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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롬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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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종 (롬 1:1-2)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로마서는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서신서로 인정을 받아왔습니다. 서신서 가운데 가장 앞에 놓인 것도 우연이 아니고 이는 로마서가 가지는 중요성을 고려해서 먼저 배치한 것으로 봅니다. 많은 분들이 로마서에 대한 찬사를 했지만, 특히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로마서는 신약 가운데서 최고의 책”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로마서를 통해서 인생이 뒤바뀐 사람들, 영적 거장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신학자나 목회자는 물론이고 많은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며, 기독교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보배 중의 보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 관장을 지냈던 분은 로마서 8장과 대영박물관의 모든 것을 바꾸어도 모자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로마서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목적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복음을 아는 것 같은데 사실은 잘 모릅니다.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복음은 기독교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이 계속해서 던지는 진리의 핵심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이 출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기초가 바로 서지 않으면 다른 것을 그 위에 쌓아 올릴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로마서만큼 복음과 교리를 체계적으로 다룬 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를 보면서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복음의 기초 위에 신앙을 세우는 견고한 신앙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로마서는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세우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로마에 있던 교인들은 이미 복음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교리가 체계화되지 않아서 이단이나 잘못된 것에 휩쓸릴 수 있는 연약한 상태였고,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통해 신앙을 처음 시작하는 분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으로, 이미 믿어온 신자들에게는 복음의 견고함을 다시 다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이단들이 들끓고 신앙이 흔들리기 쉬운 시대에 결코 흔들릴 수 없는 복음의 진수가 우리의 영혼에 채워진다면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셋째, 로마서는 영적 회복과 부흥을 가져다주는 능력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음의 감격이 식었거나 희미해진 신자들이 있다면, 다시 회복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살펴보는 가운데 개인의 삶에 놀라운 혁명적 사건이 일어나고 우리 공동체와 민족 교회 안에 큰 축복이 임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로마서는 기원 후 58년경에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서는 유일하게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대부분 바울이 보낸 서신은 바울이 세운 교회였고, 그 교회 안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교인들과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누가 세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을 더욱더 견고하게 세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바울은 로마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여러 번 피력했습니다. 그가 로마에 가고자 한 본래 목적은 스페인, 그 당시로는 땅끝이라고 생각했던 서바나로 가기 위한 교두보로, 로마로부터 시작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당시 로마는 세계 최대 강국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복음화에 대한 열망이 그의 가슴에 불타올랐지만, 여러 번 가고자 하는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문화에 의하면 편지의 서두에 발신인과 수신인이 함께 언급됩니다. 로마서에서도 다른 서신서보다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가 좀 더 길게 나옵니다. 아마도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설명이 좀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1절 한 구절 안에 이미 상당한 메시지를 담아 전달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종 바울’, ‘사도’, ‘부르심’, ‘하나님의 복음’, ‘택정’ 하나하나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은 로마서의 핵심입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굿 뉴스입니다. 복음은 인류의 최고 최대의 희소식입니다. 이것보다 더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차원이 다른, 순간적이지 않고 영구하고 완전한 소식입니다. 죄로 인해 주어진 모든 저주를 끊어내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힘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복음에 따라 우리 인생의 모든 희비가 결정됩니다. 복음은 우리의 신앙이 출발하는 중요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영원을 결정하는 인간의 최대 주제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복음을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소개해주는 기가 막힌 책입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왜 복음이 기쁜 소식인가를 충분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심령 속에 정확하게 들려 인생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복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의 기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복음은 바울이 혼자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은 것을 정리해서 주장한 자기 논리가 아닙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복음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해 오셨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창세기에서부터 나타내셨던 것인데 이제 그리스도로 인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 계획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실패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수 천 년의 역사를 걸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치밀한 계획 속에,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 속에서 이루어져 왔고 이제 모든 베일이 벗겨지고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성입니다. 이 비밀한 경륜을 우리가 깨달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셋째, 하나님의 복음, 구원은 하나님의 편에서 허락하신 것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서는 인간 구원을 위한 복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주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구원에 관한 모든 프로그램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편에서 손을 내밀어야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안과 안정감을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구원이라면 그것은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를 다루면서 확인하겠지만 우리가 구원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존재인가를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마련하신 구원은 인간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 실패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구원의 안정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소망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복음이 얼마나 광대하고 심오하고 오묘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복음의 광휘로움을 나누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위력이 로마를 굴복시키고, 흩어져 온 인류의 복음이 된 것처럼 앞으로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 위에도 복음 앞에 정면으로 부딪쳐 감격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기소개라기보다 그가 소개하고자 하는 분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종’은 아주 경멸스럽고, 말하는 짐승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뿐만이 아니라 서신서 곳곳에서 자신을 종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냥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은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의 반란과 신성모독의 죄로 사형당한 청년입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사형수로 얼마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여 그의 종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것이 뻔합니다. 

우리는 주로 자신을 소개할 때 누구의 아들, 누구의 친구나 동창으로, 유명하고 잘 나가고 있는 이름에 자기를 붙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소개는 기이합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평소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어떤 직함을 소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장’을 좋아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장을 붙여야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기소개는 너무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삶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대하는 모습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기의 이름을 극대화시키고 드러내는 일을 위해 목을 매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드러나는가, 내가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을 것인가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는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신경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세상적으로 말한다면 내세울 것이 상당히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7절을 보면 그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 스승에게서 학문을 섭렵했고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밑지는 장사일 수 있습니다. 종이란 완전히 종속된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스스로 빛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란 존재 목적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낼 때 그 인생은 가장 빛이 납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회사를 위해 일을 하긴 하는데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합니다. 회사를 위해 충성을 하지만 목적은 회사가 아니라 자신의 안녕과 성공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유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더 이상 충성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충분히 부합하지 않는 상황이 닥치면 끝이 나는 관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성은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그 이상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자가 아닙니다. 나의 발전이나 성공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를 믿는 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기의 종으로 만드는 격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목적이 되는가 수단이 되는가에 따라 신앙과 삶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다가 경력이 쌓이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출발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자기 이름이 높아지고, 자기 이름이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될 때 신앙의 변질과 타락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용당하시지 않습니다.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그가 로마서에서 말하는 핵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하게 했을까요? 이것은 복음을 경험하고 난 사람이 아니면 결단코 안 되는 일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하고 난 후에 눈이 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없다는 것을 그가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만 우리의 인생은 빛이 납니다. 그 빛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광채이지 우리 자신에게 나오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너무 몰두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아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무슨 직함이나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의 종이 될 때,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빛으로부터 오는 광채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 인생이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종 된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산 것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높여드리는 만큼만 그의 빛에서 오는 광채를 얻을 것입니다.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종 된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부르심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단어 하나하나를 보면 놀랍습니다. 

로마서에는 단어 하나, 전치사 하나도 놓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의 소명의식이 넘쳐 흐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밀착 되어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떼어내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바울 안에 넘쳐 흐르는 열정과 생명을 건 투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요?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의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소명감에서 나오는 힘은 대단합니다. 소명이 뚜렷할수록 선명한 인생이 됩니다. 선이 굵고 선명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확실한 소명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점이 잘 맞춰진 렌즈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삶의 시작은 소명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부르심이란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굶어 죽게 되었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정확하면 그 인생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정확한 부르심이 없다면 헷갈리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이 있다는 것이 부르심입니다. 열심히 살고 성실하고 바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쁘냐, 누가 그 일을 하라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백 명, 천 명이 의기투합해서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어서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날 하기 싫으면 그만둘 것입니다. 

삶의 동기가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감정에 따라 굴곡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정확한 사람들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부르심이 지워지기 전에는 그 인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서의 삶의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신적 소명에 근거한 삶은 생명을 거는 삶입니다. 부르신 분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삶이 단순합니다. 부르신 자에게 집중하고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분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삶의 근거가 바울의 삶을 변화하게 하고 자기 삶을 바치게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모두 소명자입니다. 인식하고 있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소명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라고 한 것을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가 아니라,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소명의 출발입니다. 

구원 안에는 우리 삶에 대한 소명이 들어있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면 당장 우리 안에 질문이 떠오릅니다. “구원 받은 나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구원 받은 후에는 이전과 똑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구원사건이 분명하면 소명도 같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사건이 분명하게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부르심의 경험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삶이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인생에서 아주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풀려야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바울의 소명의식,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은 억지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억지로 예수를 믿을 수 없듯이 억지로 소명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경험했습니다. 율법에 사로잡혀 복음의 반대편에서 교회와 예수를 핍박하던 그가 한 순간에 예수의 종으로, 예수의 전사로 생명을 걸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 로마서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바쁘게 살아가며 무엇인가 매여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고삐들이 있습니다. 고삐에 매여있다는 것은 다른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에만 붙들려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나의 주인입니다. 바로 노예적 삶입니다. 

오늘 로마서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복음의 능력은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고삐들, 그리스도가 아닌 것들이 내 삶을 끌어가는 것에서 자유하게 되고, 온전히 한 분에게만 붙들려 사는 참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 된 삶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로마서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스러움에 사로잡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 복음이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고 인생을 바꾸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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