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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 행하며 감사합시다 (고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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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행하며 감사합시다.

(고후 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평양북도 용천에 있는 한 교회의 성도님 이야기입니다. 그 성도님이 교회에서는 충성하는데, 너무 인색해서 소문이 나빴습니다. 특별히 집에 거지가 오면 내쫓기만 했지, 밥 한 숟가락 주는 적이 없었습니다. 성도님의 아들은 아버지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직분자라는 것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황 장로님의 아들인 자기 친구 광은(후에 보배로운 목사님이 되셨음)이와 함께 연극을 했습니다. 

광은이와 함께 거지 옷과 거지 모자를 쓰고 자기 집 대문 앞에 가서 구걸을 했습니다. “배가 고프니 먹다 남은 밥 좀 주세요!” 아버지 성도님이 나오셔서 소리쳤습니다. 
“밥 없어. 썩 꺼져!” 
“그러지 말고 조금만 주세요.” 
“없대두!” 
“그러면 돈 한 푼만 주세요.” 
“이것들이! 우리 집은 동냥 안 주는 것을 모르나?” 
“밥 좀 주세요.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거지들에게 혼난 성도님은 화가 나서 빗자루를 들고 거지들을 때리려 했습니다. 그러자 두 거지가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며 각설이 타령을 했습니다.

성도님은 더 화가 났습니다. 그때 아들이 모자를 벗으며 “아버지!”하고 불렀습니다. 성도님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들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께서 사고로나 병으로 돌아가시면 저도 거지가 될 것 아니에요. 제가 연극을 한 번 해보았는데, 모든 집이 우리 집처럼 이렇게 동냥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어요?” 

그때 성도님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라고 깨달은 성도님이 돌이키시고 거지들에게 가장 후한 도움을 주는 성도님이 되었답니다.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고린도에서 겨울을 유하기로 약속했었지만(고전 16:2-8) 부득이한 사정으로 계획이 변경되어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고린도 교회 바울의 반대파들은 그를 '육체의 지혜'(12절)로 행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을 경홀히 여기고(17절) 거짓말하며 경솔한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고 진실하게 행했다고 변호하며 양심의 증거하는 바라고 하며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법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양심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기본적인 도덕법을 깨닫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으면 먼저 양심이 반응을 일으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워하고 사후의 세계에 대한 무서움을 갖습니다. 이것은 양심의 반응 때문입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것과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그렇다고 양심의 반응과 그 결과에 따라 구원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바울이 양심의 증거가 자랑이라고 한 것은 다만 자신의 진실성을 표현한 말로 자신이 고난을 받고 고린도 교인들과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부득이한 현실에 처한 자신의 진실이 기운을 북돋고 떠 받들어 주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할 때의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소위 ‘눈물의 편지’로 불리는 서신을 읽고 많은 성도가 회개하며,자신들의 신앙을 바로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도 교회 내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려던 계획을 거듭 변경함으로 인해 그를 가리켜‘그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야’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연보로 인해 바울을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진실됨을 ‘양심의 증거’를 통해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도로서 가진 양심이 자신의 진실됨을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에선 양심을 ‘객관적인 관찰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양심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 성경에서 주님으로 인해 거듭난 양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있는 나를 확증하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롬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또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고 했습니다.

성도의 양심이 갖고 있는 기능은 하나님을 찾아 가며,내 안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니,이 둘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신앙 양심이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고 진리를 위해 행동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신앙 양심을 따라 말하고 행하는 것은 진실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인해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유별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거짓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무엇입니까? 참과 거짓을 구별 못하는 자들의 비난의 소리,조롱의 소리,공격의 소리 입니까,아니면 내속에서 들려오는 신앙 양심의 소리입니까?

많은 자가 더 큰 소리로 우리에게 자신들의 소리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앙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합니다. ‘오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앙 양심을 따르지 못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잡히는 것을 보고 도망쳤습니다. 또 비자의 물음에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고 답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때 그의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 통곡하였습니다(마26:75).

이에 반해서 바울은 자신을 오해하고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를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대했다!"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가 교만해서 이렇게 담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천성이 본래 담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바울 안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게 하는 ‘신앙 양심’이 그것을 확증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크렌모 감독은 헨리 8세 때에 구교를 반대하고 종교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왕인 메리 여왕은 카톨릭 교인이어서 신교를 없애 버리고 구교로 하여금 영국의 국교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크렌모 감독에게 구교로 돌아오면 높은 지위를 하나 주겠다고 교섭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불응하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감옥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는 중에 어떤 사람을 시켜서 또 교섭이 왔습니다. 어떤 문서를 내놓으면서 여기 서명만 하면 무사히 석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문서를 읽어보니 자기의 주장과 비슷하므로 서명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 재판 때 검사 측에서 “그대는 구교로 돌아오겠다고 서명하였지?” 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깜짝 놀란 크렌모 감독은 일어나서 “내가 안한 그 성명서는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내 양심으로 그 성명서를 취소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화형을 받게 되어 불이 훨훨 타올라 올 때 그는 먼저 자기 손가락을 내밀어 태우면서 “이 손가락으로 그 성명서에 사인을 했었구나.”하면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뒤틀리고, 적대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우리는 신앙 양심이 말하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신앙인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가 전도한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과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을 양심이 증거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했다는 것은 욕심이나 이기주의를 떠나서 신령하고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했다는 것입니다. 진실함으로 했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진실한 마음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 또는 오해가 있더라도,사도로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행동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둘을 종합해 보면,바울은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의 복음 전도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을 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이 이처럼 정직과 성실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한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인들은 오히려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며 대적하였고 은혜를 원수로 갚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인간적인 계산에 따라 고린도 성도들을 대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대했습니다. 바울의 그들을 위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미국인들 중 링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합니다. 링컨은 `성실'과 `정직'과 `사랑'의 상징으로 통한다합니다. 미국인들이 링컨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얼굴에는 눈물과 고생과 땀의 자국이 역력하게 배어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또한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인류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합니다. 

링컨이 평생 동안 학교에 다닌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는다합니다. 그는 스무 살까지 손에서 도끼자루를 놓지 않았다합니다. 그의 손바닥은 항상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합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합니다. 

링컨의 직업은 매우 다양했다합니다. 노동자, 농부, 뱃사공, 장사꾼, 품팔이, 우체국 직원, 변호사 등이 바로 그것이라 합니다. 특히 성경연구는 거의 신학자 수준 이었다 합니다. 그는 다양한 직업을 통해 인생의 폭을 넓혔다합니다. '나는 일을 통해 항상 많은 것을 배운다. 열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일해서 정직한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 나의 인생철학이다.' 라고 말했다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가진 이가 현대에서 우리와 함께 산다면 세상은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정직과 성실함으로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금의 세상은 어떻게 여깁니까?
정직한 것은 손해 보는 것이라 생각하고,성실한 것은 우둔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오히려 피해를 입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슴 저리도록 아픈 현실은 세상의 이런 흐름에 성도들마저도 편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어느 때나 순수한 마음,정직한 마음,성실한 태도로 살아가야 할 성도가 편법의 달인이 되고,약삭 빠른 행동에 일등이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룩함과 진실함을 잃어버린 성도가 우리 중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성도들마저도 정직,성실,순수를 버리고 세상을 따라가게 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순수하고 성실하고 정직하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현실이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부당한 이익을 차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 정직하고 순수하게 행동한 자가 피해를 보는 경우도 부지기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과 순수를 버리고 나에게 이득 되는 것을 위해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며 방법을 짜냅니다. 계산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풋풋하던 정과 너그러움,그리고 정직함과 진실됨이 사라졌습니다. 머리 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무엇이 내게 이익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더 이익을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정직하고 순수한 태도로 사는 사람들을 위한 포상이 무엇이라 합니까?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시 15:5)라고 합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요동함이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뿐입니까?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고 합니다.

사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허락하시는 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잠 14:11)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행하는 자는 반드시 주께서 갚아 주십니다.

비록 세상에선 빼앗기는 것 같고,잃는 것 같지만 그것은 모두 잠깐의 일입니다.
우리가 계산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세상을 거스르며 살 때,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분명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신앙양심으로 정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어느 독실한 기독교인이 설렁탕집을 인수받아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설렁탕 집을 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집을 찾는 손님들을 예수님 대접하는 것처럼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주방장이 이전에 하던 대로 커피에 넣는 크림으로 하루 종일 팔 만큼의 설렁탕 국물을 미리 만들어 놓았습니다. 뼈다귀를 오래 우린 진국같이 보이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는 그 날 음식점 문을 닫고 문에 글을 써 붙였습니다.

“오늘 하루 쉽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을 예수님처럼 모시기로 하였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크림 국물을 설렁탕 국물로 속여서 대접하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설렁탕 국물을 모두 쏟아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양심적이고 신앙적으로 음식점을 경영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주위에 퍼졌습니다. 이 음식점은 대단히 번성하고 있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마치 죄지은 아담이 숲 속에 숨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진실하십니다. 죄를 용납지 않으시고 스스로 거짓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 앞에서 자신은 솔직하고 진실되게 행동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사람을 보지 못하시거나 용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돌이킬 때까지 길이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며 담대하게, 그리고 진실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다른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음을 양심이 증거하고 이것이 자기들의 자랑거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그의 하시는 역사를 따라 한 것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한 것은,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증거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의 지혜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고 합니다.
   
육체의 지혜는 세상적 또는 인간적 지혜를 말합니다. 육체의 지혜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지혜, 곧 자기 자신의 이익과 욕심, 그리고 편리에 따라 움직이는 지혜입니다.

‘육체의 지혜’란‘ 세상의 지혜’를 나타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 1:20)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전 2:6)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고전 3:19)합니다.

‘인간의 지혜’를 나타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고 합니다.

‘지혜는 헬라 철학의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고린도 교회에서 범람하던 것이며 그들로 하여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는 몸은 교회에 있지만 생각은 세상적 방법, 세상적 지혜, 세속적 욕심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적 지혜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는 말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곧 그는 성령에 의해 통제받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성령께서 가장 좋은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대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를 대비 하는데,특히 ‘은혜’(카리스)는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베푸는 사랑’을 뜻합니다.(고후 8.9장)

이 단어가 바울로 하여금 선교 활동에 적합한,사람이 되도록 할 뿐 아니라 또 그런 활동을 준비시킨 특별한 은사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특별한 신적 행위 혹은 선물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고 합니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주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배려를 뜻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상적 지혜가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는 사실을 양심이 증거 하는 것을 내세워 자신의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는 일꾼임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칭찬 하신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칭찬하셨습니까? 은혜로 행하는 자들을 칭찬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행 10:22)하며,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고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칭찬을 받거나 내가 나를 자랑 할 때에도 그 이유가 자기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게 아니라 은혜 안에서 행한 것 때문에 받는 칭찬과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리챠드 범브랜드 목사가 약 30명의 크리스천들과 함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라 합니다. 하루는 감옥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밀쳐 던져졌는데, 침침한 감방 속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갔다합니다. 감방 속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비밀경찰의 대위였습니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왔는지 너무나 의아해 하는 크리스천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합니다. 

얼마 전에, 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보내라고 했다합니다. 수줍어하며 자기의 사무실에 들어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져 있었다합니다. 소년은 입을 열어서 말을 했다합니다. “대위님, 당신이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에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에요. 나는 엄마의 생일이면 꼭 꽃다발을 사서 엄마에게 선물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 왔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당신이 우리 부모님을 체포해 갔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나에게 늘 가르쳐 주시기를,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나에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이 꽃으로 대위님의 애기들의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이 꽃다발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대위는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소년을 부둥켜안고 눈물로 울었다고 했다합니다. 그 후로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교회 설립 80 주년을 맞아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되 신앙 양심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며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며  감사 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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