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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자(요 1: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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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자
요 1:43-50

  제가 신학교 4학년 때 겪었던 재미있는 일을 하나 소개해 볼까 합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끔 머리털이 쭈뻣 쭈뻣 서고, 왠지 씁쓸한 웃음도 나곤 합니다. 그러면서 평소에 행동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까지 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저녁 수업을 듣고 있던 어느 날, 저는 쉬는 시간에 평소에 친했던 여자후배에게 커피 마시러 나가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날따라 후배는 커피를 많이 마셨다며 사양했고, 저는 혼자 커피를 마시러 나갔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고 나서, 그 후배가 고민 끝에 제게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빠가 커피를 마시러 가자마자 친구들이 와서 오빠 조심하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소리를 듣고, 조금 황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후배들은 말 한마디도 섞어보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후배들이 저를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저 헛웃음이 나왔지만, 후배에게 대수롭지 않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이유가 뭔데?”
  그러자 제 후배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효연아, 저 선배, 게이인 것 같아. 남자선배들 몸을 막 더듬더라고. 다른 애들도 많이 봤데.” 후배는 오해라고, 제가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으며, 곧 결혼도 할 거 라고 변론했다고 합니다.
  물론 제가 스킨쉽도 좋아하고 짓궂은 장난도 좋아했기 때문에 후배사이에서 그런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모양입니다. “어쩜, 저 오빠, 멀쩡하게 생겨서 왠 게이래?”
  아무튼 만약 여러분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워낙 장난을 좋아해서 그런 오해를 샀지만, 저는 당시 결코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고, 지금은 아내와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혹시 제 아내가 남자라고 생각하시는 분 없으시겠죠?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그냥 재미있는 에피소드로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저는 이 에피소드를 떠올릴 때마다 이기주의적인 생각과 편견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여자를 좋아했던 청년이었어도,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분들에게 만큼은 저는 동성연애자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 중심적 생각은 선한 사람을 악의 화신으로, 순결한 처녀를 방탕한 여자로,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회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고,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적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이 참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기에 모이신 성도님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부와 명예와 학식이 있는 사람이요?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매일 매일 조금씩 내 중심을 하나님께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1억 십일조요? 절대적인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매시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원하시는 것이고, 내가 우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들을 인도해 주시며, 당신의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나다나엘의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45절에 보면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있잖아, 나다나엘! 나 방금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메시아를 봤어. 그 분이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래.”
  자, 누군가 성도님들에게 다가와 “나 예수님 만났어. 너무 좋더라. 너도 이리 와봐. 우리 예수님께로 같이 가자”라고 말한다면, 성도님들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당장 신발을 벗고, 예수님께로 달려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나다나엘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너무 냉랭합니다. 나다나엘은 46절에서, “나사렛? 야, 그 조그만 시골에서 뭐 선한 것이 나겠냐?”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대체 촌구석 나사렛에서 메시아는 고사하고 무슨 대단한 인물이 나올 수 있느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다나엘의 반응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나사렛은 이스라엘 역사상 한 번도 유명인사를 배출해 본적이 없는 촌구석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여보다 훨씬 작은 강원도의 아주 작은 시골어촌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빌립이 자꾸 가서 보자고 재촉하자, 할 수 없이 끌려 예수님께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나다나엘을 보시고 4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 말씀에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아니, 어떻게 나를 아시죠?”라고 반문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이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상황은 정말이지 황당한 상황입니다. 나다나엘은요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님이 바로 앞에 서 계셔서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시는데, 도무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다나엘의 내 중심적 생각과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는 결코 귀한인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의 편견은 그의 눈을 가려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의 귀를 가려서 예수님의 참된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들은 가끔 우리의 자아, 우리의 생각, 우리의 편견을 버리지 않은 채, 목소리가 터지게 성령님을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만으로 과연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백번 양보해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과연 내가 중심인 상태에서 성령님을 올바로 체험할 수 있을까요? 
  실상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다나엘과 우리들과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나다나엘은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주님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선지자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주님의 오실 날을 기다리는 기독교인입니다. 아니! 어찌보면, 나다나엘은 오히려 우리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런 나다나엘조차도 우리의 왕되시며 구원자 되시는 주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자아가 내 마음에 중심이 된다면, 우리도 나다나엘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도 모릅니다. 혹시 지금 곁에서,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인생길을 걷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되시길 소망합니다.
  어찌 되었건 주님께서는 48절에서, 그런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너를 보았노라.”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언제나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또한 무화과나무의 넓은 잎은 한 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사모했던 바리새인, 선지자들은 무화과나무 아래 모여 율법을 논하거나 홀로 깊은 묵상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라고 하신 말씀은 나다나엘의 외적 모습을 보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리며 영생을 얻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을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300일 작정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300일이 지나도 하나님은 성도님들을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성도님들은 실의에 빠지고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작스럽게 하나님이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나는 네가 300일 동안 이른 새벽에 나를 간절히 찾고 있었음을 보았노라!”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성도님들은 이렇게 고백하시지 않겠습니까? “정말, 당신은 나의 주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심중마저 훤히 꿰뚫어보는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자기중심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편견을 내 던지고, 주님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결국 예수님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4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나다나엘은 삶의 축을 자신으로부터 주님께로 옮겼고, 그 순간부터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내 중심에서 주님중심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기도생활, 말씀생활, 섬김 실천 등, 그 방법은 참으로 많겠지만, 저는 오늘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감사하는 삶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쉬워보이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며, 우리 가정 위에 주님의 은혜가 강같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감사는 곧 마음입니다. 종은 칠 때 종이고, 장작은 타오를 때 불인 것처럼, 믿음은 감사 할 때 믿음입니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한다면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크기는 감사의 크기와 비례하고요, 행복은 내가 가진 것들이 크고 많음이 아니라 감사의 크기에 비례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18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많은 고통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를 아프게 하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여러 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은혜가 족하도다’라고 하시며 그의 기도에 'YES' 대신 ‘NO'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약한데서 강하여지느니라' 사도바울은 그 말씀을 깨닫고 그때부터 '가시'를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미꽃을 감사하기는 쉽지만 가시를 감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감사는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사람, 철든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귀하신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병들어 계신가요? 하나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심장이 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 살 때입니다. 지금 건강하십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건강을 우상 삼음 없이 우리 건강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가난하여 비천해 처해 계신가요?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물질의 노예됨이 없이 오직 진리를 위해 우리 자신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세상의 물질이 풍요로워 부유하십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실패하셨나요? 이때도 하나님께 감사하시길 소망합니다. 이제야말로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겸손히 기다릴 때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성공하셨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교만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너무 높아 커트라인이 없기에,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욕심을 채울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간절히 원한 한 가지를 갖게 되면, 또 다른 것을 바라는 사람의 욕심을 꼬집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5000원짜리 한 끼 식사에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5000만원짜리 자동차를 갖을지라도 결코 감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간혹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시련마저 기쁨으로 변화시켜주시는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 예수쟁이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만약 우리의 영혼이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법을 알고 있다면, 환경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축축한 어둠의 끝에 내려가 있을지라도, 우리의 빛나는 영혼이 밝게 타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영으로 밝게 타오르고 있다면, 깊은 어둠도 순식간에 몰아낼 것입니다. 하나의 촛불이 켜지면, 아무리 오래된 어둠이라 할지라도, 단 번에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사할 줄 모르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비단금침에 누워, 아방궁 같은 집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황폐한 사막처럼 변하게 될 것입니다. 
  실상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감사하기보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나 자신의 생각과 편견, 그리고 원하는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하나님 중심으로 먼저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존슨 오트만목사님의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라는 찬송시를 좋아합니다. 찬송가 429장에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당신이 폭풍우 몰아치는 거센 파도 위에 있을 때,
당신이 낙심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
당신이 받은 복을 세어보세요.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서.
그러면 당신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큰 은혜 때문에 놀랄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무의미하다고 여겨졌던 우리의 삶조차,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어진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복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신문의 한 칼럼에서 우리가 받은 복의 통계를 다음과 같이 내었습니다. “당신이 오늘 아침 건강하게 일어났다면 이번 주에 죽을 1백만 명보다 훨씬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당신에게 배고픔이 없다면 이 세상 5억 명보다 더욱 큰 복을 받은 것이고, 비를 피해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이 세상 75%보다 더욱 큰 복을 받은 셈입니다. 은행이나 지갑에 약간의 돈이 남아 있고 세상에서 8%안에 드는 부자일테고 말이죠. 그대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세상의 20억 문맹자보다 큰 복을 받은 것이고, 당신이 웃는 얼굴로 이 모든 복을 깨닫는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욱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우리는 복을 받은 사람인가요? 아닌가요?  
  우리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다나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그의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인격적인 예수님 앞에서 나 중심적 삶을 고수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나 중심의 삶을 예수님 중심으로 옮겨놓고야 말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5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이 삶의 중심을 예수님께로 옮겼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큰 기적을 약속하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디 모세가 홍해가 갈라질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반석에서 생수가 강처럼 터져나오며, 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비 오듯 쏟아지는 것을 꿈에 선들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철옹성 같은 여리고 성이 저절로 무너져 내리리라 예견인들 했겠습니까?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 중심으로 전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큰 일’을 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기준과 함께, 하루 하루 살아간다면, 4000년 전에 일어났던 기적들은 오늘 우리에게 향하여 열려 질 것입니다. 
  그 기적은 영광의 형태로 반드시 우리들에게 찾아올 것 입니다. 그러나 혹 고난의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고난을 넘기면 그때에는 더 큰 기적들을 우리 삶 가운데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을 믿느냐?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되리라!
  여기에 계신 귀하신 시온교회의 성도 여러분, 우리 댁에 돌아가시기 전, 하나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 나 중심의 생각을 던져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며,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중심의 생각을 하나님 중심으로 옮기며, 주님의 말씀을 조금씩 조금씩 세상 가운데에 심어 가시길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보았던 기적들보다 더 큰 기적을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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