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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희를 보전하소서 (요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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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를 보전하소서 (요 17:11-19)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1-19)  

세상 속의 제자들

오늘도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이 기도하신 대제사장의 기도문입니다. 지난주에는 본문을 통해서 제자란 누구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그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기도 내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 내용은 제자들이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서, 제자란 하나님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 소유 삼으신 자들이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복음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이요, 다시 세상을 보냄을 받은 자들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제자의 조건 가운데 마지막 조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 주님의 기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11) 

주님은 천국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아직 세상에 더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기도를 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주님이 구원하신 의도를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구원하셨을까? 왜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불러내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을까? 세상에서 잘 입고, 잘 먹고, 좋은 집에 살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괴로움 없이 살게 하려고? 물론 최종적인 목표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그런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종말이 이르고 신천신지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 삶의 터전은 여전히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즉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여전합니다. 변한 것이 없습니다. 마귀가 역사합니다. 죄가 널려 있습니다. 인생을 파멸시키는 유혹이 있습니다. 불의의 재앙과 환란이 있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범죄와 죽음이 가득합니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실족하고 파멸합니다. 이런 곳에 제자들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이들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세상 속에 남아 있으면서 전과는 달라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는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부르셔서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인간을 세상 속에 보내십니다. 세상 환경을 바꾸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들을 불러내시려는 겁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유한합니다. 언젠가는 마감될 곳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세상살이가 전과 똑같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주님의 후원을 받으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제자로서 삶의 지표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저희를 보전하사

주님의 첫 번째 기도는 제자들을 악에서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11하) 제자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치적 위험, 경제적 위험, 사회 혼란의 위험, 사람의 위험, 물질의 위험, 환경의 위험, 의식주 생존의 위험. 그런데 주님이 보전해 달라는 것은 이런 종류의 위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은 주님이 보실 때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정말 심각한 위험은 죄에 빠지는 위험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죄에서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5)  
  
주님이 인간 세상에 오신 첫째 목적은 죄를 멸하는 것입니다.(히9:26, 요일3:5) 굶주림이나 질병은 다 二次的인 것들입니다. 인간이 불행해진 제1의 원인이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 이마에 땀을 흘리며 가시덤불을 파헤치며 경작해야만 되었던 것이 바로 죄 때문입니다. 하와가 애정의 갈등 속에 살며, 산고로 고통하며, 필경 육신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다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원수요 불행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의 양식을 구하고 의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악에서 보전하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를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제자들에게 첫째 필요한 것은 육신의 번영이 아니라, 영혼이 잘 되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 즉 영혼이 죄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기독교가 점점 세속화 됩니다. 물질적 가치가 영적 가치를 덮어버립니다. 육체를 치장하고, 육신이 잘되는 일에 신앙을 경주합니다. 좋지 않은 징조입니다. 순서를 바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번영한다 해도 영혼을 죄에서 지키지 못하면, 우리의 행복은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번영도, 로마의 번영도, 공산 제국의 번영도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죄에서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왜 죄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죄의 실체가 뭘까요? 죄가 어디서 왔습니까? 죄의 출처가 어딥니까? 세상 사람들은 죄를 양심에 어긋나는 실수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분명한 실체가 있습니다. 죄를 짓는 상대는 하나님입니다. 죄를 짓게 하는 실체는 마귀입니다. 오늘 말씀 15절에 보세요.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여기서 “악”이란 단어를 많은 성경이 “악한 자”(새번역, 현대인, JB, NIV), 혹은 “악마”(공동번역)로 번역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될 모든 죄의 실체는 마귀입니다. 악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인격체입니다. 사단은 악의 영들을 부립니다.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0-13) 마귀를 이기려면 마귀의 전략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첫 번째 전략은 유혹입니다. 인류의 시조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다윗도, 광야의 이스라엘도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부인한다든지 신앙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 우리 중에서도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죄를 짓는 일은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모압의 마술사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하여금 음란에 빠지게 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쉽사리 신앙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범죄를 저지르게 만듭니다. 때로는 우리의 가까운 친구들이나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이나 사업상 거래처들을 통해서 범죄로 유인합니다.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異性으로, 때로는 명예로 우리를 유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여기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마귀의 첫 번째 전략, 유혹에 넘어가지 마세요.  
  
마귀의 두 번째 전략은 타협입니다. 하나님 계명을 100% 지키지는 않되, 절반쯤 지키게 만듭니다. 절반의 죄는 죄가 아닙니까? 죄는 죄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그들이 여호와를 완전히 버린 적은 없습니다. 항상 문제가 된 것은 여호와를 섬기면서 다른 것을 섬긴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면서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를 섬기면서 송아지도 섬기고, 여호와를 섬기면서 아세라, 태양수레, 밀곰, 그모스, 일월성신을 함께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혼합 신앙을 정조를 버린 여인에 비유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국가의 멸망, 민족의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도 지키고, 예배 생활도 잘 합니다. 그런데 낙태, 동성애는 찬성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간음죄를 수시로 짓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도박하고, 술 취하고, 남의 돈 떼어먹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죄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왕따를 시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을 예수쟁이가 먼저 꼴통 보수라고 욕합니다. 

14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4) 세상은 죄와 타협하며 사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고지식한 사람은 미워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죄와 싸워야 됩니다. 우리의 생사가 거기에 있고, 우리의 흥망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귀에 대한 우리의 전략은 뭡니까?  마귀의 전략이 유혹이요 타협이라면, 제자들의 전략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대적입니다. 대적하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마귀와 정면 승부를 하세요. 내 힘으로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의지하세요.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마귀는 강합니다. 그렇다고 약해지거나 주눅 들지는 마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물리치세요. 넉넉히 이깁니다. 엘리야는 믿음의 용사입니다. 그러나 그도 한 때는 약해졌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아합과 이세벨을 보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19:4) 

그러나 주님은 단 한 번도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는 기도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켜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세요. 마주 서서 싸우세요. 그것이 죄를 이기는 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지켜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고 보전해야 될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마귀와 죄로부터 지켜야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지켜주셔야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게 속한 자들을 보전하여 주소서!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죄를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 되게 하시고

두 번째 기도는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11) 

“우리”란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기도를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일치요, 세상 나라의 특징은 분열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다양성 속에서 조화되는 일치였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되고, 인간과 인간이 조화되고, 인간과 만물이 조화되는 일치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버린 순간부터 세상의 조화는 깨지고 모든 것이 대립하고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분열하고, 민족과 민족이 분열합니다. 동족끼리 분열하고 가족 사이에 분열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분열합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도 조화하지 못하는 인생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대립하여 삶의 환경은 깨져만 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 제자들의 일치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깨어지고 분열된 세상을 하나님 품에서 다시 하나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0) 하늘과 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는 것! 우주적 통합!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입니다. 제자들의 통합은 이 모든 통합의 출발점입니다. 제자들의 통합은 교회 일치의 초석입니다. 교회 일치는 천국 일치의 시작입니다. 천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국 성도들이 하나가 된 왕국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 모든 만물이 하나가 된 통일 왕국입니다.  
  
강조할 것은 제자들의 통합, 즉 교회의 일치입니다. 세상의 통합이 아닙니다. 세상은 어차피 동합될 가망성도 없고, 통합될 일도 없습니다. 주님의 목표는 제자들의 일치입니다. 먼저 제자들이 하나 되지 않고는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교회의 일치 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한국 땅에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교단이 60여개나 됩니다. 장로교든 감리교든 성결교든 오순절 교회든 하나 된 교단이 없어요. 예수교는 무엇이고,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아야 됩니다. 12제자 중에도 가룟 유다가 배신함으로써 조화를 깨뜨렸습니다. 교회의 화합을 깨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께 복 받기 힘듭니다. 

교회뿐만 아닙니다. 가정이든 이웃이든, 화합을 깨지 마세요. 하나 되기 위해 힘쓰세요. 가족이 하나 되고, 교회가 하나 됩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인격이 일치되고, 영혼이 일치되고, 목표가 일치되고, 사상이 일치되고, 말과 행동과 삶이 일치되게 하세요.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오늘 하나 되는 성령의 역사가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분열을 극복하고 모든 지체들이 주 안에서 하나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세 번째 기도는 제자들의 기쁨 충만 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3) 제자들은 세상에서 아무 기쁨도 없이 괴로움만 당하는 사람들인가요? 실제로 신앙을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 재미는 다 없어진다! 무미건조한 삶이 된다! 술도 못 먹지, 담배도 못 피우지, 적당히 거짓말도 못하지, 음란한 짓도 못하지, 놀음도 못하지, 도대체 할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괴로운가? 그래서 즐길 것 다 즐기고, 하고 싶은 것 다 한 후에 늙어 죽기 1년 전에 예수 믿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이 가지신 최상의 기쁨을 충만히 채워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 즐거울까요? 앞서서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쁨의 조건이 생기는 게 아니라 기뻐하는 사람이 됩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하면 산에 올라 보면 안다고 합니다. 낚시꾼에게 낚시의 즐거움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 낚시질을 해보라고 합니다. 스턴트맨에게 왜 목숨을 걸고 위험한데서 뛰어 내리느냐고 물으면 한번 뛰어 내려 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즐거움도 믿어 보면 압니다.  
  
예수를 믿는 즐거움은 바로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예수 안에 들어 와 보면 모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돈이나 집이나 땅이나 상속 재산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는데, 신앙 안에서 보면 그것이 인생 목적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차를 굴리기 위해서 기름을 넣는 것이지 기름을 넣으려고 차가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에 옷 입히는 일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사로 마음을 치장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은 위선과 과장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진실과 겸양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접 받고 군림하는 데서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섬기고 존경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데서 기쁨을 맛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이고 은밀한 기쁨을 맛봅니다.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피조물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것이 신앙의 눈입니다. 건강한 몸이 있음을 기뻐하고, 남을 위해 일할 수 있음을 기뻐하고, 내 인생이 있음 자체를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의 눈입니다. 사도 바울의 좌우명은 “항상 기뻐하라” 입니다.(살전5:16,빌4:4) 가이사랴 감옥에서도, 빌립보 감옥에서도, 로마 감옥에서도 바울은 항상 기뻐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기쁨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적 차원의 기쁨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쁨”입니다. 신앙 안에서 세상을 다시 발견하는 기쁨이 여러분 속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네 번째 기도는 제자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은 얼핏 듣기에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해달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진리로”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로”라는 말(ejn th'/ ajlhqeiva)은 영문 성경에 in the truth (JB), by the truth(NIV), through thy truth(KJV)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는 ejn(in)이라는 전치사에 do라는 동사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do the truth!  진리를 행하여! 즉 거룩을 행하는 주체가 바로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자들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거룩을 향한 행동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죄악 세상 속에서 거룩의 투쟁을 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본래 거룩이란 말(aJgiavzw :하기아조)은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 구별한다(set apart for sacred use)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구별된 행동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거룩의 목적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18) 

그 제자들은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4) 이런 환경 속에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굴하지 않고 거룩의 투쟁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거룩의 실천자들이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도구들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사명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북한의 사격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달려 와서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선수 기껏 한다는 말이, “적의 목을 노리듯이 쐈습니다!” 

김일성이가 밤낮 적의 목을 노리라고 하니까 이 친구 자나 깨나 적의 목을 노리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가정생활도 적의 목을 노리는 심정으로, 운동도 적의 목을 노리는 심정으로, 사회생활도 적의 목을 노리는 심정으로, 올림픽도 적의 목을 노리는 심정으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꿈에라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비록 우리 몸이 세상 한복판에 놓여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룩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거룩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 속에서 투쟁을 멈추지 마세요.  
  
17-19절의 말씀을 공동번역에 있는 대로 다시 한 번 읽어드립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거룩의 표준은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법칙으로 삽니다. 인간의 법칙이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삽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또 변해도 우리의 삶의 원리는 오직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실천자들이 되세요. 그것이 곧 거룩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낙심하거나 중단 없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거룩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으로 제자들을 위해 네 가지를 기도하셨습니다. 첫째로 죄악 세상에서 온전하게 보전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둘째로,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셋째로, 기쁨 충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넷째로, 거룩하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대로 복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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