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떤 여인의 귀향 (룻 1:19-22)

첨부 1


어떤 여인의 귀향 (룻 1:19-22)


 어느 인터넷에 보니까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12살인데요.  제가 설날 때 친할머니네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제가 친할머니네 댁 친척 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려요.  그래서 다른 언니, 오빠들과 하고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요.  그래서 만원밖에 안주거든요.  제작년에는 다 합쳐서 5만원 밖에 못 받았어요.  그런데 올해는 더 조금 받을 것 같아서요.  제가 새 학기 준비하느라 살게 많은데, 돈이 부족해서 이렇게 질문해요.  설날 세뱃돈 많이 받는 법 좀 알려주세요."

우리 어른들은 설날이 되면 세뱃돈 때문에 적잖이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보니까 설날에 세뱃돈을 안 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설날에 세뱃돈을 안 주는 방법!  우리 어른들은 한 번 귀담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덕담을 최대한 길게 한다.  이것은 참을성이 없는 아이들을 공략하는 최고 최대의 방법이다.  덕담을 최대한 길게 하면, 아이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잠을 자게 되거나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게 된다.
둘째로, 다른 사람이 절을 받을 때 덩달아 절을 받는다.  그러면 내가 주지 않아도 된다.
셋째로, 조금은 치사한 방법이지만 아이들이 절을 할 때 "조카님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식으로 '당당히' 같이 절을 한다.  아이들은 세뱃돈을 받아야 할지, 줘야 할지 당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일단 생색을 내며 세뱃돈을 후하게 준다.  그리고서 화투나 카드놀이를 가르쳐주는 척하면서 세뱃돈을 다시 '강탈'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떻게든 세뱃돈으로 인한 출혈을 적게 하려고 하겠지만, 반대로 아이들은 어떻게든 세뱃돈을 많이 받아서 한몫 단단히 잡아서 재정을 보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설날에 세뱃돈을 많이 받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설날에 한 살림 밑천을 벌어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복음이 될 것입니다.
설날에 세뱃돈을 많이 받는 방법, 첫째로 절을 하고 세뱃돈을 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로, "작은아버지는 오만원을 주셨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경쟁심을 유도하게 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적게 준다는 것은 쪽팔리고 체면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수표밖에 없다"면서 세뱃돈 주기를 주저하는 어른들을 위해 미리 거스름돈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협박성 멘트를 사용해야 한다.  가령, "주시는 금액만큼 오래 사세요."

오늘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날입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이미 설을 지내기 위해서 고향에 간 분들도 계시고, 오전예배를 드린 후에 고향으로 가실 분들도 계십니다.  아무쪼록 설 연휴 기간 동안에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동행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설 연휴 기간 동안에 여러분의 감정과 이성과 그리고 여러분이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과 환경까지도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민족은 고향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민족입니다.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되면 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는 회귀 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가고, 그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곳을 우리는 고향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고향은 내가 태어난 곳이요, 자라난 곳입니다.  그곳에 가면 내가 자라난 집과 다니던 학교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친척과 친구들과 형제 자매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고향은 자기를 알아주고 반겨주는 곳입니다.  이 세상이 다 나를 모른다고 해도 우리 부모님들만은 나를 알아보십니다.  나를 반겨줄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고향은 언제나 즐거운 곳이요, 찾아가고 싶은 곳입니다.  고향은 따뜻한 어머니의 품과 같고, 어머니의 가슴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식처인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어떤 한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라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야곱처럼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지금 상실과 아픔만 남은 채 고통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의 룻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룻기 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일반적으로 흉년이란 모든 것이 부족하고 메마르고 삭막한 때를 지나게 되는 어느 시간을 말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는 농경 사회가 겪는 흉년과는 또 다른 새로운 흉년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는 물질적인 흉년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영혼의 흉년도 있습니다.  어느 사회학자가 말하기를 오늘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가정이 무너지는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계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어쩌면 우리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무너진 고독이라는 흉년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말씀이 모자라고, 기도가 메마르고, 찬송의 샘이 메말라버렸습니다.  주님의 일에 앞장서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식어져 버렸습니다.  교회 일에 있어서 중심에 서지를 못하고 주변을 맴돌면서 불평하는 자로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심각한 영혼의 흉년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흉년을 맞이했던 어느 한 가정의 식구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여기에서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신다."  그리고 이 가정에서 아내인 '나오미'라는 이름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 가정의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 가정은 항상 기쁨이 충만하다.  이것은 분명히 이 가정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이 넘쳐나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한 순간이라도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런가 하면 이들은 '베들레헴'에 살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은 참으로 좋은 고향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본래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 지역이 양식이 풍부하고 기름진 곳이어서 사람들이 이름을 그렇게 불렀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믿음 안에서 항상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던 엘리멜렉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삶을 살았던 가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가정에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흉년이 덮쳤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느 날 삶 속에 다가온 흉년이라고 하는 시련 앞에서 한 가정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본문에서는 그들이 사는 땅에 흉년이 드니까 그곳을 버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압 시골에 가서 몸 붙여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그렇다면 모압이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창세기 19장 이하에 보면 모압이라는 민족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실 때 롯과 그의 가정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산으로 도망을 간 롯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인 후 동침하는 상상도 못할 죄를 짓게 됩니다.  그 결과로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딸에게서 낳은 자가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됩니다.  그리고 둘째 딸에게서 낳은 자는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잉태된 이들 모압과 암몬 족속을 영원히 저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엘리멜렉과 그 가족들이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모압으로 갔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누구 못지 않게 모압이 저주받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을 비롯한 나오미의 가족들이 그곳으로 이사를 간 것은 지금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 흉년을 피하여 보자는 하나의 이유였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흉년을 피하고 보자!  그래서 몸 붙여 살아보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이 문제는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성숙해 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고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더 크게 자라게 됩니다.  만약에 이 땅에 고난이 없다면 사람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에 죄성이 강하기 때문에 고난과 핍박이 적으면 적을수록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어집니다.  여기가 좋아오니 이곳에 초막을 짓고 삽시다 라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힘든 고난과 핍박을 받게 되면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더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솔직히 되는대로 살면 핍박이 없습니다.  그냥 막가파 인생으로 살려고 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 아파할 일도 없습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하니까 핍박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믿음으로 보다 진실 되게 살려고 몸부림치니까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다 핍박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임하게 될 때에 그 고난과 핍박을 바라보면서 절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잠시 편하게 살고자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떠나가 버리는 데마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도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믿음으로 부둥켜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관자로 구경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이것을 축복의 기회로 삼고 더 헌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 본문의 엘리멜렉의 가족처럼 그 자리를 떠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이 취한 행동은 분명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믿음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취할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취한 행동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비신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가 머물러 있어야 할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그 자리에 함께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그곳은 바로 모압 땅입니다.  저주받은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머물러 앉아 있어야 할 자리는 세상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과 믿음의 사람인 나와는 근본적으로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고향만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떠났습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었던 그들이 저주받은 이방 민족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우상이 만연한 불신앙의 세계 속에서 믿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시련을 회피하려고 민족을 등지고 하나님을 떠났던 그들의 삶의 결과는 고통과 뼈아픈 상처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의 가정을 향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그대로 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불신앙의 세계로 떠나갔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향에 관한 소식입니다.  실망과 고통 속에서 소망 없는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 나오미에게 하나님께서는 복된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셔서 고향 베들레헴에 흉년이 끝나고 풍성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이제 나오미는 낭패와 실망을 당한 뒤에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는 결심을 합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날 때에 용기가 필요했다고 한다면 돌아오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때때로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것도 때마다 시간마다 결단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내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유혹들을 단호하게 물리치고자 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상실과 아픔을 안고 10년의 세월을 살아왔던 나오미가 자신을 끝까지 따르는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는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제목은 "어떤 여인의 귀향"입니다.

지금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흉년이 끝나면, 시련이 끝나면 곧 다시 돌아오리라는 계획으로 잠시 고향을 떠났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강산이 변해도 변한다는 1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10년간의 세월 속에서 비극적인 가족들의 죽음을 치루어야만 했던 나오미의 얼굴에는 고난과 상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나오미의 가정이 고향을 떠났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고향에 흉년이 왔기 때문에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갔다고 하지만, 그러나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나오미의 가정은 그렇게 흉년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가난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1절에서 나오미는 "내가 풍족하게 나갔다"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말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떠날 때는 아쉬운 것 하나 없었다."  그러니까 고향에 흉년이 들고 시련이 왔지만 그들의 가정이 고향을 떠나야 할만큼 어렵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문제 앞에서 미리 겁을 먹고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 앞에서 허우적거리지 마십시오.  모든 문제는 우리들에게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고 시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장에는 끊임없이 쓴 물이 공급된다고 합니다.  만약에 장에 쓴 물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장이 멈추고 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쓴 물이 충분히 공급되어야 장도 원활하게 활동을 해서 음식을 소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에서 문제와 시련이 장에서의 쓴 물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솔직히 그 문제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생활방식과 인격이 크게 성장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너무 문제를 두려워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문제를 통해서 더욱 하나님께 붙들리는 법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붙들려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나오미의 가정은 한때 잘못된 결정을 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매 맞은 가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시련을 회피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시련과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나오미의 가정이 여기에서 끝났다고 한다면 룻기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시련을 회피하려고 모압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었다.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이라고 한다면 성경은 이들에 대해서 기록할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순간적으로 그렇게 잘못을 했지만 잘못된 길을 접고 돌아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바른 길로 돌아섰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고난 당할 때에 그 고난을 처리하는 태도가 그리스도인 다와야 합니다.  문제와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믿음의 사람 다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119편 7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 이후의 시간은 성숙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유익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축복을 여는 문이 될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잠시 당하는 흉년을 회피하려고 고향을 버리고 모압 지방으로 갔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의 가정이 당하는 이 시련과 고통이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채찍이라는 사실을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불신앙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나오미의 가정을 깨닫게 하시고자,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자, 그들을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나오미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아픔과 상처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돌아옴은 그가 모압으로 내려갈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으로 내려갈 때에는 모든 가족과 함께 내려갔지만 그 길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넉넉함을 가지고 내려갔지만 그 길은 잃어버림의 길이었습니다.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 길은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그러나 이 길은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오를 미래를 향한 약속 있는 축복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모두가 반갑게 맞이하는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 베들레헴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고 했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베들레헴에는 아직도 나오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금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했을 것입니다.  나오미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오미는 그야말로 불쌍하기 그지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데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오미가 돌아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잘 돌아왔다.  정말로 잘 돌아왔다."

본문 19절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고 있는 나오미와 그들을 맞이하는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시련을 회피하려고 하나님과 고향을 떠났던 나오미가 돌아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달려나가서 나오미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상실과 아픔의 세월 속에서 너무나도 변해 버린 나오미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놀라서 외칩니다.
"이이가 나오미냐?"

"이이가 나오미냐?"라고 묻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 나오미는 10년 전 시련을 회피하고자 고향을 떠나갔던 그때가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모압의 며느리에 의지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지금 나오미는 지나온 10년의 세월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한마디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여기에서 '나오미'라는 이름은 '즐거움' 혹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라'라는 이름은 '쓰라림' 혹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나오미는 지나온 10년의 인생 여정에서 쓰라린 고통을 체험했습니다.  나오미가 살아왔던 모압에서의 생활은 말 그대로 고통과 쓰라림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기가 걸어왔던 험난했던 날들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차라리 나를 마라라고 불러 주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내 인생은 내 이름처럼 그렇게 기쁨과 즐거움의 삶을 살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지난 10년 동안 나는 고통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 이름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것은 지금 그녀가 당하고 있는 어두움과 고통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믿음 없는 삶을 살았던 삶에 대한 회개의 고백입니다.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달라.  그러나 여러분, 베들레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온 그가 정말로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는 지금 남편과 아들을 잃어버렸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지만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온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진정한 나오미로 회복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잃어버렸던 기쁨이 다시 회복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10년의 세월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고통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본문 21절에서 나오미는 지나온 고통의 날들이 자신의 죄 때문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지금 나오미는 고통과 상처뿐인 지나온 세월들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신앙적인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때 신앙이 좋았던 사람도 신앙 없는 사람처럼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회피하려고 저주받은 모압으로 내려갔던 나오미처럼 믿음 없는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만 하면 그 고통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를 세상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나오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돌아왔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 유다 베들레헴 본래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본래 축복하셔서 심었던 그 자리, 그리고 전에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겼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신앙을 버리고 죄악된 곳으로 떠나갔던 나오미가 과거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던 그 신앙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찬양이 있고 생명의 떡이 있는 곳, 하나님을 섬기던 그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하셨습니다.  그것이 22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2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흉년의 때에 고향을 떠났던 나오미가 추수 때에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축복은 누른 황금빛으로 뒤덮인 들녘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축복의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통을 신앙인의 눈으로 바라보았더니,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이 고통의 원인을 바로 깨닫고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왔더니 하나님은 그에게 추수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흉년의 때에 떠났습니다.  그러나 돌아왔더니 풍년이었습니다.  떠나갔더니 절마의 날이었지만, 돌아왔더니 새로운 날이었습니다.  찬양 소리가 넘칩니다.  이것은 돌아오는 사람에게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의 귀향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저 영원한 본향을 향하는데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 아버지가 계시는 저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그 길에는 언제나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바른 판단과 바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자리에서 신앙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악의 길에서 믿음의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 앞으로 돌아오는 순간 추수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입술에는 찬양이 넘쳐날 것입니다.  다시금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