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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지켜야 할 것 (딤전 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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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켜야 할 것 (딤전 1:18-20)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의 실체를 믿습니까? 믿는다면 사후 어떤 곳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천국입니까, 지옥입니까? 천국과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나 불신하는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누구도 객관적으로 그 실체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에 대해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천국과 지옥의 실체에 대해 객관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증명할 수 있다면, 굳이 사람들에게 믿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앞다퉈가며 교회로 몰려올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지는 것은 그 자체가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몸이 죽으면 생각도 죽는 것인가?’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을 뇌의 기능으로만 볼 때, 뇌가 죽으면 생각도 죽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뇌란 생각을 생산해 내는 장소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발전소에서 생각이라는 전원을 받아 사람이 사는 동안 그 몸을 통제하는 통로에 불과하다”는 말을 믿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보면, 둘이 몸이 죽어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할 때,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요청하는 내용을 보면 그의 생각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그는 나사로를 인식했고 지상에서 하듯 거기서도 나사로를 부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몸이 죽는다고 해서 생각까지 죽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사후 세계에서 인간은 극명하게 양분된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영생과 영벌의 삶입니다. 그것은 살아생전 그들이 무엇을 믿었느냐하는 그들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엄중히 권고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1:18). 

당시 교회에 파고 들어온 영지주의와 유대 율법주의와의 싸움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싸움에서 지는 것을 믿음에 파선한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믿음에 파선을 당하지 않고 천국에 이르기 위해 지켜야 할 3가지 교훈을 배우고자 합니다.

1. 복음을 지키라

땅에만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도 길이 있습니다. 땅의 길을 상세히 기록한 것을 지도라 한다면, 바다의 길을 기록한 것은 항해도라 합니다. 항해도에는 어디에 섬이 있고, 어느 지점이 깊고 낮으며, 어디에 암초가 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 위 모든 것이 고요하게 보인다고 함부로 다니다가는 언제 화를 당할지 모릅니다. 큰 배가 물이 낮은 곳을 항해하다가는 배 밑이 바닥에 닿아 오도 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수면 밑의 거대한 암초에 부딪히면 난파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배는 항해도에 따라 항해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을 항해라고 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할 인생 항해도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1:18)고 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이란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있을 때 듣고 훈련 받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또 바울은 영적인 싸움 중에 있던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음대로 살 것을 독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이와 유사한 교훈이 요한계시록에도 있습니다.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 중에서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아 음행에 빠지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2:25). 

위의 이 모든 말씀은 같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들이 소유한 복음이야말로 그들이 남은 인생을 항해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할 항해도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이 복음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싸워야 할 대상은 영지주의와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즉 바울은 ‘믿음’이 아닌 ‘영적인 앎’(그노시스)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며 윤리적 문제까지 일으키고 있던 영지주의와 할례 등 율법의 조항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율법주의에 맞서기 위해 복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그 이단 사설들을 복음에 전적으로 대치하는 것으로 여겨, 성도들의 믿음을 파선케 하는 대표적인 악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고 떠들어대는 거짓 선지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믿고 속아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비 진리가 횡행하는 이 시대는 안개 낀 바다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항해에서 암초에 걸리지 않고 순항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복음’이라는 항해도를 꼭 품고 살아야 합니다.


2. 양심을 지키라

“어떤 사람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해서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19-20절).

바울은 영혼의 난파를 막기 위해 디모데에게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합니다. 왜냐 하면 이 양심이 우리를 격려하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옳은 길을 갈 때에는 칭찬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서 격려해 주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려고 할 때에는 마음을 괴롭게 하고 가책을 주어서 우리를 책망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은 소중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양심은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영적으로 선과 악을 분별케 합니다. 그리하여 선을 가까이 하고 악을 멀리할 수 있는 담대함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 양심이 마비될 때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울은 이 양심을 버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믿음에 파선 당한 자로 규정하고 사단에게 내어주었다고까지 했습니다.

작년 12월 말쯤, 안산 중앙역 앞에서 노숙을 하던 40대 초반의 임씨는 참 고마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30대 후반의 김씨는 임씨를 만나 술과 밥을 사주며 위로 했습니다. 올 1월 3일에는 친구의 집으로 임씨를 데려와 목욕과 이발을 시키고 주민센터를 찾아가 임씨의 주민등록을 회복시켜주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고시원에 숙소로 마련해주고 월세 17만 원을 부담하기까지 했으니,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자신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김씨가 임씨에게는 천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씨는 양을 탈을 쓴 늑대였습니다. 1억여 원의 빚을 지고 있었던 김씨는 보험사기로 보험금을 챙기기 위해 임씨에게 접근했던 것입니다. 임씨의 주민등록을 회복시켜 준 것은 임씨 이름으로 상해보험에 들고 그를 살해한 후 2억 원의 보험금을 타기 위한 음모였던 것입니다.

김씨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이 배에 칼을 맞으면 몇 분 안에 사망하는지’를 조사한 후, 아무 것도 모른 채 자신을 천사로 알고 있는 순진한 임씨를 승용차에 태우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가 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김씨의 ‘양심’은 완전히 화인 맞은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단의 종이 되어 더러운 돈을 얻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빼앗는 천인공로할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는 크지 않습니다. 조심해서 들으려 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무시해 버리면 그 대가가 너무 큽니다. 믿음이 파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인생의 바다를 성공적으로 건널 수가 있습니다.


3. 믿음을 지키라

영국 속담에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고삐 없는 말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입장에서 고삐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물건입니다. 주인이 고삐를 잡아챌 때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큰말이 아이한테도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고삐 덕에 말은 바른 길, 살 길로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고삐를 쥔 주인이 죽을 길로 말을 이끌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고삐의 인도를 받듯 성도는 ‘믿음이라는 고삐’에 이끌려 살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때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지 못하고 그 욕망을 거스려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혹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목사님, 믿음으로 살려하니까 재미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 재미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낙, 곧 쾌락입니다. 이때가 영적인 분깃점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재미없다고 세상으로 돌아서서 세상의 낙을 추구하면 바울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가리켜 한 말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정말 그렇게 재미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쾌락’과 주 안에서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 즐거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5:11).

우리는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는 될 수 없을지 모르나, 주 안에서 있을 때 하나님께 ‘유일한 존재’일 수는 있습니다. 주께 피하는 자들이 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천하에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로 환영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즐거움을 깊이 누리다보면 육적인 쾌락을 멀리 하게 됩니다. 쾌락은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제1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들 곁에 하나님이 늘 함께 하셔서 즐거움의 원인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이란 단지 노력한다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려고 하는 의지는 우리가 가질 수 있지만, 그런다고 믿음을 다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고자 하는 의지는,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자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믿음을 실제로 소유하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 곧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말보다 복음이 ‘믿어진다’는 말이 성서적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복음의 내용은 사람이 이성으로 논리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연법칙에 완전히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기를 낳으며, 어떻게 죽은 지 사흘 된 자가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복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도록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1:17).

인생을 흔히 망망대해의 일엽편주에 비유합니다. 더구나 이 바다를 건너는 일엽편주의 앞길에 항상 순풍만 불지 않습니다. 뜻하지 않는 광풍이 불고 사납고 무서운 파도가 밀려와 이 작은 배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암초에 부딪쳐서 난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권력의 난파, 재물의 난파, 인기의 난파, 건강의 난파 등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잘 막아보려 해도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사람에 의해 일격을 당해 우리 인생들이 신처럼 받들던 것들이 한 순간에 난파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항해에서 이런 것들보다 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파선’입니다. 권력이나 재물의 난파를 당하면 이 세상에서 곤란을 겪는 것으로 끝나지만, 믿음이 난파당하면 영원히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끝까지 항해하여 천국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3가지는 복음, 양심, 믿음입니다. 올 해는 두 차례에 걸쳐 <새 생명 축제>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다음 주에 ‘태 신자’를 잉태하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태 신자라는 말이 다소 생소하게 드릴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잠정적 교인’으로 우리들이 마음에 품게 될 우리의 친구/혈육/이웃 등을 가리는 말입니다. 이들을 ‘태 신자’라는 생소한 용어로 말하는 이유는 아이를 잉태한 여인이 태중에 아이를 소중히 여기고 살피듯이, 우리도 그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피자는 의미에서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태신자로 삼고 기도와 사랑으로 돌볼 때, 그것이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임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더구나 천국과 실체를 믿는다면 사랑하는 이들을 지옥으로 가도록 내버려두고 혼자 천국으로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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