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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멘붕의 시대 (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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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의 시대 (룻기 1:1-5) 
 
 
요즈음 시대를 일컬어 "멘붕의 시대"라고 합니다. 멘붕은  "멘탈 붕괴"(mental breakdown)라는 말의 줄인말입니다. 멘붕은 다양한 신문 기사에 언급되었을 뿐 아니라 개그 콘서트에 "멘붕 스쿨"이라는 코너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있습니다. 멘붕스쿨에서는 흔히 말해 정상인 사람은 송준근이란 개그맨이 맡은 선생님 한 명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반의 잣대를 제시하는 역할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계속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의 점점 더 세지는, 상승적 고양에 따라 이 선생이 느끼는, 또 관객과 시청자가 느끼는 멘붕 상태는 커지게 됩니다.

멘붕은 멘탈이라는 영어와 붕괴라는 한자어가 이질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함께 섞였다는 점에서 코믹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멘붕이 유행한 진정한 이유는 이 말이 우리가 사는 시대를 잘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멘붕스쿨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요즈음 애들 왜 이래?"라는 말입니다. "요즈음 사람들 왜이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멘붕은'정신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을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지극히 자극적인 단어지만 이만큼 작금의 사회가 주고 있는 충격의 강도를 잘 표현하는 것도 없습니다.
멘붕의 시대는 어쩌면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변화해가는 세상에 휘둘리면서 정작 자신을 잃어가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어의 mentality의 근원이 되는 불어의 망탈리테 (mentalite)는 한 집단의 사고방식, 세계관, 태도 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망탈리테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갑자기 망탈리테가 바뀌는 순간, 기존의 망탈리티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믿던 세계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멘탈 붕괴, 즉 멘붕인 것이죠.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 이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멘붕에 빠졌습니다.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 국민이 왕을 처형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공산주의자는 멘붕을 경험했습니다. 멘붕은 역사가 진보할 때 뿐 아니라 역사가 후퇴할때도 발생합니다. 1차대전 후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서면서 어렵게 이뤄낸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많은 독일인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이는 기존의 망탈리티와 맞지 않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반응입니다.

최초의 여자 대통령을 맞게 되는 우리 대한민국과 그것을 극렬하게 저항하며 야당후보에게 몰표를 보냈던 호남인들은 멘붕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고깨면 정신이 아찔할 만큼, 그리고 소름이 끼칠만큼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도 공포괴기 영화에서나 가능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건 사고가 일상화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멘탈붕괴는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맨탈붕괴는 각종 스트레스와 혼란으로 가득찬 사회현실과 맞물려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근래 실시한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결과 멘탈붕괴의 주요 사유로 소득감소(32.7%)를 가장 많이 꼽았고, 부채증가(17.6%), 불안정한 일자리(14.3%), 과도한 교육비지출(13.5%), 자산가치 하락(11.8%), 전·월세 등 주거비 부담(4.9%) 순으로 응답, 경제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 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멘붕은 사회전반적인 분위기와 맞물린 불황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그 정도차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집단 우울증이라고 할 만큼 우리 사회는 신음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정신적인 상태가 어떤 모습으로 사회화 될지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떄에 뭔가 길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날 아침에 이 말씀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룻기는 멘붕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한 안내서입니다. 룻기는 라오미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란 부부가 말론과 기룐이란 두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으로 깊은 종교적 고백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이로보아 그의 부모가 신앙이 좋고 그 아들에게도 하나님을 왕처럼 받들어 섬기도록 가르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란 '사랑스러운', '우리의 즐거움'이란 뜻의 이름입니다. 이를 보아 나오미는 어려서 부모와 이웃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정도면 기대 만빵의 인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좀더 안정되고 좋은 땅을 찾아서 제빠르게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당시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시대를 읽고 보고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결단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남편이 죽었을 때의 괴로움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괴로움을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결혼시킴으로 달래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두 아들 마져 이방땅 모압에서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란 말은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남편 죽고 두 아들마져도 후손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가문이 멸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오미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나오미는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3) 이 말씀은 나오미의 기구한 운명을 잘 말해줍니다. 남편 죽고 두 아들이 앞서 죽었을 때 나오미는 살아 있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살았다는 것이 저주입니다. 죽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죽었겠지만 죽지 못해 사는 괴로움인 것입니다. 나오미의 상태가 바로 멘붕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 때문에 모압으로 이사했지만 나오미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한 10년 세월이였습니다. 이때 들려오는 소식이 베들레헴에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자부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습니다. 두 자부와 함께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8)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자부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오미는 자신과 함께 가도 소망이 없다고 하며 강권하여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향해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라는 고백을 하면서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나오미의 10년간의 잃은 것은 남편과 두 아들입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쓰라린 시련과 고통이였습니다. 남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면서 살아온 세월이었지만 남은 것은 상처 뿐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멘붕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룻을 얻었습니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인간적인 면에서 비교해보면 천금을 잃고 동전 한 닢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룻기를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 여인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돌아오므로 베들레헴의 가장 유력자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예수님의 조상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룻은 단순한 모압의 한 여인으로, 시어머니를 잘 섬긴 며느리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룻은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시련과 고통으로 댓가를 치루고 얻은 것입니다. 

멘붕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현실을 바꾸는 생각이 탄생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부디 기회가 낭비되지 않길 바랍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실패를 통해서 배운 것을 말합니다.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잃지 않고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잃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얻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전에 애양원에서 목회한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나는 문둥병이 걸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기 전에 잘 사는 집에서 자랐고 대학도 졸업하고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에 걸리므로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살 수 없고 애양원에 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며 구원받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재산도 학벌도 다 잃고 건강마져 잃고 구원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잃은 것을 아깝게 여기다가 일평생 한으로 품고 고생하는 것을 봅니다. 잃은 것을 아깝게 여기는 것은 불행중에 불행입니다. 그러나 잃은 것을 통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룻을 얻어야 합니다. 룻은 믿음입니다. 어떤 성도는 직장을 잃으니까 믿음도 잃습니다. 재산을 잃으니까 교회도 나오지 않습니다. 잃고 또 잃는 불행으로 달려가는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직장을 잃었을 때 안하던 새벽기도도 나오고 재산을 잃으니까 교회 봉사를 더 잘 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복 받겠습니까? 세상적인 것을 잃어도 구속사적인 것을 얻어야 합니다. 믿음이 더 성장하고 주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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