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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나은 義 (마 5: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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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義 (마 5:17-26)

 
오늘의 읽은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중 가장 어려운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비켜갈 수 없는 산처럼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 해석은 이 말씀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고 이후에 마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추가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신학적인 견해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시면 됩니다. 왜 이 구절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일 리가 없다고 보느냐. 아직 그 당시에는 이런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반부에 이런 논쟁이 발생했을 리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이후에 발생한 문제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가 이 복음서를 썼을 즈음 주후 70년, 60년경에 이 문제가 불거졌지 않았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의 가르침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그러면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한 게 아니냐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위와는 다른 방향으로 기독교를 끌고 가고 있다는 우려를 자아낸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 중에 그런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고 봅니다.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인데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폐지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마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 복음서를 쓰면서 예수님의 본래 의도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수록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이론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편이고 나도 여러분 편이라는 인증서와 같은 성경구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방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는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견제하고자 하는 포석이 깔려있다�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지옥 간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울식의 가르침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불완전하다, 열등하다고 해석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고 마태가 바울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었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이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해석은 이 구절이 마태가 추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원래 하신 말씀으로써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매우 중요한 신념을 담은 구절이라는 해석입니다. 저는 이 해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이 해석 위주로 오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말씀이 복잡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복선을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선율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선율은 율법의 내면화입니다. 그게 바로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살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이에요.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간음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여기에서 키워드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살인이든 간음이든 그것이 외적인 행위로 나타나기 이전에 마음의 차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고 마음에서 살인을 하던 마음에서 간음하는 것은 그건 이미 죄로 성립 된 것이라는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떤 외형적인 규칙, 외적인 규례 정도로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그 율법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거룩함은 외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에 사람의 내면,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취지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고 신약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에도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돌에 쓴 것이 아니요 육의 마음에 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돌 판에 새겨진 계명이 아닌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기신다는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도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한 율법의 내면화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

그리고 이 말씀의 두 번째 선율은 도덕론자들의 위선을 지적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도덕론자들의 위선. 요즘에 공직자 인사청문회 하는 것을 보시면 언제부터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이렇게 도덕론자들이 됐습니까. 무슨 성직자를 임명합니까. 성인군자를 뽑는 것입니까. 요즘 하는 식으로 과거에 집을 어디에 샀느니, 위장전입을 했느니, 이런 식으로 신상털이를 하면 누가 공직자가 되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공직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공직자의 자격을 그 사람의 능력, 그 사람의 실력에서 찾아야지 무슨 도덕성을 그렇게 따지고 강조합니까. 목사청빙을 하는 것입니까.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국회의원들이 정말로 도덕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닌 도덕성의 이름으로 정치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그것도 모르고 정치인들의 여론몰이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이 도덕성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다는 얘기입니까. 국회의원들은 도덕적입니까. 인간이 과연 그렇게 도덕적입니까. 우리는 과연 도덕적입니까.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왜 남에게 요구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유대인들 중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를 강조하려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에요.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지 않은 것 맞다. 폐하러 온 게 아니고 완전케 하러 왔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마음속에 형제에게 노하고 형제를 욕한 자는 이미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다. 너희는 간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의로움의 기준을 외적인 행위로 따지기 이전에 내면에서 찾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너희 도덕론자들도 불의한 것은 마찬가지다.’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의롭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불의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인사청문회를 할 때 마치 본인이 성인이라고 된 것처럼 후보자들의 결함을 들춰내서 다그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도덕론자들의 이중 잣대를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상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상당한 신앙인들이에요.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에요.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의가 어떤 것인가를 솔직하게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사야서 64장 6절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기 이전에는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에요. 만일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의로써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예수님이 인간의 종교적인 노력을 부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 그보다 더 나은 더 완전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어떻게 더 완전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얻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왔다’ 여기에서 키워드는 내가에요. 예수님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오셨어요. 그러므로 더 나은 의는 예수님을 통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바울의 신학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의로움은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의로 여겨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에요. 바리새인, 서기관들처럼 자랑할 수 있는 의가 아니고 우리의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할 수 없고 그리고 우리보다 못한 자라고 업신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도 남과 같은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한국사회에 유행하지요. 염려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힐링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면 그 자체가 힐링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람들끼리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힐링을 얻을 수 없습니다. 힐링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인데 여기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다만 의로워지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달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아홉 가지 복 중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의로워질 것이요 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저희가 배부른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지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기가 세상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기가 남을 업신여길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지금까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았으나 그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더 나은 의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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