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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눅 9: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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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눅 9:28-36)

‘데이비드 그레고리’라는 사람은 달라스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데이비드 그레고리는 유명한책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라는 책은 저자가 생각하는 예수라는 사람을 등장시켜놓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의 핵심과 진수를 들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닉 코민스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라는 분으로부터 고급 식당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닉 코민스키’는 예수와 함께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가장 중요한 신앙적인 진리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선물, 그 귀한 선물을 믿음으로 받으라고 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희생하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는 닉의 명함 뒤편의 백지에다 닉이 추천한 가장 도덕적인 사람인 마더 테레사의 이름을 위쪽에 쓰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아래쪽에 가장 악질적인 인물 히틀러의 이름을 쓰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닉의 이름은 중간에서 약간 위쪽으로 테레사에게 가까운 곳에 기록하고는 선을 그었습니다. 

예수는 말했습니다. “사실 이 조그만 명함 안에 모든 눈금을 넣을 순 없지만, 어쨌든 히틀러는 여기 있습니다. 닉선생은 여기 쯤 있다고 하였고, 마더 테레사는 여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짜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감 잡으려면....” 

예수라는 남자는 명함을 테이블 위에 세웠습니다. 
“시카고에 있는 시어스타워(442m) 맨 아래 주춧돌 위에 이 카드를 놓는다고 가정해보세요. 하나님의 도덕적인 기준은 시어스타워 꼭대기, 100층 높이 위에 있습니다.” 

닉이 질문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에 비하면 마더 테레사와 히틀러는 결국 같은 수준이라는 건가요?” 

“아뇨, 히틀러는 지극히 악랄했고, 마더 테레사는 커다란 자비를 베풀었으니 같지 않죠. 그렇지만 마더 테레사가 행한 나름의 덕행 역시 하나님과의 격차를 메우기엔 히틀러만큼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죄인이고 각자 나름의 공과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말에 닉은 잠시 생각한 후에 “그렇다면 누구도 그 기준에는 못 미치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자신들의 쌓은 공적으로는 안 되죠.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한 치도 모자람이 없는 완벽 그 자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정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공정하신데, 그 기준에 미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정의 때문에 인간의 죄는 용서하실 수 없으시지만, 누군가가 죄과를 지불하면 공의가 충족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그의 나라에 들어가서 처음 창조하실 때에 계획하셨던 그 풍성한 은총에 거하게 되려면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죠. 사람들이 스스로 죄과를 치르게 할 수도 있었고...” 
“하나님이 직접 그 벌을 받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보다 위대하니까요.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직접 죽음이라는 벌을 받으면 완전한 정의를 만족 시키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그것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가 충족되었으며 우리에게는 무죄평결이 내려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선물,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그 사랑을 그냥 받기만 하면 됩니다." 

닉이 말했습니다. 
“정말 알 수가 없네요. 성경에 보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이지 하나님이 아니잖소” 

예수는 말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책을 다 요약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속전이 되셨는데, 하나님의 무한하신 당신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속량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복음입니까!!! 우리도 시간을 내어 예수님과 함께 앉아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깨달아야겠습니다. 

오늘의 교회력은 주현절기가 끝나고, 사순절기로 접어들면서 주현절기의 마지막 주일은 산상변모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다음주일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눅9:18-20절을 읽어드립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이 공관복음을 함께 놓고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면서 사건을 정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는데, 그곳에 가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수련회를 하시고 있었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고 말씀을 나누시고, 하나님의 신령하신 말씀, 하나님의 구속사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가르치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미 심장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졌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4복음서의 고백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8:29)라고 하였으며,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9:20)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한 주간 쯤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 중에서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변화산이라고 하는 산은 어느 산입니까? 빌립보 가이사랴 부근에 있는 헤르몬산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 갈릴리에 있는 다볼산이라고 하여 이 산 정상에는 베드로가 주장한 3개 초막을 상징하는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다볼산은 ‘하르 타볼’인데, 그 뜻은 ‘높은 산’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르엘 평원에 있는 해발 588m의 비교적 높은 산입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이미 5세기 경 교부인 제롬은 “경이로우며, 둥글고 높은 산”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전통적으로 주님이 변화하신 그 산은 다볼산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하였는데, 다볼산의 뜻이 ‘높은 산’이라고 하였기에 변화산은 다볼산이라고 기정사실화하였습니다. 

4세기경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이 다볼산을 찾았고, 6세기경에 베드로가 고백한 초막 셋을 상징하는 세 개의 거대한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이 예배당은 1924년에 개축되어 지금도 성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당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예배당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어떻게’라는 말보다는 ‘왜’라는 이유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산에 올라가셨느냐, 예수님은 이 사건을 가지고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12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그 사건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세 제자를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앞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바라보시면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입으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용모가, 얼굴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천상적인 참 모습이 드러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마가복음은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9:3)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신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한 주간 전에 베드로가 신앙고백하였는데, 물론 성령으로 감동을 받고,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지만, 과연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이시다는 것을 확증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형되심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틀린 고백이 아니라, 분명한 고백이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장차 고난을 받으신다고 하여도 다시금 그 영광을 회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계시는 참 모습을 이 땅에서 간접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것을 잠시만 보여주셨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영광 중에 계시는 주님을 영원히 뵈올 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보니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베드로가 두 분이 모세인지, 엘리야인지 어떻게 알아보았습니까? 

저는 성경을 읽으며 많은 것을 상상해봅니다. 먼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시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제자들이 옆에서 듣고 알았다고 생각해봅니다. 아니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고 듣는 제자들을 위해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면서 “저는 모세입니다, 저는 엘리야입니다.”라고 예수님에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서 옆에서 듣던 베드로는 이 분이 모세이고, 저 분은 엘리야이신 것을 알았다고 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이 없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영적인 세계에 들어간 상태로 보셔도 됩니다. 

세 분이 무슨 말씀을 나누었습니까? 세 분이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보니, 예수님이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별세하실 것을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별세하다”는 말은 원문에는 “엨소도스”라고 하여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 라는 뜻인데,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말할 때에도 70인역 헬라어성경에는 ‘엨소도스’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것인데, 영혼이 육신을 떠나가는 것으로 새로운 출발입니다. 당시 엨소도스라는 말은 죽음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완곡어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엨소도스를 말씀하였습니다. 

엑소도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해방을 받아 가나안으로 출발하는 것 같이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엨소도스를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이 별세하시는 것을 가지고 구약의 대표이신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한 사람이요, 유대교회를 이룬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예언하신 분입니다. 구약의 두 인물을 들어보라고 하면 모세와 엘리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면서 내다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요,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오는 사람들을 이미 성취하신 십자가의 사건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요8:56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전의 사람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사모하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후의 사람들은 이미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오심을 선포하고 기다린 사람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는 오시는 메시아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고대하면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모세나 엘리야 그들의 사역이란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을 준비하신 사역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하시고 예루살렘에는 1년에 몇 번 다녀가셔야 했지만, 이제 마지막의 죽음도 예루살렘이어야 하고, 부활하실 장소도 역시 예루살렘이어야 하고, 승천하신 장소도 예루살렘이고, 다시 오심도 예루살렘이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택하신 장소요, 하나님의 임재하시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장소요,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성전이 되어주셨고, 당신의 육체를 찢으시므로 성소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에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하늘로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큰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번에 드리는 한 영원한 제사가 되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높이 매어 달리므로, 저주와 심판을 받으신 몸이 되어 주님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진리가 되셨습니다. 한 번 저주받은 자리는 다시 저주받지 않습니다. 한번 심판한 죄는 다시는 거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저주와 심판을 받으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하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다” 이 말은 앨런로스가 ‘거룩과 동행’이라는 레위기 연구에서 스튜어드(J.S. Steward)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화목의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섬김은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정죄 받지 아니하고, 살아났고,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시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죄와 형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다시는 죄와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엡3:12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데, 예전 성경에는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있는 다른 두 제자도 잠을 이기지 못하여 깊이 졸았는데, 이제 온전히 깨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서 계신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있었습니다. 두 분,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에 여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이렇게 말하여도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두 인물,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순간이요, 존경하던 선조들인데, 좀 더 오랫동안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황홀경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찬란하게 빛나고 희어지고,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위인들이 찾아오고, 하여튼 그 산 위가 좋았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 초막 셋을 짓자고 말씀을 드릴 때에 구름이 몰려오더니 세 분을 덮었습니다. 그 세 분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주 쉽게 말하지만, 그때 당시로는 두려울 정도가 아니라, 무섭기까지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들려진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은 바로 당신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을 알았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하면 이제,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였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이 우리를 친구가 삼아주신다고 하셨으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제는 주님이 다 알아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십니다.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가 그쳤습니다. 보니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고 했습니다. 36절입니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았다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를 증언하는데 보조수단으로 사용되었고, 그들의 역할이 끝나자 그들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3 제자가 그들이 산에서 겪은 그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말하면 믿을 것입니까? 허기져서 허깨비를 보았다니, 잠자다 무슨 꿈을 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합리적인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천상에서나 일어날 일인데, 지상의 높은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것은 좀 더 큰 세계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 경험을 파괴하는 세계, 우리의 이성을 무너뜨리는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이 사실만 알고, 확실하게 붙잡으면 인생을 성공합니다. 악한 죄악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셔서 우리 안에 성전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장차 영광중에 나타나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 한 분만 모시는 성전을 지으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시면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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