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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기도(1) : 아브라함의 기도 (창 18: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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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도(1) : 아브라함의 기도 (창 18:22-32) 
 
 
❚위대한 중보기도

오늘부터 여섯 주에 걸쳐 <위대한 기도>라는 시리즈 설교를 시작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기도 여섯 개를 찾아 그 기도는 누가 했으며, 어떤 결과를 가져왔으며, 왜 위대한 기도라고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이런 설교를 할까요? 그야 당연히 기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첫째,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어떤 사람과 친해지려면 많은 대화를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잘 해야 하나님과 친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도 나를 잘 아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큰 은총을 받게 하는 힘이 기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도는 생명의 호흡입니다. 며칠 전 칠곡의 어린이집에서 떡볶이를 먹던 어린이가 떡이 목에 목이 막혀 사망하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목이 아니라 기도를 막아 호흡을 하지 못해 사망한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소식입니까?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에 기도가 막히면 우리 생명의 호흡이 끊어지고 우리는 영적으로 죽고 맙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호흡을 잘 해서 영적인 생명이 건강해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기도는 축복의 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문을 여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이 복을 부어주시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여러분의 모든 소망이 응답 받고, 하나님을 감동시켜 하늘의 문을 열고 복을 부어주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살펴보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답게 기도(하나님과의 대화)를 참 많이 한 사람이라 창세기에 아브라함의 기도가 여러 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기도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입니다. 어떤 기도요? 예, 중보기도입니다. 남을 위한 기도 말입니다. 누구를 위한 중보기도였습니까? 조카 롯을 위한 중보기도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위대한 중보기도의 모범을 살펴보려 하는 것입니다.

우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왜 위대한 기도인지, 그의 중보기도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 기도인지 알아봅시다. 다같이 창세기 19:29 말씀을 찾아 읽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내 자신의 믿음이 아닌 남의 믿음 덕분에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남편이 교회 안 다녀도, 자녀가 예수 안 믿어도 아내만 잘 믿으면 다 구원 받을 수 있게요? 집안에서 한 사람만 대표선수로 교회 보내면 되겠지요. 안 믿는 남편이 부인 천국 갈 때 치맛자락 붙잡고 가면 되지요. 하지만 성경은 결코 이런 편리한 방법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오직 내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줄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놀라운 약속을 해주십니다. 남의 믿음으로 구원은 못 받지만 남의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말입니다. 

물론 나 자신이 기도하는 게 가장 좋지만 남을 위한 기도(이것을 중보기도라고 하지요?)가 참으로 놀라운 힘이 있기에 오늘 말씀에 하나님이 소돔을 멸망시키실 때 누구를 생각하셨다는 것입니까? 예,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아브라함의 기도가 생각나셔서 조카인 롯을 소돔을 유황불로 태우고 뒤집어엎으실 때 성에서 내보내 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게 가능합니다. 특별히 남편을 위한 기도, 아내를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 가족과 친척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간절한 중보기도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를 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그래서 위대한 기도의 첫 번째 순서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위대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조카와 그 자녀를 구원한 위대한 기도의 내용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열 명만 있으면...

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나오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는 이야기기 때문에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아브라함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 조카 롯을 거두어 친아들처럼 키우다가 가나안 땅에 함께 정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재산이 늘어나고 양과 소가 늘어나자 더 이상 삼촌과 조카가 함께 동거하며 살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삼촌이 조카에게 친 아버지 아들 같은 두 사람 사이가 이런 문제 때문에 깨지면 안 되니 서로 떨어져 살 곳을 찾자고 제안하게 되지요. 

삼촌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죄하리라”(창 13:8~9) 하고 양보하고 롯이 먼저 살 곳을 택하게 되는데 롯이 선택한 기준이 문제가 됩니다. 롯은 근처에서 가장 비옥하고 넓은 땅을 찾는데 그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입니다. 철저하게 인간적, 육신적 안목에 따라 선택을 한 것이지요. 문제가 뭡니까? 롯이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는 살기는 좋았는지 모르지만 우상과 죄악이 만연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동성애를 할 정도로 죄가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얼마나 죄가 가득하고 타락했는지 창세기 18:20~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가 하도 죄 때문에 몸살을 앓고 거기서 들려오는 비명과 고통의 신음소리가 크니까 직접 소돔과 고모라를 방문하셔서 실사를 하시겠다는 겁니다. 정말 그 부르짖음 소리처럼 죄악이 가득한지 직접 조사하셔서 정말 그러면 멸망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하나님이 두 천사를 대동하고 소돔과 고모라에 조사하러 가시는 길에 아브라함 집 앞으로 지나게 되신 것이지요. 창세기 18:1을 보면 아브라함은 늘 자기 장막 집 앞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날도 지나가는 세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 극진히 대접하는데 누군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의 발을 정성껏 씻어주고 최고의 정성으로 음식을 대접하고 쉬게 해드리는데 놀랍게도 이 세 나그네가 바로 소돔 고모라로 향해 가던 하나님과 두 천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큰 축복을 받아 다시 한 번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이 손님 대접을 잘 해 큰 축복을 받은 것이지요. 여러분도 손님 대접 잘 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3:2은 손님 대접이 얼마나 큰 복인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온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손님 대접이 단순히 손님 오면 맛있는 것 대접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을 잘 대해 주고 친절과 사랑을 베풀며 남을 잘 섬기는 자세와 태도를 뜻합니다. 로마서 12장에 은사 목록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13절에 보면 이런 은사가 나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것을 소위 ‘손 대접의 은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손 대접의 은사란 다른 성도나 다른 사람들을 아브라함처럼 사랑으로 잘 대접하고 품어주고 섬기는 자세를 뜻하는 것이고, 이런 은사를 받은 분들이 우리 주변에도, 교회 안에도 계시지 않습니까? “저렇게 퍼주고 나누어주면 자긴 뭘 먹고 사나?” 걱정되십니까? 걱정 마세요. 하나님이 이런 손 대접의 은사 받은 분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여러분도 이 은사 꼭 받으셔서 남을 잘 대접하고 섬겨 더 큰 복을 받는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말씀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16절을 보면 이제 나그네들이 대접을 잘 받고 소돔으로 향해 떠나게 되는데 두 천사만 가고 하나님은 남아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길 이유가 없다고 하시면서 “실은 우리가 온 이유가 소돔과 고모라를 가봐서 정말 죄가 그렇게 많으면 멸망시키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이러다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거기 사는 조카 롯과 가족들도 다 죽게 생겼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제 다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럴 수 없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 할지라도 공의의 하나님은 절대 악인과 함께 의인도 멸하시는 분이 아니지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며 간구한 것입니다. “주여! 그렇다면 그 멸망할 성 중에 의인 오십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26절) 참 다행입니다. 그 성에 의인 오십 명만 있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봐서라도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좀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죄악 많기로 워낙 악명이 높은 소돔 고모라에 혹시 의인이 오십 명이 안 되면 어쩌나 걱정되었는지 “다섯 명만 감해 주십시오. 의인 사십 오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더니 점점 줄어서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급기야 의인 단 열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냐고 묻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에도 “그 큰 성 소돔과 고모라에 그래도 하나님 두려워하고 기도하는 의인 열 명이 없겠는가?” 싶었겠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셔서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32절) 중보기도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누가 의인인가?

그렇다면 과연 아브라함이 말한 의인이 누구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 성 중에 오십 명만 있으면, 아니 사십 오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마지막에는 단 열 명만 있으면 하나님이 그 성 전체를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의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 의인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의인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 전체는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죽을 수밖에 없는 중죄인입니다.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사는 방법, 의롭게 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믿음으로 나만 구원받은 사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소돔은, 고모라는 남의 생명을 귀하기 위해 눈물로 기도한 사람, 전도한 사람 단 열 명이 없어 멸망한 것이지요. 만약 소돔과 고모라에 조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간절한 중보기도를 드린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단 열 명, 아니 단 한 명만 있었더라도 아마 하나님은 그 성을 구해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유황불에 다 타 멸망당하고 맙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큰 성읍 소돔 고모라에 겨우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다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서 구원 받고, 다른 이들의 생명을 위해 중보기도 한 의인 단 열 명이 없어 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중보기도, 아브라함 같은 의인의 중보기도가 필요한 대상은 누구겠습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도시 포항과 교회가 위치한 이 지역을 위한 중보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교회와 가정, 우리 자녀손과 가문을 위한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올해 꼭 전도하기로 마음먹은 영혼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드려 영혼 구원하는 의인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둘째, 말씀대로 신앙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처음부터 타고 나서 신앙대로 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과연 누가 완벽하게 성경대로 살겠습니까? 다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발버둥치는 사람이냐?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소돔 고모라 같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충 죄 짓고 사는 사람이냐? 이 차이가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 좀 발버둥 쳐 보세요.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다고요? 목사님도 사업이나 직장생활 안 해봐서 세상 물정 잘 모르고 쉽게 얘기하지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고요? 저도 압니다. 하나님도 잘 아십니다. 아시기 때문에 어떻게든 말씀대로 살려고, 좀 손해 봐도 믿음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책임져 주시고 보상을 해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래서 성경은 의인이 그리 거창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의인은 의외로 아주 작은 데서 나타납니다. 의인은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용감하게 ‘예’ 해야 할 때 ‘예’ 하고, ‘아니오’ 해야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오늘 주보 담임목사 칼럼 난에 제가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해 <영웅이 된 웨이터>라는 글을 썼습니다. 미국 휴스턴의 한 레스토랑 웨이터가 졸지에 영웅이 되고 수많은 팬이 생겨나 그야말로 ‘전국구 스타’가 되었답니다. 

스테이크하우스에서 2년 일해 온 그는 손님들에게 늘 친절하고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날도 두 팀의 단골손님을 맞아 자리를 안내했는데 처음 들어온 가족을 안내한 뒤 그 다음 가족을 바로 칸막이 옆자리에 앉게 하자 두 번째 가족의 아버지가 자리를 옮겨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자리를 옮겨주려 할 때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특수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은 특수한 어딘가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먼저 들어온 가족 중에 다운증후군을 앓는 5세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한 말이었습니다. 가르시아는 그의 말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뭔가 따끔하게 쏘아붙이고 싶었습니다. 

자칫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여지만 곧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께는 서빙 못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그 가족은 화가 나 나가버렸습니다. “어느 누구도 시끄럽고 방해되는 아이 옆에 앉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애가 있는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요구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아이도 신이 주신 선물이다. 차별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다운증후군 아이의 가족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아픔을 주지 않으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다른 웨이터가 나중에 말해줘 알게 됐습니다. 

엄마는 “내 어린 아들을 옹호해준 그에게 너무나 감사하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영웅이라고 일반인들보다 더 용감한 건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 영웅이다.” 이 말처럼 불의나 거짓에 용감하게 No 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또한 정직하게 할 줄 아는 그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요? 그런 그리스도인이 진정 하나님이 이 시대에 찾으시는 의인 아닐까요? 이런 한 사람의 영적 영웅이, 의인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 아닐까요?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주 큰 용기나 결단은 아니더라도 작은 용기와 결단이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다시 한 번 창세기 19:29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렇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아무리 큰 위기를 당해도, 내 교회나 가정이 자녀들과 자녀손에게 아무리 엄청난 어려움이 닥쳐와도 아브라함처럼 기도하는 한 사람, 중보기도로 생명 걸고 엎드리는 한 사람의 의인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생각하사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특별히 남편을 위한 기도, 아내를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가족, 친척,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모두가 이 아브라함 같은 한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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