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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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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마 5:4)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1. 대부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길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간다.’는 옛말이 있듯이 ‘진리’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필귀정의 신념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리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진리’ 가운데는 쉽게 이해가 안되는 역설(逆說)적인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러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행 20:35)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눅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벧전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눅6:23-25)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예수께서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 날”은 예수께서 장차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제자들이 엄청난 박해와 핍박을 받아 고난당하게 될 ‘그 날’을 말합니다. 극한 박해와 핍박을 받을 때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역설적으로 “기뻐하고 뛰놀라.” 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받은 박해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뛰놀라.” 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박해로 인해 ‘하늘에서 너희 상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은 자들의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하나하나를 세세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박해를 피해가거나, 박해로 인해서 믿음을 저버리거나, 주를 배반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뛰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해 만큼이나 오늘날 사람들을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예와 부귀 등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명예나 물질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장차 그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축복 곧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환란과 핍박을 당한다 해도, 그리고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하늘 나라에서 큰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이 땅의 모든 부자들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상징적 의미로서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신뢰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자신만을 신뢰하고 자만하며, 자신들의 교육, 학문, 지혜만 자랑합니다. 더욱이 이들은 마음이 심히 완악하고 강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의 메시지에 귀 기울일 줄 모르며 하나님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기업이 없이도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에 삶의 모든 의미를 두고 허탄한 일만 일삼고 삽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심판 때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화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부요한 자들은 미래의 영원한 축복 대신 현재의 육신적 만족을 스스로 택하였고, 더욱이 다른 사람을 착취한 대가로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음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느끼지 못하고 영혼의 굶주림을 외면한 채 재물을 방탕하게 사용하여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키는데 급급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 배부른 자는 장차 영원히 주리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여기서 웃는 자의 웃음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서 오는 육적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심판 때 대가로 받을 울음은 영원한 것이 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역설적이지만 ‘진리’가 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 후서6:10입니다.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도 바울은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바로라.”면서 복음을 전도할 때 가장 먼저 동족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동족들은 진실로 사랑하여 복음을 가장 먼저 그들에게 전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거절하고, 오히려 사사건건 되지도 않은 문제로 시비를 걸며, 온갖 방법으로 복음 전도를 방해했습니다. 이러한 동족들의 불신앙과 박해가 바울을 무척이나 슬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범사에 기뻐했습니다. 박해를 받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으면서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장차 받게 될 하늘의 상급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또 자신을 두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부(富)를 전혀 갖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빌3:8-9)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했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귀한 지식이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부요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부요함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신 것을 본받아 살았던 것입니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두고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한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소유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이 세대’가 진행되는 동안만 쓸모 있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가치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세대’를 얻었으므로 사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는 자신은 예수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고전 3:23)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기 때문에 오직 주 예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을 믿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바울은 실로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역설적인 진리의 말씀,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는 가치관과 그 고백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같으나 만유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세상에서의 소유에 상관없이 범사에 자족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2. 오늘 본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 역시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여기 “애통하다.”는 말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맹수에 잡혀 먹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야곱의 편애를 받은 요셉을 두고 그 형들이 몹시 시기했습니다. 

마침 멀리 가축을 치고 있던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라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간 요셉을 두고, 형들이 요셉을 애굽 노예상에게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짐승에게 잡혀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로 했습니다. 일을 꾸미기 위해 그들은 염소를 죽이고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그 피에 적셔 그것을 아버지에게 갖다 드리며 ‘우리가 이것을 주웠는데 요셉의 옷인지 보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것을 알아보고 ‘이것은 내 아들의 옷이다. 맹수가 그를 잡아먹었구나. 내 아들 요셉은 찢겨 죽은 것이 틀림없다.’ 라고 통곡하며 자기 옷을 찢고 허리에 굵은 삼베를 두르고 오랫동안 아들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를 위로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내가 슬퍼하다가 저 세상에 있는 내 아들에게 가겠다.’ 하고 계속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에, 그 고통스러운 슬픔을 안고, 자신도 아들을 따라 죽겠다며 비통해하는 것을 두고 ‘애통하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창37:31-35) 


3. 그러면 이러한 마음으로 무엇을 위해 애통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두고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복 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인격과 결점에 대해 통회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했습니다.

(사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B.C.740년경,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애통했습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완전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됨과 그 백성의 죄악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사33:14) 부패한 인간이 그 앞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출 33:20;삿 13:22). 

환상 가운데 여호와를 목도한 선지자는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의식 속에서는 자기가 벌써 죽은 것처럼 느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먼저 자기 자신을 바로 보고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죄인됨을 부정할 수가 없었고, 그에 따라 하나님 말씀대로 처리한다면 화를 면할 수 없고 영원히 멸망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며 ‘애통해’ 한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의 실상을 목격하고 자기 존재의 진면목을 깊이 내려다 본 영혼은 “애통해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애통으로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할 때 인격과 성품이 성결함을 이루어 성숙한 인격과 성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순간적이나마 살펴본다면,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 빛 앞에 드러내 놓고, 하나님으로부터 비쳐오는, 만물을 샅샅이 드러내는 그 밝은 빛 가운데서 자신의 인격과 행위를 낱낱이 살펴본다면, 아무리 순결하고 가장 고상한 자라 하더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며 절규하며 애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말과 행동, 마음과 생각, 그리고 그 성품과 전 인격까지 세밀히 꿰뚫어 감찰하시고 계시다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다윗은 한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해보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자신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아니 모태에 잉태되기 전부터 다윗의 모든 생각과 인물됨, 그리고 그의 미래에 있을 모든 생각과 삶, 또한 다윗이 죽을 때까지의 모든 생각과 삶을 주의 책에 다 기록하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진실로 복된 성도의 삶이 되도록 하루 일을 마치고 모든 일을 잠깐 멈추고 명상하는 가운데 자기 생활을 훑어보며, ‘내가 무엇을 했는가? 내가 무엇을 말했는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했는가?’라고 자문해 보며, 만일 여러분이 어떤 해서는 안될 일을 했음을 발견한다면, 그 그릇된 행위를 생각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며 애통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내 속에서 나를 이렇게 행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찌하여 나는 화를 잘 내는가? 어찌하여 나의 성질은 이리 못된 것인가? 어찌하여 나는 내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일까?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불친절하고 시기 많고 악한 생각을 품는 것일까? 어찌하여 나는 교만하고 이기적인가? 그것은 내 속의 무엇일까?’ 라고 물어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삶이 되도록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종일 신음하다가 지쳤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여름의 뙤약볕에 물이 말라버리듯 기력이 쇠하였었다.’고 실토합니다.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잘못과 죄를 숨김 없이 다 털어놓았더니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시32:3-5)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실수와 허물과 죄를 두고 이렇게 회개하며 애통했노라고 했습니다.

(시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다윗처럼 “(시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처럼 검토하면서 로마서 7:15-24의 체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의 옛 성품 속에는 선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선한 일을 하려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내적 존재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지만 내 육체에는 또 다른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과 싸워서 나를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의 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직도 내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육신은 죄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롬7:15-24) 

그리고 이 싸움이 그의 ‘옛 성품’ 속에 있음을 발견하며, 그것을 미워하며, 그것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것이 자기 속에 거하는 ‘옛 성품’과 ‘죄’라는 것을 깨닫고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 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었습니다. 만일 내 속에 있는 옛 성품과 죄 때문에 애통한다면 나는 참으로 애통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이 그 사람의 인격을 순화시키고 성숙하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하나되게 하여 신의 성품에 이르게 합니다. 자신의 인격과 성격에 부족함과 모자람, 그리고 그에 따른 허물에 대해 애통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달라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애통할 때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게 됩니다. 거만하고 오만한 태도가 모두 신속히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 성향, 기호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고집하지 않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행동이나 생활보다 월등하게 나쁜 다른 사람의 행동과 생활에 대해서도 관대해지게 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불쌍한 이웃에 대한 동정이 커집니다. 이러한 애통함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을 맑게 만듭니다. 세상에서의 화려한 생활, 부귀영화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자신을 더럽히지 않게 됩니다. 

“(잠 28:20)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는 지혜자의 말씀을 깨닫고 살게 됩니다. 애통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욕망들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애통은 우리의 잘못된 욕망을 해독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제임스 화이트는 “우리가 겪는 슬픔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시는 수단이다.??고 말했습니다. 불순물이 제거되는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애통을 통해 우리는 많은 복을 누리게 됩니다. 애통 후에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위로입니다. 애통 후에 찾아오는 것은 마음과 영혼의 정결함입니다. 그래서 애통한 후에 하늘의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1984년에 세상을 떠난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쉐퍼 박사는 말년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합니다. 그는 암과 혹독하게 싸우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캠퍼스 사역에 나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사랑했던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후의 메시지를 피를 토하듯 외쳤습니다. 그가 외친 내용은 이상스런 것이었습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누구에게나 의아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러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은 구하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난과 재난, 환난 등으로 오히려 그 인격과 성품이 성숙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상태가 악화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난과 환난 등의 압박으로 인해 희망을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의무를 망각하고, 이기적이고 음울하고 완고한 성품으로 변한 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환난을 통해 애통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영적 가난에서 오는 애통의 물감 한 두 방울을 환난의 잔에 슬쩍 떨어뜨리게 되면, 그 속의 물은 맑고 향기롭게 변하며 그 맛이 비록 쓸지라도 강장제로 바뀝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비통한 마음으로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슬픔이 깊어지면 애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자는 죄인된 자신의 존재가 “한 줌의 흙”에 불과하며,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야고보서 4:14)같음을 절통해 하는 자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비통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어야할 만큼 자신의 죄가 중대함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에 대한 공포 속에서 죄를 보게 될 때 그는 죄에 대한 강한 비애를 알고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마다 자신의 죄인됨을 애통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복있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깊이 슬퍼하는 자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범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애통하는 사람이며 십자가를 보고 죄로 인하여 다가올 파멸로 인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죄의 공포를 경험하는 사람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험이 회개의 경험이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몸둘 바를 모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애통해 하며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께서 눈물 병에 담으시고 주의 책에 기록하셔서 위로하시고 축복하십니다.(시56:8)

영국의 시인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작품에 <낙원>이 있는 데 그 내용을 각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책벌을 받고 세상으로 쫓겨난 한 천사가 다시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풀어야 할 한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것’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시장 바닥과 골목들을 누비며 이것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 따스한 봄날의 아침, 한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동네 입구에 세워진 지계표 위에서 한 아낙네가 칭얼대는 아이를 가슴에 품고 젖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생각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로 일컬어지는 모성애가 듬뿍 깃든 저 엄마의 젖 한 방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젖 한 방울을 얻어 낙원 문에 다달았으나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낙심 속에 또 다시 방랑의 길에 오른 그가 어느 무더운 여름 한낮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한 전쟁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생각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사르는 애국지사, 그가 흘린 마지막 피 한 방울이야말로 가장 존귀할게야!“ 식어 가는 피 한 방울을 조심스럽게 찍어 낙원 문에 도달했으나 대답은 ‘아니오!’였습니다. 

실망을 안고 또 한 번 여행길에 오른 그가 어느 겨울날 저녁 산등성이에서 있는 조그만 시골 교회를 들르게 되었습니다. 주일도 수요일도 아닌 평일 저녁, 약한 불빛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람의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제단 앞에 엎드려 통한과 함께 회개의 눈물을 쏟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깨달았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어머니의 젖과 애국지사가 흘린 피는 이 세상에서 더 없이 귀한 것이지만 노인의 참회하는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낙원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참회하는 노인의 눈물 한 방울을 들고 가 비로소 낙원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진실이 담긴 회개의 눈물은 굳게 닫힌 천국 문도, 돌같이 굳어진 사람의 마음도 녹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펄죤 목사도 ‘메마른 눈으로 천국에 올 자는 아무도 없다.’고 갈파했듯이 한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데는 오직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앞에 회개하는 눈물 한 방울 뿐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시는 것은 죄인의 상태를 용납해서가 아니라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며 회개 후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시기에 부지런히 찾고 또 찾으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영혼이 이 지상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회개의 역사야말로 천국에서는 가장 귀한 일입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애통하는 자가 행복한 인격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천국”(계 21:4)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애통하며 흘리는 성도의 눈물을 아름다운 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애통은 영혼의 고통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입니다. 애통하며 눈물을 흘릴 때 상처받은 영혼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4. 다음으로, 다른 사람과 그들의 죄를 보고 애통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흔히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은 그가 존재하는 사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때문에 그사 살고 있는 사회의 죄악, 부정부패와 타락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혐오감을 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사회와 세상을 두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류의 도덕적 혼란과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듣고 읽으면서 애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죄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애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인간의 죄악과 불행을 보시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멸망당할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그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다.” 하시면서 우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 때문에 우셨고 심령으로 애통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것을 보고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렘 4:19). 에스겔 9:4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를 인하여 탄식하고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와 그것으로 인한 불행을 보고 애통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겔9: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바울은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근심(슬픔)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동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애통하는 심정으로 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 가든지 항상 자기 동족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와 그것으로 인한 불행을 보고 애통하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죄사함 받아 구원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국가, 사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과 더불어 우리 사회의 죄악의 참상을 보고 애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혜서인 전도서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을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여러분은 애통하는 자가 되어 금세와 내세에 지혜롭고 거룩하며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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