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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선보다 더 큰 은혜, 소명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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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보다 더 큰 은혜, 소명 (눅 5:1-11)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내일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어제는 어제로 끝났습니다. 성공적으로 살지 못하였어도 어제로 끝난 일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오늘이고, 오늘 우리는 하루를 보람 있고,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만이 할 일이 있고,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자기의 맡은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출근하는 데, 버스를 타는 것도 아니고, 택시를 타는 것도 아니고, 붐비는 전철에서 시달리지도 않고, 사택에서 나오기만 하면 바로 교회니까 저처럼 편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에 상도동에서 살면서 출근해보았는데, 한강 인도교를 건너오는데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퇴근할 때도 집이 가까우니 참 자유스럽습니다. 교회 담임목사실에 서재가 있으니 저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직장을 나서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모두 다 행복해 보입니다. 일할 수 있다, 직장이 있다, 아직도 할 일이 있다는 것으로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일할 수 없는 입장이 된 사람, 일거리가 없는 사람, 불러주는 사람이 없고, 하루를 보내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하는 즐거움으로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이야기 속에 담긴 긍정의 한 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을 보아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해주고,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통에 4달러”라는 별명을 가진 ‘아치볼드’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늘 서명을 할 때에 자기 이름 뒤에 회사의 홍보 차원으로 “한 통에 4달러-스텐더드 오일”이라고 썼습니다. 미국 스탠더드 석유회사에 아치볼드라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할 기회만 있으면 ‘한 통에 4$ 스탠더드 석유’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한 통에 4$’가 되었습니다. 

대재벌 회장 록펠러가 어느 날 캘리포니아 작은 도시로 출장을 갔는데 어떤 사람이 숙박계에 서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치볼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숙박계에다 자기 이름을 쓰고 “한 통에 4달러,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문구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장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런 문구를 쓰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희 회사를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록펠러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아치볼드라는 사람은 스탠더드 오일 회사의 말단 직원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한 달 후에 본사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들어갔는데, 회장님을 만난 후에 아치볼드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한 달 전에 만난 사람이 바로 록펠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식사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록펠러는 아치볼드라는 사람이 열정의 사람이었고, 회사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록펠러는 아치볼드가 후에 자기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되도록 승진도 시키고 중요한 일도 맡겨주었습니다. 훗날에 아치볼드는 가장 유능한 사장으로서 회사에 크게 공헌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일에 혼을 불어넣고,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어부들은 갈릴리 바다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몇 명의 어부들이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배가 두 척이 있었습니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어부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여기도 그물을 내려보고, 저기도 내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헛수고였습니다. 고기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어디로 꽁꽁 숨어버렸는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힐 때에는 피곤한 줄도 모르는데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헛 그물질을 하고 보니 피곤이 몰려옵니다. 집에서 기다리는 식구들에게도 미안합니다. 고기를 가지고 들어가야 그것을 팔아 하루를 먹고 살아갈 터인데, 고기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이 어부들은 그물을 씻어 말리고 손질하면서 다음을 기약하면서 재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물을 씻고 말리는 것을 보면 이들이 가진 철저한 직업정신을 높이 사주어야 합니다. 어부들은 자기들이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어제 밤에 고기는 잡지 못하였어도 오늘 아침 그물을 씻고 말리는 것은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칼 힐트너라는 주경학자는 이 사람 시몬 베드로가 인생을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조건이 자기 일에 충실한 태도에 있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이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자기의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잠22:29에 “네가 자기 사업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전 성경에는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고 했습니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이런 실패의 현장에 우리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치지 못하시는 병이 없다고 하는 소문으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조금이라도 더 예수님에게 가까이 오려고 밀치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닷가로 오셨고, 배를 타시고 조금 안으로 들어가시면 사람들은 해변에 앉아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게네사렛 호수라고도 불렀고, 디베랴바다, 바다, 호수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에는 하프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긴네렛, 또는 긴네롯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치 심장 같이 생기기도 하였고, 하프 모양으로 보였습니다. 짠 물의 바닷물이 아니라, 민물의 담수호입니다. 그 호수가 대단히 넓어 호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나오셨을 때에는 바닷가에 두 배가 있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였습니다. 다른 한 배는 세베대의 배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어부였고 베드로와 동업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몬은 후에 베드로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한 배에 올라가시더니, 배의 주인인 시몬에게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지금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심기가 불편한 날인데, 예수님이 전에 조금 안면이 있다고 하여, 시몬의 배를 그냥 사용하겠다고 하고,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달라고 합니다. “선생님, 부탁하시는 것도 좋지만... 상황을 보세요.., 지금 그물을 말려두고 집에 가려고 하는 시간이요, 고기나 많이 잡은 날도 아니고, 실패한 사람에게 와서 무엇을 부탁하는 것입니까?”라고 불평하거나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큰 복을 주시기 전에, 주님을 위하여 사업을 내어놓으라고 하시고, 시간을 내라고 요청하시고 있습니다. 

“네 것을 내가 좀 쓰자, 네 사업, 네가 가진 소유를 이리 내어놓으라”고 주님이 사용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가진 기술, 우리의 재능도 주님은 당신을 위하여 내어놓으라고 하십니다. 

시몬은 조금도 토를 달지 않고, 불평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무조건 배를 주님에게 내어드리고, 그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놓았습니다. 노를 사용하였는지, 삿대를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멀리 떼는 것도 아니요, 조금만 떼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없는 기술을 가지고 봉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 하시는 것을 가지고 봉사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그 배에 올라앉아 배에서 해변에 앉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앞에 모셔놓고 뒤에 앉아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모시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어떤 복을 주시기 전에 말씀의 은혜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양의 고기보다 더 중요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무슨 일에 성공하고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한 날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팀 라헤이 목사님은 “성경공부의 비결”이란 책에서 ‘하루 15분이 성경을 정복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하루 15분이 영어를 정복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15분이 성경을 정복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성경을 15분만 읽으면 1년이면 한 번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 신구약 합쳐 1,189장입니다. 하루 15분이면 충분히 5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8월 말이면 한번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인생을 바르게 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인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8:31-32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신실하게 쓰임 받은 모든 위인들의 공통점은 그들은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집집마다 성경이 있습니다. 직장에 가도 성경을 비치할 수 있습니다. 차에 둘 수도 있습니다. 호텔이나 병원에 가도 성경을 비치해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영국의 브리스톨에 살던 고아의 아버지라고 하는 조지 뮬러는 믿음과 기도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평생 기도의 응답을 5만 번 이상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기도 일기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것들이 5만 번이 넘습니다. 무엇이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는 평생에 성경을 200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 중에 절반 이상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부지런히 연구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들어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생생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미국 새들백교회를 담임하는 릭 워렌 목사님이 “개인성경연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미국에서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하루 집에서 TV를 보는 시간은 3시간인데, 성경을 읽는 시간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고작 3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미숙한 것이 조금도 놀랍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시몬은 주님에게 배를 내어드리고 뱃전에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지 않으면 우리가 받은 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알지 못하고, 자기가 잘 나서 이룬 줄 알고 교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말씀을 들어야 살 수 있습니다.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보시고, 연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신 대로 표시하면서 따라와야 완독하시고, 다 마치실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주님이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시몬 베드로의 생각이 아주 긍정적인 사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산골짝 동리인 나사렛의 목수출신입니다. 지금 누가 누구 앞에서 문자를 쓰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입니까? 시몬이라면 갈릴리 바다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먹고 사는 어부가 아닙니까? 갈릴리 바다에 대하여 알면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물을 가지고 깊은 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대낮이 되었는데, 호수의 고기는 주로 밤에 잡아야 잘 잡을 수 있습니다. 민물 호수이기 때문에 얕은 곳에서 잡을 수 있습니다. 이미 그물을 씻어 말려두었습니다.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말씀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분이 있다면 그 부정적인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아이구, 목사님,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바보라고 해요, 그런 말씀은 단순하게 살던 옛날이나 가능한 말씀이고 현대는 맞지 않아요. 목사님과 같이 헌신한 사람들은 가능해도 우리 같은 이들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암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 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 한국교회는 아모스 시대와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많이 들어서 미처 소화불량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때, 그곳에서 그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절대 시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모스 시대에 말씀하시는 시간이나, 지금 말씀하시는 시간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있어 매우 자랑스럽고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결단성과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세입니다. 그동안 뱃전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는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있어 은혜입니다. 사실 시몬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창조하실 때에 말씀과 지혜로 참여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시몬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동업자들이고 친구들인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습니다. 속히 배를 몰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자기 혼자 배에 채우고 돌아오면 되는데, 친구들이 와서 도와주는 가운데 두 배에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두 배에 채울 수 있었고, 고기가 심히 많아서 그 무게로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는데 이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놀라고, 동생도 놀라고, 함께 그 바닷가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놀라고, 세배대의 아들로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로 놀랄 일들이 많습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은 복이 될지라고 하셨고,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이 되어야 하고, 우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의 리더십을 보아야 합니다. 나 혼자 받아 누리는 복을 가지고 흘려보내고,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중에 여러 사람이 함께 잘 살아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형제들이 잘 살고, 친구들이 함께 복을 받고, 성도들이 잘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의 통로가 되고, 함께 나누고 누리는 복을 받아야 진정한 복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정신이요, 우리 주님이 눈여겨보시는 리더십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나 혼자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향력을 끼치면서 다함께 잘 살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시몬을 눈여겨보시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새겨보면서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그렇게 대단하신 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존경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니 선생님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은혜 받고 보니 예수관이 달라졌습니다. 선생님에서 주님으로 고백할 때에 진정한 헌신이 나오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목사에 대하는 자세도 다릅니다. 하나님을 대신한다고 하나님의 사자로 봅니다. 

동생이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자기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할 때에도 동생이 너무 광신적이고, 정통 신앙에서 지나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자신을 버리지 않고, 찾아오셔서 말씀을 선포하시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확신에 찬 음성이며, 그 입가에 번지는 미소며, 그 눈에서 나오는 거룩한 빛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결단으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 서보니 한 없이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이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 앞에 엎드려 있는 시몬 베드로를 향하여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취한다’는 말을 알아야 합니다. ‘사로 잡는다’는 말입니다. ‘산 채로 잡는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70인역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구해낸다”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이라는 말에는 시간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삶의 전환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바다에서 고기를 낙는 옛 사람의 삶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한 영혼, 한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그들을 구원해내는 사람을 취하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베드로는 고기 잡는 것 이상의 그 어떤 의미, 가치, 보람, 목숨을 걸만한 부르심에 목말라하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고기 잡는 것으로 인생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아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하여 겨우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 혼자 먹고 살아가는 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루 만선을 이루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 소명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도달하였고, 복음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하면 이미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물고기 수준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시몬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놓지 못하던 것인데, 배와 그물과, 아버지의 집을 뒤로 하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커보이던 것인데, 다 배설물 같이 여기고 내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좋아서 다 버릴 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요, 나의 주님이신 것을 알고 나니, 하늘이 달리 보이고, 세상에 다르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함께 하십니다. 

오늘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셨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까?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주님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주님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여러분이 가진 소유와 재능, 그리고 소중한 시간까지 다 드리고, 기쁘게 주님의 뒤를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만선보다 더 큰 은혜는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으로 만족하시고, 주님을 위하여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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