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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복음 앞에 서라!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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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복음 앞에 서라! (롬 1:16-17)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인격이나 자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인격이 좋고 자질이 좋아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며 나를 인도하신다"고 하는 영적인 권세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종에는 임명장이 없습니다.  다만 하늘과 땅의 영적인 권세가 임명장입니다.  오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의 전을 찾아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믿음의 자녀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승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권세가 있어야 됩니다.  권세가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권세가 있어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권세가 있어야 사람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권세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권세를 탐내십시오.  그래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권세 있는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시간마다 때마다 수많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 시간마다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선택의 순간에 자기 행동의 방향을 단순히 운에 맡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단순한 자기 편의주의에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순간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얄팍한 꾀를 부리며 응급처치를 따라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선택을 잘못하고 나면 끝없는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인생의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이고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때 괴로워하거나 자기 자신의 행동 방향을 운에 맡기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인간은 자기 행동의 선택에 대한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람이 세상 일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이 통제합니다.  원칙이 분명한 사람은 때로는 힘드는 시간을 지나가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결코 그 상황 때문에, 그 사건 때문에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칙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원칙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원칙, 모든 인생들이 붙잡아야 할 확고한 원칙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붙잡아야 할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마음 먹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원칙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달리 말하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나도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기 싫은 그 골고다 십자가의 길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예수님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시대적인 복 주심이 나를 통하여 세상으로 흘러 넘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통로로서의 귀한 삶이 될 수 있는 길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저마다 자신의 잔꾀나 재주나 인간적인 지혜로 살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통로로서의 귀한 삶을 살아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채취가 강하게 드러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에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의 채취가 물씬 나는 사람 속에 자신을 채우시고 나타내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확실하고도 분명한 자신의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세상 속에서의 어떤 이론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믿음은 살아 있는 것이고, 활동하는 것이며,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믿음과 능력을 절대로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능력과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크면 우리에게 나타난 문제는 오히려 더 큰 기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큰 산도 평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믿음이 적으면 아주 사소한 문제도 태산같이 크게 보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켜야 할 축복과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의 진실함을 의지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만군의 여호와,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삶의 진실함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못한다고 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움직입니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 진실함은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모든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실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진실한 삶은 필요하지만 그 진실함이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재물이 아닙니다.  어떤 명예나 권세가 아닙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함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실된 믿음만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진실된 믿음의 고백만이 하나님의 팔을 움직이게 하는 통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했어야만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안 했으면 하는 말, 하면 비극이 되는 말을 한 것 때문에 후회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하면 안 되는, 그리고 쓸데없는 말들을 쏟아내면서 살아갑니다.

지난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났던 9.11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언론에 보도된 희생자들의 마지막 전화통화 내용은 살아있는 유족들과 세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었습니다.  당시 테러가 일어나기 한 달 전에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있는 직장에 취직해서 출근했다가 참변을 당한 스튜어트 T. 멜처는 부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여보 사랑해.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아.  그런데 나는 아마 살 수 없을 것 같아.  여보 사랑해."
당시 피츠버그에 추락한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93기에 탔던 마크 빙햄은 피랍직 후 어머니 앨리스 호글런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내용을 전화로 남겼다고 합니다.  "엄마!  나 마크야.  우리 납치 당했어.  저기 세 명이 있는데 폭탄을 가졌대.  엄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당시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93기에 타고 있었던 제르미글릭은 추락하기 직전 부인 리즈베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우리 딸 에미도 정말 사랑해.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꼭 행복해야 돼."
9.11 테러 당시 미국의 언론에 보도된 희생자들의 마지막 전화 통화 내용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사랑해, 미안해"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사랑했던 가족들과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내 뱉는 수많은 말들 가운데 정말 후회 없는 한 마디의 말을 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
그것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아니, 다른 것은 다 있어도 그것 하나만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붙잡아야 하고, 또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하고, 또 해야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것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복음은 우리 가정의 소망입니다.  복음은 우리 교회의 소망입니다.  복음은 분열된 이 민족을 치유하고, 열방을 살리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유'의 '좋다'는 말과 '겔리온'의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복음인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복된 소식, 가장 기쁜 소식인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속죄함을 얻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선포가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나'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나'는 수많은 진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나'는 세상 이곳 저곳에 널려있는 생명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나'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유일한 진리이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현대를 지배하는 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합니다.  그래야 이 다양한 시대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절대적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절대적 수반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의 절대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적 신앙은 매도를 당하고 상대적 신앙만이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샤머니즘에도 구원이 있다.  힌두교도 괜찮다.  세상은 그래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사상에서 보면 기독교는 독선이요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신부가 목탁 두드리는데 가서 앉아 있고, 절의 중이 성당의 미사에 앉아 있는 것이 통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언론들이 저마다 폭넓은 종교라고 칭찬을 합니다.  멋있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의 눈으로 보면, 신령한 하나님의 눈, 거룩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 하나님이 없는 저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교인들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래로 세상과 인간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믿고 고백하면서 오늘 이 시간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인들입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교인들은 복음이 없는 종교적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부족한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오늘의 현대인들은 복음으로만 만족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복음 이외의 또 다른 그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교회에 다니고,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기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가운데도 구원은 반드시 복음이어야만 한다는 이 분명한 사실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진리는 분명합니다.  내 아버지는 한 분이요, 내 어머니도 한 분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입니다.  구원의 길도 하나 밖에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온 백성이 들어도 좋은 소식, 세상을 기쁘게 하는 소식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 다른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다른 것은 다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것 하나만 없으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재물이 많았던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부자 청년은 영생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모세 율법을 다 지킬 정도로 영생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영생을 누구 못지 않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생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재물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의 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 이 땅의 모든 교인들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교회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닌 또 다른 그 무엇을 겸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고, 분열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교회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붙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복음만 아니라 다른 그 무엇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와 성도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초대교회가 건물이 화려하고 웅장했기 때문에 부흥하고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이 땅에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은 어떤 잘 짜여진 프로그램 때문이 아닙니다.  저들에게는 내세울만한 건물도 없었고,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붙잡았습니다.  복음만이 저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저들에게는 복음만이 가정과 교회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복음만이 이 땅을 변화시키는 능력음일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오직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앞에 다시 서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십시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더 이상 복음의 감격을 느낄 수 없는 황폐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이 능력이고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닫혀진 절벽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복음의 감격을 느낄 수 없는 황폐한 우리의 마음을 통회해야 합니다.  생명의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꽉 닫혀진 우리의 절벽 같은 마음을 통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명문 집안이었습니다.  당당한 권세를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율법주의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 이 내용이 로마 시민들을 향해서 외치는 서신이라는데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힘만이 통하는 국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강자만이 진리였습니다.  승리만이 진리요, 살아남는 것이 승리였습니다.  더구나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몹시도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유대 땅 나사렛 사람 예수의 사건, 살인 강도와 함께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 거기서 그들이 외치는 설교는 로마 시민들이 그렇게도 부끄럽게 생각하던 겸손, 사랑, 회개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로마를 향하여 그들과 함께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도 바울이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유앙겔리온 - 승전의 소식은 로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분의 복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말하는 힘, 진정한 능력은 복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폭발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사도 바울의 이 한마디는 그 당시에 엄청난 선언이요, 충격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능력'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뒤나미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다이나마이트' 폭탄과 같다는 말입니다.  반석이라도 폭발시켜 산산조각을 내는 엄청난 힘,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저 거대한 로마 제국이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는 것 같지만 어느 날 아침의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로마의 황제가 세계를 정복했다고 자랑하지 말아라.  그들도 병들고 죽어서 결국에는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은 나사렛 예수는 부활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강한 자의 힘으로 핍박과 억압을 일삼는 로마의 가치관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겸손과 사랑과 섬김의 기독교 진리는 영원히 이 땅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생명입니다.  역사 속에서 어떤 철학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위대했던 로마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 가난하고 버림받았던 유대 땅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완악한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황무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복음입니다.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내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도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도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오직 복음만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를 구주로 고백했다면 그의 인생에는 반드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인생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능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내가 변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김용의 선교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김용의 선교사님은 아버지가 술장사를 하다가 망하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청소년 시절을 가난과 방황으로 자학증에 붙잡혀서 허망하게 보냈던 그는 1970년대 초에 극한의 삶의 어려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선교사님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복음이면 다다라고 고백하면서 복음의 감격에 미쳐서 지금도 열방을 향한 세계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김용의 선교사님의 다섯 자녀들도 모두가 선교사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첫 아들은 서부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데, 그곳은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한 번은 선교사님께서 순회선교를 하시다가 아들을 보려고 잠시 그곳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들을 만나고 돌아와야 하는데 아버지로서 도저히 아들을 그곳에 두고 올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밤새 고민을 하다가 선교사님은 박스를 찢어서 아들에게 편지를 써 놓고서는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고 평안한 가운데 돌아올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몇 년 후 선교사님의 생일에 온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선교사로 나가 있던 다섯 자녀들이 힘을 합해서 생일을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은 잔뜩 기대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는데 장성한 다섯 자녀들이 힘을 다해 준비한 것이 자신의 얼굴보다 작은 생일 케이크였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는 가운데 큰아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떠나가시고 난 이후에 아버지께서 써 주신 것을 벽에 붙여놓고 힘을 얻고는 했습니다."

아들의 입을 통해 들려준 당시 김용의 선교사님이 아들에게 써놓은 마지막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 땅 끝에서 죽어 하늘 복판에서 만나자."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복음 앞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아닌 또 다른 그 무엇을 추구하면서 이대로 살다가 죽을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이 후에 우리의 육신이 무너지는 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로 변명할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를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의 교회는 조직도 있고, 사람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웠었는데 지금은 식어졌습니까?  어떻게 믿었기에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를 미치게 하고 뜨겁게 합니다.  김용의 선교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복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신을 더 미치게 하고 더 뜨겁게 한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다시 복음 앞에 서십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교회의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를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어떤 잘 짜여진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고, 나로 하여금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 앞에 다시 서십시오.  생명력 있는 복음으로 다시 일어나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여러분을 세우고, 가정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다시 서십시오.  그리고 그 복음을 붙들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심령에 들어간 자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복음 앞에 서십시오.  모든 것을 다 걷어내고 오직 복음 앞에 서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만 서면 우리는 다시 한 번 회복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 앞에만 서면 우리는 잃어버린 감격을 다시 맛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 앞에만 서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부흥의 역사에서 거룩한 주인공으로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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