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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마지막 인사 (엡 6: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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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지막 인사 (엡 6:23-24)


주일 예배 때에 에베소서를 강해한지가 꼭 일 년이 되었습니다. 주보를 찾아보니 작년 2월 19일부터 에베소서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에베소서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에베소서 강해의 마지막 시간으로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하고 있는 마지막 인사를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마치면서 인사와 함께 두 가지를 축복합니다. 하나는 평안과 사랑을 축복합니다. 또 하나는 은혜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온갖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축복하는 말씀을 묵상하며 ‘말’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의 신체 부위 중에서 가장 강한 부위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우리 신체 부위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혀입니다. 여기에서 혀가 강하다는 것은 물리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혀가 강하다는 것은 혀를 통해 하는 ‘말’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21절에서는 혀의 위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즉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거미는 자신이 쳐 놓은 거미줄의 범위 안에서 삽니다. 누에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실로 만든 고치 안에서 삽니다.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그 말의 내용 안에서 삽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살면 부정적인 환경에 살게 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서 살면 긍정적인 환경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들이 쉽게 내뱉는 말이 곧 우리의 삶이 되고 인생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옛 어른들은 ‘말이 씨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는 가운데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합니다.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 40일간 정탐하게 했습니다. 12명이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후에 보고하는데 보고 내용이 달랐습니다. 10명은 가나안 땅은 점령할 수가 없다고 말하며 그곳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그곳에 사는 사람은 거인의 후손이 아낙 자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다고 보고합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보고가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가나안 족속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놀라운 것은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사람과 그 부정적인 보고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다고 말했던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백한 말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이어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14장 28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즉 우리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말입니다. 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최고의 ‘러브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아가서’가 있습니다. 아가서는 표면적으로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내면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이 수넴의 시골 출신인 술람미라는 여인을 사랑합니다. 저는 아가서를 읽으면서 ‘말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가서를 1장 5절 이하에 보면 술람미는 자신에 대해 표현할 때 ‘내가 비록 검어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라고 말합니다. 게달의 장막이란 늙고 병든 염소 가죽으로 만든 바람막이 가죽입니다. 술람미는 자신이 힘겹게 사는 가운데 햇볕에 노출되어 피부를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피부가 거칠고 검어 게달의 장막과 같다고 말합니다. 아가서 1장 6절에서는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구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포도원을 가꾸는 가운데 내 피부를 가꾸지 못해 검게 타고 거칠어 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자신의 그런 외모와 거친 피부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2장 1절에 보면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고 말합니다. 아가서를 읽다보면 술람미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긍심과 자존감이 놀랍습니다. 온갖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민 예루살렘 여인들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솔로몬의 휘장에, 그리고 수선화와 골짜기에 핀 백합화에 비유합니다. 그와 같은 자존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술람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해 주는 솔로몬 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향해 아가서 1장 9 이하에서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빰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술람미의 피부가 검다고 조롱하는데 솔로몬은 ‘바로의 병거의 준마’와 같다고 말합니다. 애굽 제국의 황제인 바로 왕이 타는 병거를 끄는 검은 말입니다. 최고의 말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피부를 그것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고벨화에 비유합니다. 뒤에 보면 석류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에 비유합니다.

술람미 여인의 피부가 뜨거운 햇볕에 검게 그을려 게달의 장막처럼 거칠고 흉하게 되었지만 자신은 솔로몬의 휘장에 수선화와 백합화에 비유하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를 사랑하는 솔로몬의 사랑의 말의 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향한 축복의 말은 그 사람을 살리는 힘입니다. 그러나 저주와 비난의 말은 그 사람을 죽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축복의 말과 사랑의 말을 하는데 참으로 인색합니다. 축복의 말과 사랑의 말을 하기도 인색하지만 축복의 말과 사랑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데도 어색합니다. 우리가 남을 향해 축복과 사랑의 말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은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축복의 말과 사랑의 말은 자신을 살리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 마음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면 압니다. 불평하는 말을 하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경질적인 말을 하면서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남을 헐뜯고 음해하는 말을 하면서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축복과 사랑의 말을 하려면 자신의 마음이 축복과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축복과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한 순간에 위장된 언어로 축복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태복음 12장 35절에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마음에 무엇이 쌓여 있느냐에 따라 그 입을 통해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늘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이래도 감사하고 저래도 감사합니다. 마음에 감사와 화평과 거룩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이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늘 마음에 불평과 불만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원망합니다. 판단하고 신경질적이고 화를 냅니다. 결국 그 사람의 삶이 피폐해집니다. 남을 축복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축복의 말과 감사의 말과 사랑의 말은 듣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말을 하는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평화와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은혜를 축복합니다. 바울이 처해 있는 상황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도리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위로와 사랑의 언어로 축복을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사랑과 화평으로,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이는 바울이 환경적으로는 옥에 갇혀 있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그 열악한 환경들조차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과 사랑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마치면서 그의 마지막 말은 축복의 말이었습니다. 그 축복의 말을 통해 바울의 마음 안에 가득 차 있는 평안과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은 사랑의 말, 축복의 말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서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사랑의 말이고 축복의 말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서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사랑의 말과 격려의 말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와 직장에서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말들이 축복과 사랑과 격려의 말이 많은지 아니면 불평과 서로를 탓하는 원망과 비판하는 말이 많은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평과 서로를 비난하며 탓하는 원망의 말이 많은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직장 생활 속에 진정한 행복과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과 희망은 축복과 사랑과 격려의 말이 많은 곳에서 피어납니다.

부부의 관계와 치유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갓트만 교수는 부부 생활에서 4 가지의 언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비난의 언어, 모욕의 언어, 자기변명의 언어, 무시의 언어입니다. 이런 언어를 서로에게 사용하는 부부의 95%가 관계가 깨어진다고 말합니다. 부부의 관계가 깨어진다면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어짐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미안했다. 사랑한다. 고마웠다’라는 말이랍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싸우며 살다가도 죽을 때는 미안했다고, 사랑한다고, 고마웠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죽을 때 가서야 주변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이 말을 많이 하고 삽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게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 안에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며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보너스입니다. 이제 에베소서 강해를 마칩니다. 에베소서 강해를 마치면서 바울의 마지막 사랑과 평안과 은혜의 축복의 말을 나의 마음에 담고 나의 언어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축복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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