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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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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고전 15:1-11)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 관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그것을 확실히 믿고 굳게 지키는 사람에게 구원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복음을 확실히 믿고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구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3-4절에서 쓰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왜 우리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이며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3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이 죄 때문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살게 될 것임을 확증해주셨기 때문에 그의 부활 또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우리를 위해서이고, 바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라는 이 놀라운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늘 감사하며 세세무궁토록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구원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예수님의 부활도 다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참으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면 그는 사람과 같은 모습은 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진정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죽듯이 그런 죽음을 죽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하나님께로 올라가 버리셨기 때문에 부활하실 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셨다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처럼 죽는 것으로 끝나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죽으셨고 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세 가지 논거를 제시합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장사 지낸 바 되셨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진정한 육체적 죽음이었음을 뒷받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육체적 죽음을 죽으셨으며 그러기에 진정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 사건이며 그의 부활 또한 실제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본문 5-8절에서 진술하기를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많은 증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더 힘 있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백 명 이상의 증인이 있으며 그 중 대다수가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아직도 살아있다고 말한 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원하면 얼마든지 그들에게 직접 확인해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하며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세 번째 논거는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말할 때나 그의 부활을 말할 때 “성경대로”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본문 3-4절을 다시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훗날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특별히 택하신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고 기록하게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진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과 많은 증인들을 내세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확실한 역사성을 역설한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또한 증인으로 삼습니다. 자기가 한 말이 다 남들로부터 듣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임을 강조합니다.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본문 8절) 한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그로부터 들은 말씀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한 것이기에 비록 자기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이긴 하지만 자기가 전한 복음은 다른 큰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꼭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며 따라서 안심하고 믿어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마지막 절에서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한 말의 뜻을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복음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밝혀주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절에서 스스로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말한 그는 이어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본문 9절) 고백합니다. 복음을 전하며 다닐 자격이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격이 전혀 없음을 아는 그이기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그는 더욱 더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임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말로만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하지 않고 온 몸을 던져 그 어느 사도보다 힘껏 복음전파의 일에 매진한 것입니다. 그의 위대한 고백을 들어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우리가 복음을 확실히 믿고 굳게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는 것은 아무에게서나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 믿음을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 같이 우리도 모두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들임을 고백합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그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용서하셨음을 믿습니다. 

이제는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부활과 영생의 복락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참으로 복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사실 쉬운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도 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우리 보고 미쳤다고 할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증거나 증명 없이도 “아멘” 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대단한 화술이나 감동적 웅변 없이도 사람들을 설득시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받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증언하는 이들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을 날마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처럼 힘껏 복음의 증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그 수고마저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10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한 말은 대단히 중요하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다 하시니까 나는 할 일이 없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힘껏 주의 일을 했습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이어 또 말하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 힘껏 수고하고, 자기가 많은 수고를 하고서도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가지고 순환논리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설이고 믿음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밖에서 보아서는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그 신비를 품고 그 신비 속에 들어갈 때 풀리는 것입니다. 

유럽에 가면 오래된 성당이나 교회 건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건물들이 대부분 겉에서 보면 전체가 벽돌 색깔이고 나머지는 거의 다 시커멓게 보입니다. 건물의 전체적인 윤곽이나 경우에 따라 섬세한 조각장식이 눈에 띌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가는 순간 밖에서는 안 보이던 것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 있습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강렬한 채색의 스테인글라스 성화들입니다. 교회당 내부 전면이 다 그 스테인글라스 성화로 둘려싸여 있습니다. 

믿음이나 교회도 그렇습니다.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믿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교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믿음과 교회 안에 있는 것과 그 아름다움을 진정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밖에서 비판만 하는 사람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믿음의 위대함과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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