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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눅 9: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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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눅 9:28-43) 

<예수님의 산상변모 사건>

오늘은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또한 우리나라의 음력설입니다. 많은 분들이 설을 쇠기 위해 고향에 갔을 것입니다. 또한 고향 부모님의 집을 찾아 오늘 이렇게 우리 교회에 나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방문하신 모든 가족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와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사실 신정을 이미 쇳기 때문에 2013년은 벌써 한 달 이상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구정을 또 한 번 쇠어야 하기 때문에 구정이 지나야지만 진짜 새해가 시작되었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온 가족이 다함께 모이는 이번 음력설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명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음력설을 쇰으로써 명실 공히 2013년도가 새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에도 여러분이 계획하는 일들이 다 이루어지고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회력으로 볼 때 오늘은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지만 산상변모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변형되어 영광을 받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지요. 그러기에 저는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9장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수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약 550미터 쯤 되는 다볼산에 다름 아닌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시는 가운데 예수님이 너무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입으신 옷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고 우리의 옷에도 광채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시간은 온통 빛이신 하나님과 접속하는 시간이요 대화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두 기둥입니다. 모세는 모세오경을 기록한 저자로서 율법을 대표하는 기둥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시대에 가장 많은 이사와 기적을 일으킨 선지자로서 예언서를 대표하는 기둥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볼산에서 변화되신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다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말씀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1절에 보면 이 세 분은 특별히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DEPARTURE,” 즉 “떠나가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화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DEPARTURE,” “떠나가심,” 혹은 개역 개정판의 번역대로 “별세”는 헬라어 원어 그대로 하면 “EXODUS”입니다. 출애굽을 뜻하는 “EXODUS”가 바로 “별세,” 혹은 “떠나가심”으로 번역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특히 EXODUS의 주인공인 모세와 더불어 EXODUS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옛날 모세가 주도했던 EXODUS가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와 해방을 이끌어냈듯이, 예수님의 EXODUS는 온 세상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해내는 자유와 해방의 EXODUS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산꼭대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의 주제는 장차 예수님이 져야 할 십자가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변화산에서의 영광은 그 영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끌 영광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너무도 황홀한 산꼭대기 체험을 한 뒤에>

문제는 세 명의 제자가 이런 사실을 깜깜하게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32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와 같이 기도하시고 영광스러운 대화를 나누실 때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은 졸고 있었습니다(눅 22: 45-46).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금방 잠에서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과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을 목격했습니다. 너무도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는 순간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청원을 합니다. 33절을 보세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을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도 신비하고 너무도 황홀해서 이 역사적인 사건을 오랫동안 기념하고 보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기념 예배당을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산꼭대기에 짓고 싶었습니다. 영원토록 잊지 않고 기억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또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기념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예수께서 산꼭대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우리는 “mountaintop experience,” 즉 “산꼭대기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너무도 신비하고 황홀한 시간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오늘까지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이와 같이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체험을 수도 없이 해오셨을 것입니다. 병들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치유됐습니다. 산꼭대기 체험을 한 것이지요. 저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하여 다시 일어섰습니다. 산꼭대기 체험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다가, 찬양대의 찬양을 듣다가, 자동차를 운전하다고 설교방송이나 간증을 듣다가 참으로 신비한 은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모두 다 산꼭대기 체험이지요! 

문제는 이런 산꼭대기 체험을 할 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는 다시는 이와 같은 산꼭대기 체험을 할 수 없으리라고 지레 짐작해서 영원히 그 산꼭대기 체험을 했던 시간과 장소를 떠나지 않고 잊지 않고 싶어서 초막 셋을 지으려고 합니다. 역경과 고난이 기다리는 저 산 밑, 계곡이나 평지로 내려가기 싫어서 산꼭대기에만 머무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영광스럽고 황홀하기 그지없는 산꼭대기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추락하는 저 골짜기에도 계시고, 그저 단조롭기 그지없는 평지 위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저 산밑 골짜기에도 계시는 주님>

문제는 제자들이 이것을 몰랐습니다. 산꼭대기가 너무 좋아서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저 빛나게 영광 받고 황홀하고 신비한 이 순간에 영원토록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짓자고 보채는 베드로에게 또 한 가지 신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4-35절을 보세요. 베드로는 너무도 황홀한 가운데 이 말을 내뱉었기 때문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 말을 했습니다(33b). 바로 이런 베드로를 책망이라도 하듯이 갑자기 구름이 일어나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세 분을 휩싸서 세 사람은 모두 구름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 

어쩌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심정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산꼭대기의 황홀한 체험에만 사로잡혀 자기 말만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꾸지람을 하시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만 입 닥치고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 예수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에서 중한 고난을 받고 돌아가셔야 하는데 너무 인간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베드로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꾸지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먼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때로 말을 줄이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그 분, 우리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제 9장 전체를 놓고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9장은 예수님의 12제자가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받은 것으로 시작합니다(1). 이들은 실제로 곳곳에 복음을 전하여 두루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다가 9장 중간에 가면 12제자들 가운데 수제자 세 사람이 그 놀라운 변화산 체험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산상변모 사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산에 올라간 그 다음날 예수님을 비롯한 세 제자가 산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를 제외한 아홉 제자는 귀신 들린 아이의 병 하나를 못 고칩니다. 분명히 9장 1절은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하고 쫓아내는 능력을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제자들은 귀신을 못 쫓아냅니다. 

그렇다면 왜 능력(power, dynamis) 있는 제자들이 전혀 무능한(powerless, ouk dynamai) 제자로 곤두박질 쳤을까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능력 있는 제자들과 능력 없는 제자들 사이에 끼어있는 예수님의 산상변모 사건이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요? 아마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가 문제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은 영광과 권능의 산꼭대기 체험에만 관심이 있었지, 저 산밑으로 떨어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골짜기 체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수치와 수난 당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광과 권능과 신비의 그리스도에만 집착했던 것이지요! 

베드로가 산꼭대기의 영광스럽고 신비한 체험에 압도당해서 산꼭대기에 초막 셋을 짓고 영원토록 머무르자고 간청했던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과 권능에만 관심이 있었지 십자가의 수치와 수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꼭대기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산밑에도 계십니다. 기막힌 고난의 골짜기 한 가운데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저 단조로운 일상생활이 되풀이 되는 평지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만 먼저 앞세웠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지껄이기만 하니 그 분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이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힐 때 제자들은 무능해집니다! 하지만 주님의 음성을 먼저 듣는다면 다시 권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오늘 우리도 마음을 새롭게 해서 먼저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이나 욕심을 예수님께 투사해서 우리 멋대로 예수님을 믿을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아주 오래 전에 한 가톨릭 방송사에서 인도 캘커타에서 빈민 봉사사역을 하는 마더 테레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기로 했습니다. 촬영 팀이 여러 날 동안 테레사 수녀가 봉사활동을 하는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하루는 캘커타 시내의 후미진 골목에서 하수구에 처박혀 죽어가는 한 남자를 돌보는 장면을 찍게 되었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다가 냄새 나고 더럽고, 가쁜 숨을 내쉬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노숙자를 돌보는 일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동이에 물을 떠다가 옷을 벗기고 그 죽어가는 남자의 몸을 닦아주었습니다. 이 장면을 촬영하던 카메라 기사 한 사람이 카메라 촬영이 잠시 중단된 틈을 타서 말했습니다. “나는 백만 불을 준다고 해도 이렇게는 못 하겠어.”(I wouldn’t do that for a million dollars.) 이 말을 엿들은 마더 테레사는 위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그 남자의 몸을 씻겨주면서 “나도 마찬가지랍니다.”(Neither would I.)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산꼭대기에서 영광스럽고 황홀한 체험을 할 때에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 산밑에서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테레사 수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우리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모든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무거운 짐을 질 때에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십자가의 수치와 수난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영광과 권능의 주님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 당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의 수치와 수난에 귀를 기울여 그분의 진정한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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