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벽재건의 원리 (느 3:28-32)

첨부 1


성벽재건의 원리 (느 3:28-32)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내용입니다. 느헤미야 3장은 얼핏 보면 몹시 단조로운 말씀입니다. 거의 별다른 내용이 없고, 계속되는 생소한 지명과 위치, 그리고 사람들의 이름들이 반복적으로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달고, 건축하고, 중수하였다는 것 외에는 그리 특별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묵상해 보면 깊은 메시지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가운데 무너진 성벽을 자세하게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성벽재건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며 성벽재건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모든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일어나 건축하자”고 화답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불타버린 성문을 재건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성벽과 성문의 재건공사는 큰 공사였습니다. 예루살렘성은 오랫동안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어 황폐하게 된 정도가 심했습니다. 성벽의 두께는 대략 5m정도였으며 넓은 곳은 15m나 되는 곳도 있었고, 성문의 높이는 7m정도나 되었습니다. 이처럼 거대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는 참으로 많은 인력이 소요되는 대공사였습니다. 


그러나 성벽재건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라고 했습니다. 2:18절의 말씀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자”는 그들의 고백이 드디어 실천에 옮겨진 것입니다.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개인이든지 가정이든지 교회이든지 비전은 행동으로 바뀌어야 능력이 있는 비전입니다. 말로만 이루어지는 역사는 무능한 역사입니다.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아무리 멋있는 비전이 있다고 해도 실천되지 않으면 감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허물어진 성벽을 중건해야겠다는 생각에만 빠져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힘든 공사를 불과 52일 만에 끝마칩니다. 그 일을 저들이 두 달도 못되어 끝마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럼 백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성벽재건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요? 

1. 짧은 시간에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느헤미야가 백성들과 지도자들에게 성벽재건의 동기부여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2:17절에 보시면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라고 하면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성벽재건의 당위성에 대해 호소합니다. 

느헤미야가 말하고 있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은 폐허가 되었고, 성벽과 성문은 무너지고 불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그동안 이방민족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방민족에게 조롱받고, 모독과 멸시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 조롱과 모독과 멸시를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두 함께 일어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불타버린 성문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의 신령한 손이 도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이처럼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먼저 성벽건축의 당위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0절에서 왜 이 일을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느헤미야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예루살렘 땅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지라도 민족의 미래를 펼쳐나갈 땅이라고 느헤미야는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느헤미야 자신이 갖고서 동족들의 영혼에 호소했고, 그러자 백성들과 지도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일어나 건축하자”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 좋고, 필요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고, 자기 생존과 연관이 없으면 그리고 자기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헌신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때 움직입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너와 나의 일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선택된 자녀답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2. 느헤미야가 현실을 극복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백성들이 서로 힘을 합쳐 연합해서 일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3장에는 43개의 부족과 75명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직업에 따라 분류해보면 직업이 15가지 이상이나 됩니다. 전체성벽을 42구역으로 나누고, 10개의 문과 4개의 망들을 세워 그곳에 필요한 사람들을 배치했습니다. 성벽 재건공사는 한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75명의 이름과 43개의 부족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연합해서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그 다음은’이라는 말인데, 원어로 ‘웨알’이라고 합니다. ‘웨알’이란 ‘계획과 분담과 책임’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 구역마다 사람들은 맡은 구역에서 할 일을 분담했고, 맡은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3장에서 ‘그 다음은’이라는 말이 무려 29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질서 있게 조화를 이루면서 협력하여 성벽재건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3장을 자세히 보면 모든 사람들이 협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제사장 그룹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바쁘다고 열외를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먼저 솔선수범하였습니다. 

또한 전문직들도 이 일에 함께 힘을 모읍니다. 

8절을 보면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그들이 예루살렘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31절에는 “그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라고 했습니다. 

이들 모두는 그 방면의 숙련공들이었습니다. 금 세공업은 섬세한 작업을 요하는 직업입니다. 이 작업이 무척 정교함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눈이나 손을 다치면 안 됩니다. 손의 감각이 둔해지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을 만지고 막일을 하기에는 적합치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성벽 재건과 성문 보수 공사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귀족 가문의 출신들도 이 일에 함께 참여합니다. 

9절에 보면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라고 했고, 12절에는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롬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이스라엘을 절반이상 다스리는 사람은 굉장히 높은 사람들이며 귀인들입니다. 그러나 귀인이라고 해서, 방백이라고 해서 이 일에서 열외 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빈부귀천을 떠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협력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롬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남자들만 이 일을 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할로헤스의 아들뿐만이 아니라 그 딸들까지도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겠노라고 자원해서 나섰습니다. 

그리고 일반직들과 상인들까지 모두 동참했습니다.

또 29절에 보면 동문지기 스마야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동문지기란 오늘날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관에 해당되는 직업입니다. 또 32절에 보면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거하는 주민들만 협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라고 했고, 5절에는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라고 했고, 7절에는 “그 다음은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이 강 서쪽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들 및 미스바 사람들과 더불어 중수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로 실제 예루살렘 성과는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성벽재건에 동참했습니다. 

이처럼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모든 직업의 사람들, 모든 성별,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성벽을 중건하는 사역에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고 몇몇 사람들이 빠지고 자기 몫을 잘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공사를 완성하는 일에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협력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함으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 4: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합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다양한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지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건강한 몸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도 바로 성도의 유기체입니다. 서로 힘을 모아 협력해야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 모두의 힘이 다 필요합니다. 교회는 부족해도 함께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여러분 모두가 참여하셔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리에 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하며 서로 격려하고 협력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느헤미야가 현실을 극복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에 대한 격려와 칭찬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3장은 전부가 32절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는 사실은 격려의 원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75명의 대표자와 그들의 신분과 직업, 성별, 그리고 한 일들을 적어 놓음으로 그들을 인정하며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각 사람들의 이름을 적을 때 거론되지 않는 사람이 느헤미야입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가장 수고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름을 제외하고 예루살렘 성 건축에 수고한 75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하신 것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큰 격려가 됩니까? 

느헤미야는 성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성벽재건에 필요한 하나의 도구로서만 생각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이해하고 관심과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20절 말씀에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보통은 “누구는 무슨 무슨 일을 했고”라는 표현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바룩은 특별히 “힘써 일을 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고했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많은 희생을 했던 한 사람을 느헤미야는 기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잊지 않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됩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따뜻한 격려가 필요합니다. 아무런 보상과 댓가를 바라지 않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면 아무런 격려가 없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격려해 주라고 말씀합니다. 

히 10:24-25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롬 15:7절에도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족한 우리를 받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던 것 같이 너희들도 사람들의 부족함이 보이고, 연약함이 보인다 할지라도 서로 받으며 격려하고, 칭찬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서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을 했던 일이 있으면 서로 격려하라고 말을 합니다. 공동체가 회복되고 새로워지는 것은 다른 원리들도 많이 필요하지만 격려가 있게 될 때 사람들은 모이고, 서로 하나 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가끔씩 기러기 때가 V자로 날라 가는 모습을 봅니다. 기러기가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가는 것은 멋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류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V자로 모양으로 날아갈 때 70%이상을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맨 앞에 날아가는 새가 뒤 따라오는 새가 받을 공기 저항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러기가 날면서 우는 이유는 뒤에 따라가는 새가 앞서 가는 새를 격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참 날다가 힘들면 앞서 가던 새와 자리를 바꿔 먼 여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마리가 이상이라도 생기면, 다른 두 마리가 같이 내려와 있다가 다른 떼에 흡수되어 다시 날아갑니다. 격려하고 위로할 때 본래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상호 무관심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교회안에서도 다른 성도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서로 기억하고 인정하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칭찬은 관계를 좋아지게 합니다. 칭찬과 인정은 교회가 움직이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비판과 욕설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우리의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순절 기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기간을 맞이하여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 마음의 무너진 성벽과 불타 버린 성문을 재건하고 보수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2013년 한해 우리교회와 성도 개인의 영적인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교회가 108년의 역사를 맞이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며, 지역과 이웃의 벗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이 비전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여 격려함으로 귀한 부흥을 체험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