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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어 놓고 산다 (막 1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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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놓고 산다 (막 15:42-4)

1. 우리는 지금 '사도신경'을 따라 가면서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차례로 묵상해 왔는데,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후에 장사되었다는 고백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우리 말 '사도신경'에서 예수께서 장사되었다는 사실, 현대 말로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무심코 넘어가기 쉽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라고 번역해 놓으니, '장사된 것'을 스쳐 지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원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문에 더 가까운 영어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He]...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그분은 지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주의깊은 분들은 눈치를 채셨겠지만, 우리 말 '사도신경'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라는 구절이 빠져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원문과 영어 번역본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에 대한 고백이 완전한 문장으로 끝이 납니다. 부활에 대한 고백은 새로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고백에서 슬그머니 부활에 대한 고백으로 넘어갑니다. 그로 인해 예수께서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게 취급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초대 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15:3-5)

여기서 바울 사도는 먼저 믿는 사람들에게 전해 받은 것을 고린도교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회심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에 대한 핵심적인 고백이 정리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전해 받은 바에 따르면, 예수님에 관해 다음의 네 가지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1. 성경에 예언된 것처럼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2. 무덤에 묻히셨다.
3. 성경대로 사흘날에 살아나셨다.
4.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은 초대 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사도신경'에도 그 사실이 분명하게 명시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말로 "장사된 지 사흘만에"라고 붙여서 번역하는 바람에 그 강조점이 흐려지게 된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이 왜 초대 교인들에게 중요했습니까? 하긴, 최근에 와서 이 고백이 부쩍 중요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요즈음 자주 제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2천 년 전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주로 정치적인 반란을 도모한 사람들에게 일벌백계의 목적으로 고안된 것입니다. 십자가 형을 당한 사람은 천천히 그리고 아주 고통스럽게 죽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몇 시간만에 운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이삼일에서 길게는 열흘까지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처형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범이기 때문에 운명한 후에도 그대로 십자가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썩어가는 시신은 새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부패 과정이 진행되면서 시신의 일부가 땅으로 떨어져 내립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개들이 그 시신을 먹습니다. 나중에 짐승도 거들떠 보지 않을 정도가 되면 흙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십자가 형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신이 방치되고 짐승의 먹이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곳을 가리켜 '골고다'(Golgotha)라고 부릅니다. 마가는 '골고다'라는 말이 '해골곳'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해 줍니다(15:22). 그곳을 '갈보리'(Calvary)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은 라틴어 번역 성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골고다' 혹은 '갈보리'는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던 처형 장소를 가리킵니다. 그곳에는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들의 유골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 같은 관례에 의하면, 예수님의 시신은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려 있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은 꾸며낸 것이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헐뜯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를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의 부활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기독교 신앙은 부활 사건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시신이 매장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모두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고,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 신앙은 와르르 무너집니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보통 이삼일에서 열흘 정도까지 고통을 받다가 운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과 여섯 시간 정도만에 운명을 하셨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금요일 오전 아홉 시 즈음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오후 세 시 즈음에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외적으로 빠른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매장되었다 해도, 그의 시신을 내릴 때는 죽은 상태가 아니라 실신한 상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신했던 예수는 서늘한 무덤에서 이틀 동안 푹 쉬고 나서 원기를 회복하여 무덤 문을 밀고 나와 부활했다고 속이고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의혹과 공격 때문에 초대 교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뿐 아니라 죽었으며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그 사실을 각각 명시한 것입니다.


3.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약 여섯 시간만에 운명하셨습니다. 33세의 건장한 청년이 이렇게 일찍 운명한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받은 고문 때문입니다. 목요일 밤에 체포된 주님은 가야바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고, 빌라도에게 이송되어 밤새도록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2005년에 크게 주목을 끌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Jesus Christ)라는 영화가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십자가를 골고다까지 지고 가지 못할 정도로 기진하신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시간만에 운명하신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금요일 저녁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장례를 치룰 수 없었습니다. 또한 안식일이 시작될 때까지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방치해 둔다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시신을 수습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정치범의 시신을 누가 감히 내릴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때, 아리마대라는 동네에서 난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섰습니다. 그는 공회원이었습니다. 예수를 빌라도에 고발한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19:38)

어떤 연유로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공회원의 명예로운 직책을 버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 반대 의견을 낼 정도의 용기도 그에겐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재판 과정과 처형 과정을 멀리서 지켜 보면서 마음에 큰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다음, 아리마대 요셉은 비로소 용기를 냈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달성된 이상, 자신이 할 작은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기 전에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수습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위험한 일이기는 했지만, 어쩌면 빌라도가 순순히 허락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도 자신은 예수에게서 큰 혐의를 찾지 못했습니다. 또한 빌라도가 총독의 직책을 수행하려면 산헤드린 의원들의 협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산헤드린 의원의 청이라면 웬만하면 들어주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요셉은 조심스럽게 빌라도에게 찾아가 부탁했을 것입니다. 빌라도 역시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가 수그러 들었으니, 시신을 어떻게 하든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허락함으로써 자신의 마음 한 켠에 있던 부담감을 덜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청을 들은 빌라도는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마가는 그 대목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죽은 지 오래 되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 주었다. (15:44-45)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시신은 요셉이 마련해 둔 새로운 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시신은 보통 그대로 버려졌지만, 매장된 예가 전혀 없지도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유골이 담긴 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한다면,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면 십자가에 달렸던 사형수도 매장되었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어 장사되었다. 

한 사람이 죽는 것과 장사지내는 것은 정서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장사되지 않으면 죽음의 과정이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장사 혹은 매장은 한 사람의 인생의 마침표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장례는 최종적인 이별 예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예식입니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은 사람을 보내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찾지 못해 장례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911테러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들 중에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유족들은 오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최종적인 이별 예식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사지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분들 중에 그런 아픔이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어 장사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의미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다른 죄수들의 것처럼 골고다 언덕에 버려지지 않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되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적 진실입니다. 이로써 그분의 죽음에는 완전한 마침표가 찍혔습니다. 더 이상의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분은 한 인간이 거쳐야 하는 모든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거치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철저히, 확실히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우리는 '장사된 지 사흘만에'라는 대목에서 너무 빨리 지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매장되심으로써 완전한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낮은 지점까지 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뤄야 할 모든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4. "예수께서 장사되었다"고 고백할 때, 우리가 생각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자신도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롬 6:3-4)

골로새서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2)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나를 장사지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옛 사람이 '죽는' 것만이 아닙니다. 완전히 매장 당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매장법은 우리의 그것과 조금 다릅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수의로 싸매어 돌산에 마련된 무덤 동굴에 안치시킵니다. 그 무덤 동굴에는 여러 구의 시신을 안치시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신을 안치한 다음, 무덤 입구를 돌로 막아두고, 그 틈을 밀납같은 것으로 밀봉을 합니다. 짐승이나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 년 정도를 지나면 살은 다 썩어 없어지고 뼈만 남습니다. 그러면 돌로 만든 유골함에 안장합니다. 그 때에야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장사되었다"는 말은 이렇게 철저히 옛 사람이 죽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 나를 지배했던 옛 자아가 목숨을 잃고 무덤 속에 장사 지낸 것처럼 무력해졌다는 뜻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죽어 놓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옛 자아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싸워 본 사람이라면 혹은 믿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힘 써 본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손 들고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나는 세례도 받고 믿는다고 힘 써 왔는데, 아직도 옛 사람에게 끌려 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대로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침례를 받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내게 세례를 베푼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어떻게 하면 옛 사람을 완전히 장사지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세례를 받는 형식 때문도 아니고, 세례 받을 때의 마음 가짐 때문도 아니며, 세례를 베푼 사람의 능력 때문도 아닙니다. 군대 가서 초코 파이가 먹고 싶어 세례를 받았다 해도, 침례가 아니라 세례를 받았다 해도, 혹은 지하 개척교회에서 조촐하게 세레 받았다 해도, 그것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것이라면, 그 사람의 자아는 그 순간에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으며 무덤에 매장된 것입니다. 

문제는 세례 받은 후에 그 사실을 계속 기억하고 '죽어놓고 사는 사람'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 자아가 이미 죽어 장사 지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니, 죽었던 자아가 다시 살아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로마서 6장의 말씀 후반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0-11절)

이 본문에 나오는 마지막 단어, 즉 "알아야 합니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로기조마이'(logizomai)입니다. 영어로는 주로 'consider' 혹은 'reckon'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뜻을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나게 하려면 '간주하다'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 말 개역 성경에서는 '여기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톰 라이트(N. T. Wright)는 "calculate yourselves as being dead to sin"이라고 번역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계산하라"는 뜻입니다. '로기조마이'가 원래 은행용어였기에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게다가, 현재 명령형이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 명령형은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항상, 언제나, 늘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 이미 옛 사람이 장사되었다는 사실, 이미 죽어 놓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결혼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두 사람은 한 몸이 됩니다. 두 사람은 그 하나됨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그 사실을 인정하고 확인하고 선언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실제로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느껴지지 않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다 보면 하나됨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수 많은 부부가 갈라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도 이와 비슷합니다. 옛 사람이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매일 인정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유혹을 만날 때마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나는 이미 장사된 몸이다"라고 생각하고 선언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두려워하면서 "나는 죄에 대해 장사지낸 몸이다"라고 선언하라는 뜻입니다. 무덤에 장사된 옛 사람이 무덤 문을 밀고 나오려 할 때마다 그 옛 사람에게 말하라는 뜻입니다. "어이! 너는 이미 죽었어."

그렇게 하면, 죄가 힘을 잃어버리고 꿈틀대던 옛 사람이 제 자리로 돌아가 드러눕습니다. 제가 최면술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현실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현재에 일어나게 하는 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옛 사람을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느껴지지 않지만, 믿음으로써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믿고 선언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하면 그렇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많은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저는 너무나도 약한 존재입니다"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죄의 유혹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집니다. 하긴, 더 많은 사람들은 죄를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죄를 즐기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죄를 두려워하고 싸우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세례를 통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분명히 알지 않으면 죄와의 싸움에서 번번이 지게 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릅니까?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 오릅니까? 그 순간에 세례를 통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해 보십시오. "나는 분노에 대해 이미 죽은 몸이다. 장사 지낸 몸이다." 처음에는 별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거듭 이렇게 선언하다 보면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분노를 억지로 참으면 암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참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언젠가 터져 버리면 더 큰 폭발이 됩니다. 분노에 대해 이미 장사 지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요즈음 인터넷으로 인해 노인이나 청년이나 어린이나 포르노에 쉽게 노출됩니다. 그로 인해 인성이 망가지고 가정이 깨지며 성범죄가 점점 잔혹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노출되는 것이 자신의 정신과 영혼에 얼마나 큰 해를 입히는지를 깨달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묻습니다. 어떻게 인터넷 포르노에서 해방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이 경우에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선언하면 됩니다. 포르노를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순간 이렇게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음란을 탐하는 나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장사지낸 바 되었다. 음란의 영아, 아무리 나를 흔들어 보아라. 네가 유혹하려는 옛 사람은 이미 죽었다." 

지나친 소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무엇인가 사고 싶은 마음의 움직임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에게 선언해 보십시오. "나는 사치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이다. 돈 쓰고 싶어 안달하던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장사지냈다." 잘 구슬러 보시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혼구멍을 내 보십시오. 쑥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자족하고 나누며 베풀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끊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 많지요? 나이 들수록, 옆에서 참견하면 할 수록 더 그렇지요? 그게, 꼭 죄라 할 수는 없는데,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훼손하는 것이니, 옛 사람의 장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럴 때, 스스로에게 선언하십시오. "나는 식탐에 이미 죽은 사람이다. 식탐을 하던 옛 사람은 무덤 속에 있다."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는 욕심이 고개를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탐욕에 대해 이미 장사지낸 몸이다"라고 선언해 보십시오. 실상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점점 죄의 맛이 시들해지고 유혹이 약해지며 진실로 죄에 대해 죽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6.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으로서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낮은 지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은 우리가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것이 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죽어 장사되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새 사람으로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후,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죽어놓고 사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러분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장사 되었습니까? 옛 사람이 장사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매일 선언하고 확인하고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까? 매일, 매 순간 그렇게 고백하고 선언하는 것은 마치 시신을 안장한 무덤 입구를 돌로 막고 빈 틈 없이 밀봉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무덤에 매장된 나의 옛 자아는 하얀 먼지가 될 때까지 분해되어 갈 것이며, 옛 사람에게 매어 있을 때 물들었던 온갖 죄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도 옛 사람 그대로 사는 분들이 계십니까? 잠잠히 그리고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그 자아를 끝까지 따라 살 것입니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자신에게 뭔가 철저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내 자아보다 더 큰 무엇 혹은 누군가에 붙잡혀 사는 것이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느낌은 단순한 느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부디, 더 미루지 마시고, 아직 시간 있을 때, 결단하시고 주님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 가장 귀한 결단이 될 것입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참되게 죽어야만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옛 자아를 매장하고 밀봉한 다음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매일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놓고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고, 죽어 영생에 이릅니다. 그 길로 나가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 장사되기까지
낮아지신 주님,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를 붙드시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죽게 하시며
장사되게 하소서.
이미 죄에 대해 죽은 몸임을 
늘 기억하게 하시고
선언하게 하시며
그렇게 살게 하소서.
아멘. 

(김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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