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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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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8)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근검절약하여 모은 돈을 죽기 전에 자신이 살던 사회에 내어놓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금동서(古今東西)가 다르지 않습니다. 

동패낙송(東稗落誦)이라는 문헌에 보면 무일푼으로 살림을 일구고 절약하여 모은 남양 장씨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번 수천 섬을 행려 병자 치료비와 가난한 자들을 먹여 살리는데 썼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내가 모은 재물도 알고 보면 다 여러분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노인들이 평생 모은 거금을 학교재단에 기부하고 세상을 떠나는 일들이 잊을만하면 보도되곤 합니다. 살벌해진 세상의 살기(殺氣)를 거두어가는 소식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의 청문회 현장은 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입니다. 세 살짜리 손자에게 12억 원짜리 집을 사준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20대 자식의 이름으로 수십억의 재산을 물려준 일도 있습니다. 조부로부터 받은 돈이라고 해도 공인의 자세에는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고관들의 자녀들은 잘 먹고 좋은 환경에 사는데도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허약한데서야 말이 됩니까. 입대할 조건에 불합격했다는 것이 그들의 수줍은 변명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숫자가 많다보니까 변명이 아니라 법적 당위가 되었습니다. 병역의 의무가 국민의 막중한 의무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은 스스로 이 땅에 살기를 원치 않는 자들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Ⅰ. 복음전파의 우선순위를 함의하고 있는 명령 입니다. 

본문 10장 5-6절에 『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파되어야 한다는 한시적 명령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되어야 한다는 구원의 순서를 역설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2장 9-10절에 『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은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옛 북이스라엘 수도인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복자 "살만에셀"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고 이민족異民族을 이곳에 이주시켜 혼혈족을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상종하지 아니했습니다(요 4: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에게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리고 선민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메시야 도래 소식을 먼저 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 라는 설교 원칙을 정했습니다. 전도가 자신의 가까운 골육부터라는 원칙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먼저 자기 골육(종족)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생활하고 호흡하는 골육부터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 했습니다. 


Ⅱ. 이적은 복음전파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장 7-8절에 『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고 했습니다. 

가면서 전파하라는 말씀은 복음전파의 준비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눅 17:21). 
이것은 심령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병행해서 여기 『 천국 』은 장차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는 아직 그때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가까왔다고 전파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전파의 핵심내용입니다. 

복음전파 과정에 네 종류의 이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병든 자를 고치고 ② 죽은 자를 살리고 ③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고 ④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여기 『 죽은 자를 살린다 』는 것은 예수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사명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컨대 욥바에 있는 다비다가 죽었을 때 베드로가 살려주었던 기적이 여기에 해당됩니다(행 9:36-41).
이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기사(奇事)(테라스)입니다.

놀랄만하고 희한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놓고 시비하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도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그 방법을 곡해하였지만 그 확실성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의심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적이 많아지면 이적이 못되고 보통사례가 됩니다. 따라서 이적의 희한성과 희소성은 이적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2) 표적(表蹟)(세메이온)입니다. 

이적의 다른 이름이 표적인데 이적을 행한 자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는 생산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예컨대 오병이어의 기적과 바다 위로 걸으신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남편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생명과 기쁨의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이적입니다. 
이적은 예수 자신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의 행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적이 기독교를 만든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환난 날에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와 함께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교회)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3) 능력(能力)(듀나미스)입니다. 

이적의 다른 표현이 표적이라면 이적의 현장역사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신 창조적 능력을 말합니다. 
이적이 어느 시대나 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선지자들이라고 해서 다 이적을 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였으나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요 10:41). 

신학자 "풀러"(Fuller)는 이적은 어린 교회의 강보라고 했습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말하기를 "농부가 어린나무를 심고 그것이 어릴 때엔 울타리를 두르나 그것이 자란 후에는 걷어 치운다. 그와 같이 교회가 어릴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주셨으나 장성한 후엔 그것을 치우셨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Agustinus)은 초기에는 이적 자체를 부인하면서 "너는 이 이적을 믿으라. 곧 이적 없이 세계가 회심(回心)하게 된 이적을"이라고 했습니다. 이적의 최대 표징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Ⅲ. 기적에 대한 자신의 소유의식을 버리고 존재의식을 가지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10장 8절에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너희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사역자와 모든 교인들이 가져야 할 대원칙입니다. 제자들은 서민들이었습니다. 제자들 대부분은 다 순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이적과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자들입니다. 
처음에는 미미하던 교역자가 큰 교회를 하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받은 것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에게만 국한된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능력은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나에게 있는 능력에 대해 존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존재의식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실존양식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소유의식은 극히 정상적인 행위입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칙적으로 존재를 소유해서도 안되고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존재이지 인간의 소유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은 그 능력에 의존할 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유는 존재에서 오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은혜는 대가없이 거저 받는 공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기적과 축복이 바로 존재로부터 오는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엡 2:5).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딛 2:11). 그 은혜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행 20:32).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 구원이라고 했습니다(행 15:11). 

에베소서 2장 8절에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했습니다. 

시편 77편 9절에 『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무차별적인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에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무런 댓가없이 거저 받는 은혜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나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주체인 나와 객체인 무엇과의 관계가 모두 지속성과 영원성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주체와 무엇이라는 객체는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해체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나를 존재케 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주체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살후 3:2).

그 믿음의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15).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벧전 1:5).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라고 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존재는 받는 것이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요일 3:16).

요한복음 15장 13-14절에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흘러가는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있다더니 달의 땅을 파는 천체 부동산업자가 등장하고 화장한 유골을 우주에 뿌리는 희망자를 모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요즘은 밤하늘의 별을 파는 별장사가 있다고 합니다. 밤하늘의 별을 파는데 산 사람의 이름을 붙여 소유증을 준다고 합니다. 

고대 희랍의 여류시인 "사포"는 당신의 별이 너무 밝아질수록 희미해지는 나의 별이라고 읊었습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고 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작가인 "반데르포스트"의 소설에 보면 부시맨들은 성인식에서 주술사로부터 자신의 별을 제물로 주고 산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장차 밤하늘의 별 주인이 많아질 조짐입니다. 

얼마 전에는 세종대왕도 별 이름을 얻어 우주로 진출했다고 합니다. 거저 존재하는 별을 거저 주어야지 팔고 사는 것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존재는 소유할 수 없고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명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 모든 것을 누구에게 주느냐. 그것은 당연히 주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야만 합니다. 드릴 때는 내가 받은 것처럼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죽으셨다가 부활해서도 그 사랑은 여전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고 확정적입니다(롬 5:8).

마태복음 10장 37절에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드린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에 『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 했습니다. 

교회운동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거저 받은 내 목숨, 거저 받은 내 능력, 거저 받은 내 소유, 거저 받은 내 축복, 거저 받은 내 명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저 주고 또 주께로부터 거저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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