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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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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 3:1-10)
  

고 김준곤 목사님은 예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사랑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신혼부부로 생각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영원한 첫사랑’
「소월은 몇 억 년을 밤마다 뜨는 달에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 그리움을 읊는다. 
예수님과 크리스천 사이에는 순간마다, 호흡마다, 사건마다, 영원히 새롭게 체험되는 감탄사가 있다. 
“주님, 당신이 그토록 사랑인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온 우주에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은 영원한 첫사랑이며 개봉 안 된 사랑의 편지이며, 주님과 내가 함께 쓰는 일기책이며, 함께 부르는 노래이다.」

참 좋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온 우주에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는 주님과 나 사이에는 순간마다, 호흡마다, 사건마다, 영원히 새롭게 고백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당신이 그토록 사랑인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여러분 사이에도 개봉 안 된 사랑의 편지를 뜯을 때의 설렘과 첫사랑의 순수한 달콤함과 지워지는 사랑의 순간을 아쉬워하며 써내려가는 일기책과 같은 체험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랑의 노래가 있습니다.
엉덩이로 기어 다니던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눈만 감으면, 앉은뱅이의 찬양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주님, 당신이 그토록 사랑인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본문은 앉은뱅이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면서 앉은뱅이였습니다. 
사고나 병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고약한 운명의 앉은뱅이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22절에는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40여 세가 되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40년간이나 앉은뱅이로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은 기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보통 비유(analogy)일 경우가 많습니다.
즉 역사적인 사실이긴 하지만 그 기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기적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거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죄에 빠진 나의 모습입니다.
이 사람이 앉은뱅이로 태어났듯이 우리 모두는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시51:5절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아무도 이 사실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이 거지가 다리의 마비로 말미암아 걸을 수 없듯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양심이 마비되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죄는 마비시킨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영혼의 마비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비틀거리게 하고, 비뚤어지게 하고, 길을 잃게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거지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자선을 베풀 뿐입니다. 
그러나 자선이라는 것은 영생과 관련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는 가까이 접근조차 못합니다.
우리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성전을 떠나지도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앉은뱅이는 그렇게 능력이 많으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집을 등지고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언제까지나 성전 안의 은혜의 분위기는 소문으로만 듣고, 그 속에 한번 뛰어 들어가 보지 않은 채 성전의 문간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앉은뱅이는 어제도 오늘도 아침저녁으로 성전 문 앞을 왔다가 가곤 합니다.
이 점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이 계신데, 부천에 사시는 박혜숙 권사님이십니다. 
(지금 장로님이 되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분한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이 분은 이화여전을 나오신 분입니다. 
교회에 다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저렇게 좋아하는데 나는 뭔가’ 
‘내 가슴에는 왜 저런 감격이 없을까’ 
속이 상해서 죽겠더랍니다. 

새벽기도회라도 참석하고 싶은 데 집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한 욕심이 생긴 것이지요. 
그래서 40일 동안 집에서 새벽기도를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디서 새벽기도를 할까’ 장소를 물색하는 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결국 찾아낸 곳이 지하 보일러실입니다.
지하 보일러실에 가마니때기를 깔아놓고 기도합니다.
너무 속상해서, 나에게도 은혜를 달라고, 다른 사람만 사랑하기냐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증거를 보여 달라고 그렇게 40일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40일기도가 채 끝나기 전에 그분은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참 급하기도 하시죠? 
제가 증인입니다. 제가 그 집에 살았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갈망이 있습니까? 
목소리를 높여 찬송도 해보고, 매어 달려 기도도 해보고, 성령의 은사도 체험해보고, 성경을 백독하겠다고 욕심도 좀 부리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찬양하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오늘 한 푼의 동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이 걸인에게 별로 부자로 보이지 않는 손님 두 분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손을 내밀어 ‘한 푼 줍쇼.’라고 구걸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동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한두 번 경험해 본 일이 아니라 머쓱해진 손을 거두어들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이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면서 베드로의 뜨거운 손이 앉은뱅이의 메마르고 차가운 손을 잡아당겼습니다. 
그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수천수만 개의 은과 금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삶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이 앉은뱅이에게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이것이 저의 가장 큰 관심이었습니다. 
‘이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삶이 변화되는 사건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가 지난 한 주간 동안 저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이제 성경을 자세히 봅시다.

1. 기대했을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이 앉은뱅이는 여러 해 동안 이 성전 미문 앞에서 많은 사람에게 가련한 몸짓으로, 동정을 유발하는 눈짓으로 구걸했습니다.
간절하게 구걸은 했지만 그 결과 잘 해야 차가운 동전 몇 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했을 때 그 거지는 뭔가 큰 것을, 뭔가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만일 그 거지가 ‘우리를 보라’고 말했을 때 들은 체 만 체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일어서는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기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 제목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막10:46-52절에는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바디매오란 소경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예수님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그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소경은 주저 없이, 한 순간의 머뭇거림 없이,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드니 이유 없이 구경삼아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은 절대로 기대하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가장 적절한 시간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그 기대를 채우십니다.

필리핀에서 수고하시는 윤미형이라는 선교사님의 기도편지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태풍이 불어와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냥교회’라는 교회는 건물이 없고, 햇빛을 가리는 천막을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토요일 이전부터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답니다. 
저녁이 지나도 비는 그치지 않고, 새벽이 밝아오는데도 비는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있었기에 극적인 하나님의 솜씨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 기대를 채워주셨을까요? 아니면 모른 척 했을까요?
그렇게 기대하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하겠습니까?
놀라운 하나님께서 여섯 시가 지나면서 비를 멈추셨고, 예배시간인 여덟 시에는 햇빛을 허락하셔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예수의 이름을 의지 했을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주문이 아닙니다.
산속의 도적 떼들이 바위 문을 열 때면 “열려라 참깨” 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병을 고칠 때 쓰는 주문이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분의 사랑, 그분의 지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어명이요’하면 그것은 왕의 권위로 내리는 명령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의금부 도사가 어명을 하달하더라도 꼼짝없이 무릎을 꿇고 어명을 받듭니다.

예수의 이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여러분께 죄의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믿으십시오.
여러분께 건강의 문제가 있습니까? 
40년 동안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를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빌립보감옥의 간수의 가정을 살리신 예수를 믿으십시오.
행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오직 예수’라고 대답해보시길 바랍니다. 
누가 여러분을 구원시켰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방패가 되십니까? 
누구의 이름으로 사탄은 물러갑니까?
누구에게 여러분을 맡길 수 있습니까?
누구에게 여러분 자녀들을 맡길 수 있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내일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누가 이 교회를 부흥시키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무서운 시험이 무엇입니까?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 사업이 어려워지는 것? 병이 드는 것? 진학에 한번쯤 실패하는 것? 
아닙니다!
성도들의 가장 큰 시험은 그분의 사랑이 있고, 그분의 지혜가 있고, 그분의 능력이 있는 예수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져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져갑니다.
예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립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시험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할 수도 없고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가련해집니다.
주님이 yes 하시면 세상 모든 사람이 no해도 yes가 되고, 주님이 no하시면 세상 모든 사람이 yes 해도 no가 된다는 그 이름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3. 사랑했을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7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거지의 손을 누가 잡아 주겠습니까?
우리들이 거리의 거지들에게 돈을 주면서 그 거지의 손을 잡아 준 적이 있습니까?
손이 닿을까봐 돈을 떨어뜨려 줬지요.
베드로의 뜨거운 손이 앉은뱅이 거지의 차가운 손을 잡았을 때 이제는 구걸하는 거지와 돈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참된 만남이 일어났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앉은뱅이는 관심의 손을 잡아보는 것입니다.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솟아오름을 느낍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왜 당신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느냐’고 묻지 맙시다.
‘왜 내게는 사랑이 없는가?’ 라고 자기 가슴을 뜯읍시다.
아내가 남편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 역시 사랑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크리스쳔 부인이 믿지 않은 남편에 대해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네 아빠는 마귀다. 저 마귀 짓 하는 것 봐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부인이 얼마나 남편을 보고 ‘마귀’ ‘마귀’했던지 아이들도 나중에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마귀가 돌아온다.’라고 하더랍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남편의 삶이 변화되겠습니까?
이런 대우를 받은 가장이 교회에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남편의 장점)한 당신과 살아서 참 행복해요”라는 말을 보름만 하면 남편을 구원시킬 수 있답니다.
실제로 어느 교회의 한 자매가 새벽도회에 다녀오니 남편이 정원에 물을 주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당신과 살아서 참 행복해”라고 얘기 했다는 거지요.
그랬더니 남편이 힐끗 쳐다보면서 “미쳤어?”하더랍니다.
그 이튼 날에도 동일한 말로 칭찬했더니, “아양 떨지 마!” 하더랍니다.
세 번째 동일한 말로 격려했더니, “알았어. 교회 나갈게”하더랍니다.
사랑으로 남편을 변화시켰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1) 기대했을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 예수의 이름을 의지했을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3) 사랑했을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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