 흥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우리가 천국문에 들어섰을 때 하나님이 나를 쓰셨다. 
이 행복을 안고 콧노래 부르며 하나님께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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