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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시 1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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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시 122:1-9)


어느 마을에 지혜로운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키가 큰 여행객이 나타나 마을이 살기에 어떤지 확인하려는 듯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다가와 “이 마을은 살기에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 오셨습니까? 그 마을은 살기에 어떻습니까?” 여행객은 “제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협력하지 않고 살기에 좋지 않은 마을입니다. 저는 그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때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이 마을도 당신이 사는 마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잠시 후 차를 타고 지나가던 한 남자가 노인을 향해 물었습니다. “이 마을은 살기 좋은 마을입니까?” 노인이 대답합니다. “어떤 마을에서 오셨습니까? 그곳은 살기에 어떻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내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가깝게 지냅니다. 서로 도와주고 어디를 가나 서로 따뜻하게 인사를 나눕니다.” 그러자 노인은 미소를 보내며 대답합니다. “이 마을과 아주 비슷하군요. 이 마을도 사람들이 서로 정을 나누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사이좋게 살고 있습니다.” 남자는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며 떠났습니다. 그 순간 손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올려다보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왜 첫째 사람이 물었을 때는 마을이 살기에 아주 고약한 곳이라고 하시더니 저 사람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노인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은 어디를 가나 자기 마음을 가지고 다니는 법이란다. 그 마음이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도 하고 고약한 곳을 만들기도 하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행복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마음으로 여호와의 집에 올라오셨습니까? 여호와의 집에 올라와서 할 일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성전에 올라오는 태도에 의해서 결정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태도로 여호와의 집인 교회에 올라오셨습니까? 

본문 시편 122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세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갔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는 그들의 태도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여기에 우리를 향한 교훈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는 자들은, 
 
첫째로 기쁨을 보이며

교회에 올 때 마다 세 시간씩 차를 타고 오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목사가 감사해서 말했습니다. “집사님, 교회가 멀어서 매 주일 힘드시죠, 대단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가 대답합니다. “목사님, 저는 한 번도 교회가 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살고 있는 집이 멀다고 생각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집이 멀다 보니 교회 오면서 기도하고, 준비하고, 찬송하고, 기대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올 수 있기에 너무나 좋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 나오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교회에 나오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다니기는 하지만 형식과 습관에 따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오는 것이 기쁨이며 즐거움 그 자체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쁨으로 성전에 올라가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하여서가 아니고 기쁨으로 올라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 오는 것에 대한 영적 기쁨이 있어서 심령이 무척 즐겁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기에 교회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영적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는 것을 등한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자는 소리를 들을까봐 아예 피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교회 일보다 자기 일을 중심에 두고 자기 일을 우선시하며 교회 일을 미루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는 것을 소홀히 한다든지, 내 일과 교회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혹여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회개하고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올라가자는 말만 들어도 기뻐하는 사람을 보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라면 교회가 기쁨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예배가 기쁘고, 만남이 기쁘고, 몸과 마음을 주께 드림에 기쁨이 더해야 합니다. 이 기쁨을 사탄에게 빼앗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 날마다 기쁨을 보이며 여호와의 집에 올라와 예배하며 섬기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감사를 행하며

한 젊은 부부가 캐나다 록키산맥에 자리 잡고 있는 밴프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철따라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을 연출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절경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자 그들은 더 이상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 경치에 싫증이 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만 먹는 것이 싫증났다고 불평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닙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전에 올라오셨습니까? 

우리는 항상 특별한 감사거리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수많은 감사거리가 곁에 있음에도 말입니다. 이제 감사를 행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들은 감사하는 것을 쉬 잊어버리고 불평하기를 즐겨합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저희 입술에 감사가 넘치게 도와주옵소서,” 

본문 4절입니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에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던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감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본서의 저자 다윗도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성전에 올라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받으려고 나옵니까?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오십니까? 모름지기 교회에 올라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하여 나와야 합니다. 택하신 은혜, 구원하신 은혜, 죄를 용서하신 은혜, 직분 주신 은혜, 건강을 주신 은혜, 가정과 자녀와 직장을 주신 은혜, 영원한 천국을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삶보다 불행한 삶은 없습니다. ‘행복하려거든 감사하라’ 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감사를 행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찬송이든 기도이든 말씀이든 헌금이든 감사함으로 행해야 합니다. 광야 생활의 특징은 감사가 없는 삶입니다. 원망 불평뿐입니다. 전진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감격은 감사가 있기 전에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감사함으로 성전에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평안을 구하며

타겟 (A. W. Target)의 ‘창(Window)'이라는 단편 소설의 내용입니다. 어느 작은 병실에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와 디스크 환자가 입원하였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폐암말기 환자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지만 늘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도대체 밖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인들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폐암 환자의 얼굴에 기쁨이 있는 까닭은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의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 받던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기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 밖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습니다. 그제야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기뻐하기로 마음먹고 아름다운 호수를 상상하면서 기뻐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편안과 평안의 차이를 아십니까? 편안은 환경의 차원이고 평안은 마음의 차원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으면 생활이 편안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편안한 교회를 바라지 마시고 영혼이 평안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6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여호와의 집인 교회의 평안을 구해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고, 섬기며 헌신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평안이 형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평안해야 영혼이 평안하고, 영혼이 평안해야 삶이 평안하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교회가 평안하면 모든 것이 은혜롭고 평안하게 됩니다. 교회의 평안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분쟁하는 교회는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의 문제가 되고 모든 삶에 문제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삶에 평안이 없습니다. 성령을 소멸하고 믿음도 잃고 강팍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교회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교인들끼리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하게 하고 분쟁을 일으키게 합니다. 

재미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주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서 분주하게 하루 종일 지내면서도 별로 피곤해하지 않고 밝은 얼굴로 보낸다. 어떤 사람은 주말이 되면 또 어느새 일요일이 돌아왔는가 하면서 짜증스러워 한다. 예배가 시작된 예배당에 들어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성경책을 들고 오지도 않고 멍청하게 앉아서 찬송을 부를 때에는 다 죽어가는 것처럼 개미 소리만 하게 따라 부르고, 헌금하는 시간에는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면서 구겨진 돈을 꺼내 언짢다는 듯이 헌금 주머니에 넣는다. 설교가 시작되면 영락없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설교가 끝나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다. 그리고 축도가 끝나자 부리나케 교회 문을 나선다.” 혹 당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신나는 교회생활을 하고 싶습니까?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축 쳐진 어깨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가겠습니까? 시간에 늦을까봐 부리나케 달리고 서둘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지의 믿음을 재확인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부디 여호와의 집에 기쁨을 나타내며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감사로 행하며 성전에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안을 구하는 마음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자가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형통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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