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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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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12-28)


죽음의 문제, 그리고 죽은 후의 세계에 관한 문제는 인류가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제기해온 근본문제의 하나입니다. 바울이 활동할 시대의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은 사람의 몸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후의 삶이라는 것은 오직 영혼에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영혼만이 진정한 인격적 존재였습니다. 그 영혼이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죽으면 풀려나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육체의 불멸은 없고 영혼만 영원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육신과 영혼이 부활 때 다시 결합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문화의 중심에 있던 고린도였기에 그곳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몸의 부활을 믿는 데 어려운 시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며 부활에 관한 혼란을 명쾌하게 정리하려 했고 그래서 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것이 진실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의 부활은 그의 삶과 말씀의 진실성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의 부활은 오직 그만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1:25) 말할 수 있는 권위를 지녔음을 확증시켜주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부활과 분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하신 그의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실 그의 권위를 보증해주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기에 그를 믿는 우리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확신을 주기 위하여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론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이미 널리 전해졌고 사도 바울 또한 오늘 본문에 앞서서 성경의 증거와 여러 사도들의 증언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그 사건의 확실성을 역설한 대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이들이 아직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사람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힘주어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신자들의 부활을 역설하기 위하여 전개한 논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논리가 아니라 우리가 부활할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도 부활하셨다는 논리입니다. 본문 13-19절을 다시 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몇 가지 힘차고 놀라운 사고를 발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우리의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선행한다는 사고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난 후에 그처럼 우리를 살리실 계획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를 살리실 계획이 있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도 살리시고 그의 부활로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확증시키시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는 말을 13, 15, 16절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함으로써 그러한 사고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보다 근원적으로 말해서 사람에게 도대체 부활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이나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나 다 헛된 것이라는 사고입니다. 복음이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입니까? 죄 때문에 다 죽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시고 다시 살려 일으키심으로써 그를 믿는 사람들이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이 복음이며 그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게 되고 다시는 죽음을 맞지 않는 것이 없다면 복음이나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셋째는 부활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의 소망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사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음으로써 우리가 확실하게 누릴 수 있는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원히 복된 삶입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우리가 이미 이 세상에서도 의미 있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험하고 악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 바라는 대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릴 수 없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과 믿음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원히 복된 삶을 바랄 수 없고 오직 이 세상에서의 삶만 바라야 한다면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의 시대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종종 박해와 가정에서의 추방과, 많은 경우에, 가난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서 취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유익이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신분상승이나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바랄 것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부활과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있기에 고난과 가난 속에서도 기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면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에 대한 소망이 무너지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세상에서는 바랄 것이 하나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부활의 진리이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부활과 그 믿음이 없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살아있어도 평안과 기쁨이 없는 삶이 됩니다. 삶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불쌍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본문 20-2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0절에서 “잠자는 자들”이라 한 것은 죽은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첫 열매”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수한 농산물 중 먼저 하나님께 바치는 맏물을 가리킵니다.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다른 모든 수확도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영원히 살아계심으로써 그뿐 아니라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사람들도 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 속하여 부활하고 영생하게 되리라는 보증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일 뿐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파괴되고 소멸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어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생명 없는 삶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으며 그래서 진정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그를 믿는 이들을 죄와 죽음의 노예상태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그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 안에서 새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소망하고 확신하며 의미 있고 기쁨 있는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아직 육신의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억누르고 있던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는 하셨으나 죄와 죽음의 권세 그 자체를 완전히 정복하시고 멸망시키시는 일은 이 세상 마지막 때로 미루셨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죽었던 사람이 몸으로 다시 살아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육신의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주님께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시고 파괴하시며 소멸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우리에게는 부활의 날이 될 것이고 죄와 죽음에게는 사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마지막 때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이 세상과 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최종승리와 완전한 정복, 그리고 죽음과 그 권세를 완전히 소멸시키시는 궁극적 승리와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본문 23-28절에서 대략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우리는 특히 26절의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한 말씀에서 큰 위로와 용기와 힘과 소망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원수 같은 사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이 사망의 멸망은 본문 22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한 약속의 완성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오셔서 사망을 아주 멸하시고 우리에게 다시는 사망의 위협이 없는 영원한 삶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고 확신하며 그 삶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머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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