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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막 셋을 짓고 싶으십니까? (막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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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 셋을 짓고 싶으십니까? (막 9:2-8)

권총을 든 은행 강도 패거리가 복면을 하고 은행에 들어왔습니다. 겁에 질린 지점장은 강도가 시키는 대로 금고문을 열어주었고, 강도들은 돈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강도들이 도망친 후에 도착한 경찰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강도를 봤던 지점장에게 범인들의 인상착의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도에게 금고문까지 열어주었던 지점장은 강도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강도의 키가 얼마쯤 되는지, 얼굴 생김새는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점장은 강도가 자신을 행해 겨누고 있었던 총구멍의 크기가 얼마인지, 총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오갈 정도로 중차대한 일을 당한 지점장은 누구보다도 강도의 인상착의나 그의 행동 등에 대해서 집중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는 그 총에 대해서만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그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어떤 단서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을 ‘무기 중심 효과’(Weapon Focus Effect)라고 부릅니다. 위기상황에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특정 영역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자기가 듣고 싶고 자신이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만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건국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인 하지현 교수가 쓴 『소통의 기술』이라는 제목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현상은 비단 강도를 만난 것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해도 각자 보고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관심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낯선 지역에 가면 제 눈에는 ‘십자가가 몇 개나 있나? 어디에 교회가 있나? 왜 이런 곳에다 교회를 세웠을까?’하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처럼, 이발사는 사람을 볼 때 머리 스타일을 보고, 신발가게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를 봅니다. 자신의 관심사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정보라 하더라도 내가 관심이 없으면 그것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머릿속 휴지통에 버려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에 관심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에 맞게 정보를 수집하고 정보를 얻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같은 반 친구 가운데 공부를 지독히도 안 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관심사는 오직 팝송이었습니다. 저는 음악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당시에 어떤 팝송이 유행하고 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팝송을 아주 좋아합니다. 30년도 넘는 당시에도 서울에서 팝송 연주회가 열린다 그러면 그 친구는 학교엔 나오지 않고 서울에 올라갔습니다. 

한 번은 친구들이 ‘너 도대체 팝송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팝송의 제목을 쓰는데 쉬지 않고 200곡 이상을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을 다 줄줄줄 외우며 노래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팝송은 우리나라 노래가 아닙니다. 대부분 영어로 부르는 것이잖습니까? 그 친구는 영어로 된 가사를 미국 본토 사람처럼 발음하며 팝송을 불러댑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영어 시험은 언제나 거의 빵점입니다. 그 친구에게 영어는 관심 없는 과목이지만, 그가 좋아하는 팝송은 그 어려운 가사라 하더라도 다 외워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변화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본문에 그저 ‘높은 산’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스라엘 지형에서 가장 높은 산인 헬몬산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시기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마을에 가셨는데, 그 가이사랴 빌립보가 헬몬산 가까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헬몬산은 요단강 북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높이가 2814m나 됩니다. 
  
변화산에 오르신 후 예수님의 모습은 황홀할 정도로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의 솜씨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옷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구약성경에 나오는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무엇에 대해서 말씀하셨는지는 명확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 하실 것을 말할새”(누가복음 9:31)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에 대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졸고 있다가 깨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그러니 우리 산 아래로 내려가지 말고 여기다가 초막 셋을 짓고 계속 여기에 머물며 살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초막 세 개를 짓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졸다가 깨어보니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고 광채 나는 모습으로 변형되셨고, 성경에서만 읽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는 뭔가 말을 해야 하긴 하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다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할 수 있는 말은 참으로 많습니다. 하고 싶은 말 역시 많이 있을 것입니다. 모세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은 말도 많이 있을 것이고, 엘리야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른 모든 말은 접어두고 ‘내가 여기에다 초막 셋을 지을테니, 우리 여기서 오랫동안 살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상황을 몇 시간 전으로 돌려보십시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을 다니시던 중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 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말하고요, 어떤 사람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들은 분명 저분은 선지자임에 틀림이 없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베드로가 나서며 말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제서야 비로소 메시야로서 당신이 가셔야 할 길을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고 결국에는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3일 만에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니다.(마가복음 8:27절 이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야로서 어떤 길을 가셔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 죽음의 길일지언정, 당신은 그것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의 길을 가셔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메시야가 죽으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마가복음 8:32절에서는 그저 ‘항변했다’고만 되어 있는데, 그 말은 예수님을 꾸짖었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생각을 잘못하고 있다고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고난당하시고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당장 철회하라고 꾸짖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막고 나서는 이유는 ‘메시야는 죽음을 통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서 일을 한다.’는 당시 사람들의 메시야관에 의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젊음을 바쳐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면 자신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죽으면 당신을 바라보고 모든 삶을 내려놓고 당신을 따라다닌 우리는 무엇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욱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만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가복음 8:34)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제자들까지도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려한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을 반기지 않고 막아선 베드로가 ‘너도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를께요.’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강하게 반발하며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변화산 위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으시게 될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변화산 위에까지 올라온 베드로는 여전히 그 길을 굳이 가시겠다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예수님을 그대로 십자가에 죽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금처럼 영광스럽게 변화하신 주님을 그냥 그대로 모시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변화산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변화산을 내려가면 분명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입니다. 조롱을 받고 고난을 받다가 채찍에 맞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죽으실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바라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걸 막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초막을 짓고 여기에 머물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 받으시고 죽음의 자리에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변화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변화산 위에다 초막 셋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물론 고난과 십자가를 즐거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내 욕망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을 때에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실 때 우리는 기쁨으로 내 것을 내려놓거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내게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안하고 행복한 내 삶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초막 셋을 짓고 싶어 합니다. 행복의 자리에다가 초막을 짓고 영원히 이 행복의 자리에서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부요함과 풍요의 자리에 초막을 짓고 그 부유함을 영원히 만끽하며 살고 싶어 합니다. 내 꿈과 야망의 자리에 초막을 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 초막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지라도 그 초막 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곳이 영원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이고,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줄 자리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한 채 변화를 거부한다면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 변화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은 어느 누구도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지금 행복하고 황홀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지금이 행복하고 좋은데 변화되면 그 모든 행복과 축복이 사라져버리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변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 자체가 변화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인 당시에도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서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곳입니다. 지형학적으로 문명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는 큰 도시였고,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풍요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은 척박한 곳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땅입니다. 그 가나안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변화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던 아브라함은 하란이라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당시 하란 역시 상당히 문명이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해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하란은 수메르 문명보다 수백 년이나 앞섰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상당기간 머물러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긴 했지만, 그 역시 좀 더 풍요롭고 여건이 좋은 곳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하란에 머물며 살고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그 하란에서도 떠나긴 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변화를 위해서 현재의 삶을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평안과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끊임없이 변화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변화산 위에서의 베드로가 지금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이 행복한 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황홀하고 좋은데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겠습니까? 더구나 산 아래로 내려가면 고난의 길을 가야 하고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 행복한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고 평안한 삶에 머물기를 원하는데, 그 행복하고 평안한 삶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평안하고 풍요로운 삶의 자리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평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내려놓고 고생의 길을 간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의 행복하고 평안하고 풍요로운 자리, 황홀하여 도저히 떠나고 싶지 않는 그 자리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변화산 위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경험했던 그 황홀한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황홀한 순간은 잠시만 존재할 뿐입니다. 한 순간일 뿐입니다. 잠시뿐인 그 황홀함의 자리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찬양하는 이 자리에서 하늘의 황홀함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여기가 영원히 우리의 자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찬양을 통해서 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황홀한 신앙의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기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는 우리가 영원히 머물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달픈 현실의 문제가 산적해 있는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일터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변화산에 영원히 머물러 계실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하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도 변화산 위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변화산 위에 아무리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다 하더라도 오늘 경험한 이 황홀한 경험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 아닙니다. 지금의 이 황홀한 경험은 오직 그 때 한 번으로 족합니다. 초막 셋을 지어놓고 거기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지금의 상황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그 자리가 우리에게 영원하지 않습니다.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 지속되기를 원하지만 때로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삶에서 빠져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래서 영원히 머물고 싶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라고 말입니다.

다음날 아침 변화산에 올라갔던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변화산 아래에서는 난리를 겪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 고침받기 위해서 데리고 왔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 올라가시는 바람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 아이를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으려고 했지만 내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놈들이 귀신 하나 쫓아내지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진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전에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파송을 받고 나갔을 때에는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쳤습니다.(마가복음 6:13) 

그런데 지금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귀신도 꼼짝하지 않고 병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땀을 흘리며 귀신을 쫓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더구나 서기관들이 자신들을 향해 조롱하며 놀립니다. 부끄럽기도 합니다. 어떻게든지 - 귀신들린 아이나 그 아버지를 위해서도 귀신을 쫓아내야 하겠지만, 자신들의 체면을 봐서라도 쫓아내야 하겠는데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어 안절부절하고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 아이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변화산 위에서 한 말처럼 초막 셋을 짓고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면 산 아래에서 나머지 제자들은 계속해서 진땀을 흘리며 고생해야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산 아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관심도 없었습니다. 지금 내가 경험한 이 황홀한 순간만 영원히 누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황홀함을 경험하고 있을 때, 또 우리가 행복에 겨워하고 있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나만 행복하다고 그것으로 만족해 버리는 것은 결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채 주변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내 행복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내가 기뻐하며 웃느라고 다른 사람의 눈물을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오늘 기쁜 설 명절입니다. 우리의 기쁨 때문에 힘들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잊지 마십시다. 나만 행복하고 나만 편안하고 나만 기쁘면 그만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지지 마십시다. 특별히 남자들 조심해야 합니다. 남자들이 텔레비전 앞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놓고 TV의 황홀경에 빠져 깔깔대며 웃고 있는 사이에, 변화산 아래인 부엌에서는 아내와 여자들이 남자들 뒷바라지 하느라 눈물과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초막 안에서 화투판을 벌여놓고 놀고 있는 사이에, 변화산 아래에서 아이들과 씨름하고 있는 아내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들만의 초막을 걷어치우고 변화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힘들어하고 고생하는 가족들이 있는 변화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것은 순전히 베드로의 욕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한 것처럼 말을 합니다. ‘초막 셋을 짓겠는데, 하나는 주를 위하여 지을 것이구요,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짓겠습니다. 저희들이야 초막 없이 밖에 머물지라도 여기 주님 곁에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자기들은 고생해도 괜찮은 것처럼 말은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의 욕심 가득한 생각에서 나온 말일 뿐입니다. 

지금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욕심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나만 만족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만들어낸 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막으려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살아야 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그렇게 말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초막 셋을 짓고 싶다는 우리의 욕심이 만들어낸 생각들을 이겨내십시다.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길을 두려움 없이 가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홀한 변화산 위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초막을 짓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변화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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