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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 위에서 전파하라 (마 1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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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위에서 전파하라 (마 10:26-31)

우리말에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실현 가능하지 않을 일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현실주의적 사고를 심어주는 속담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는 진취적 정신을 심어주는 말로 이스라엘 민족의 의식 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번 취임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아브라함 링컨의 성경책과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사용하던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선서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데 가슴이 뭉클하면서 위에서 말한 두 나의 속담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오바마 전까지만 해도, 미 건국 이래 흑인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못 오를 나무 쳐다보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바마는 그 ‘오르지 못할 나무’를 두 번이나 오른 것입니다. 오바마가 우리처럼 현실안주적 사고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는 ‘나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다’는 진취적 사고의 소유자였기에 이런 전대미문의 일을 일구어 낸 것입니다. 

나는 새해 들어 하나님께서 자꾸 이런 적극적인 사고를 요구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오르지 못할 나무’에 오르라고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대통령이 되라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목사인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이제 내 소원인데 이젠 들어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 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동안 쳐다 만 보고 있었던 ‘전도’라는 이 ‘나무’에 함께 오를 것을 청합니다. 이제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일을 ‘오르지 못할 나무’로 제쳐 놓고 지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오르지 못할 나무’로 여겨지던 그 ‘나무’(대통령 자리)에 올라서 미국 사회 다른 유색 인종들에게도 그 나무에 오를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게 한 것처럼,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오르지 못할 나무’로 여기고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현장 전도’라는 ‘나무’에 먼저 올라서, 그 일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애써 자위하며 지내는 이 시대 많은 크리스천들을 ‘현장 전도’로 이끄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바로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마10:16-17). 

이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어려움을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렇게 제자들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은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을 따라 사는 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진리 안에 살라!

여러분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뭐라 답하시겠습니까? 한 여론 조사기관에서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을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예상 밖이었습니다. 죽음이나 질병은 4, 5위에 머무른 반면, 금전 문제가 3위, 고소 공포가 2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점에서 전도하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세상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 서서 말을 걸어야 하니 ‘죽을 맛’이 될 수 있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이 말씀은 이때까지 세상이 모르던 복음이 전도자를 통해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밝히 알려지고 전파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참예한 자들은 복음을 대적하는 존재를 두려워하여 전도하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더 나아가 제자들이 복음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선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명령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10:27),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이를 위해 전도자는 진리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합니다. 말씀 위에 확고하게 선 전도자는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사람의 말에 쏠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다윗의 고백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편18:6-7). 우리가 진리 편에 하나님 편에 서게 되면 진리 아닌 어떤 세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두려운 마음을 이기고 평안한 마음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 믿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든 두려움에 쌓여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겁쟁이는 죽기 전에 여러 번 죽는다. 그러나 용감한 사람은 한번만 죽음을 맛본다’라고 셰익스피어는 말했지만, 사실 겁쟁이는 여러 번이 아니라 매일 죽는 것 같습니다. 밤낮 죽는다는 소리를 하니까 매일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신이여!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위험에 처해서도 겁을 내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근심스러운 공포 속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유와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내가 기쁠 때에나 성공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게 마옵시고, ‘매일매일, 내가 슬프고 괴롭고 남이 나를 핍박하고, 내가 배고픈 때에도 하나님께서 내 손목을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2. 하나님을 경외하라!

영적으로 훈련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난제에 부딪히면 무조건 피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에 뒤따르는 고통을 두려워한 나머지 문제 자체를 아예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태도가 극단적으로 가면 신경질환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칼 융의 말입니다. "신경질환은 그것이 정신분열이든 정신쇠약이든 어떤 것이든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이다." 

우리 인생길은 넓고 곧은길만 있지 않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중요한 진리 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당신이 사용하시는 종들에게 협착한 길을 걷게 하심으로 고통을 경험케 하시고 그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게 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몸을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사람이 사람의 육체는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에는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몸을 옥에 가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을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때 세상에 두려워할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 좋은 신자들이라고 인생의 난제를 만날 때, 고통을 전혀 안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자는 난제를 만날 때 피하지 않고 맞설 줄 압니다. 그러나 무모하게 그 난제를 홀로 지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난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제 편에서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 일 알려 주세요.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해 주세요.” 신자는 자신의 문제에 늘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하라!

시편을 묵상하다 보면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시인은 하나님을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출애굽을 이루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워주신 ‘만군의 주’로,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공급해 주시고 삶을 지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즉 시인은 하나님을 인류 역사의 대 사건만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의 매일의 삶 속에서 임하시어 자상하게 돌보시는 분으로 묘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는 것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0,31)고 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에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이런 돌보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지애 선수가 신앙을 골프에 비유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골프는 샷 순간에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옵니다. 매 순간마다 시험에 드는 운동이 골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샷에 앞서 위기를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올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두려워질 때가 위기가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성령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 순간 그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불신 영혼을 바라볼 수 있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온전히 믿고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코이’라는 비단 잉어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이 잉어는 사는 공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cm 밖에 자라지 않지만,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기르면 15-25cm까지 자라고, 강에 방류하면 1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든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교회 안에서 예배하는 것만으로 여긴다면 우리의 신앙은 작은 어항에서 자란 코이처럼 어항 크기 이상 자랄 수 없겠지만,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 전도자가 될 때 우리의 신앙은 강에 방류된 코이처럼 크게 자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미국 자동차산업을 크게 발전시킨 찰스 키터링은 80이 넘어서도 새로운 기계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그의 건강을 걱정한 그의 아들이 그의 83회 생일 때 "아버지, 이제 연구를 중단하고 좀 쉬시지요" 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때 그가 하는 말이 이런 말이었습니다.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흉하게 늙는다. 그래서 나는 항상 미래를 바라며 일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도 그 일을 하시기에 당신도 그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 일을 하는 것은 제자인 우리에게 정해진 이치입니다. 이 일에는 정년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이 일을 놓으면 찰스 키터링의 말대로 흉하게 늙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일어나 빛을 발합시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이철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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