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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유월절을 왜 안 지키는가? (막 14: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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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유월절을 왜 안 지키는가? (막 14:22-26)


(출12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했다. 유월절을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함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다. 유대인의 최대명절로, 예수님도 유월절을 지켰다. 
예수님이 마가 다락방에 계신 이유도,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며,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단 하나님의 교회는, 자신들은 유월절을 지키기에, 자신들이 진짜고, 지키지 않는 자들은 가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도,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도 유월절 양을, 잡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안상홍과,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장길자를 따르는 이단집단일 뿐이다. 그러면 왜 유월절을 우리는 지키지 않는가? 예수님이 유월절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했기에, 우리는 성찬을 행한다. 하나님이 지키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사람은 자기 임의로 중단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그림자인 유월절(골2:16-17)을 마감하고, 그 실체의 모습으로, 성찬을 제정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에, 종살이하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얻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구원은, 일시이었다. 유월절은 일시적인 구원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은, 영원한 실체이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어,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행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한다. 본문은 유월절이, 성찬으로 바뀌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월절을 마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유월절 실체 양으로 오셨다(요1:29). 

성찬의 내용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다. 유월절, 옛 언약의 막은 내렸다. 그 대신 성찬이 제정됨으로, 새 언약의 막이 올랐다. 본문은 이렇듯, 구약이 신약으로 바뀌는, 기념비적인 말씀이다. 

1.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유월절 음식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다(출12:11). 그 이유는 애굽에서, 빨리 나와야 했기 때문에 서서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관습이 바뀌어 자유인이 되었기에, 앉아서 느긋하게 기대어, 오랫동안 유월절 음식을 먹었다. 

따라서 그날 밤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시는 동안,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모두 다 씻으셨다. 제자들에게 귀한 가르침도 주셨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떡 한 조각을 양념(하로셋)에 찍어 주셨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요13:27下)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룟 유다는, 유월절 음식을 먹던, 다락방에서 나갔다. 그 곳에는 이제, 예수님과 열한 제자만 남았다. 그 때 예수님은 떡을 가지셨다. 물론 이 떡은, 누룩이 전연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이다. 

누룩이 전혀 없이 만든 무교병이니까, 부풀지를 않아서 딱딱하고, 모양도 편편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반드시, 이런 무교병을 먹었다. 당시에 떡을 만드는 방식은, 누룩이 들어간 반죽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어, 새로운 떡을 만들 때, 그 조각을 넣고, 함께 반죽한다. 
그러면 옛 조각의 누룩이, 새로 만든 떡을 부풀게 된다. 계속 이렇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과 바로 연결된, 무교절에,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었다. 누룩은 옛것을 이어받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유월절 행사에서 예수님은, 무교병을 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면, 가장은 떡을 들고 축복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드셨기에, 예수님이 축복하는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떡을 손에 들고, 축복했다.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를 드렸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 떡을 먹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이 복 주기를 위해 기도하셨을 것이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떡을 떼셨다. 본시 떡은 큰 모양으로 구워졌다. 예수님은 그 큰 떡을, 각 사람이 먹을 만한 크기로, 떼어 주셨다. 그때는 칼이 사용되지 않기에, 예수님은 손으로, 직접 떡을 떼어 주셨다. 

곧이어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받으라고 하셨다. 받아서 먹으라는 뜻이다. 그들은 다 한 떡에 참여하여, 한 몸이 되었다(고전10:17).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므로, 서로 화목해야 마땅했다. 여기까지는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와, 똑같다. 그러나 떡을 먹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유월절을 지키면서 먹는 떡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떡의 의미가 새로워졌다. 예수님은 떡의 의미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했다. (눅22:19中)에는, 좀 더 자세하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바로 성찬이, 유월절을 대신하게 되었다. 

성찬에서도 떡을 먹는다. 그러나 성찬에서 먹는 떡은, 무교병의 참 의미를 말한다. 그 어떤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심을 말한다. 성찬에서 우리가 먹는 떡은, 죄 없이 죽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한다. 성찬에서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그림자인 출애굽이 아니다. 
(눅22:19)에 예수님은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찬을 통해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실체인, 예수님을 기념함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은, 이런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떡을 주는 것과 같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몸을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성찬을 행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몸을 주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라.”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행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한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이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상하셨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 이렇듯이 우리는 성찬을 통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하나님이 약속하신 실체이신 예수님을 기념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주셨다. 
(찬31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렇게 우리도 몸을 드려, 기쁨으로 예수님께 헌신하자!  

2.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피를 흘리셨다(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제자들이 떡을 먹은 후에, 또 예수님은 잔을 가지셨다. (25) 말씀과 같이, 그 잔에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들어있었다. 
발효되었으면 포도주이고, 발효가 되지 않았으면 포도즙이다. 만일, 발효된 포도주였다면, 2배의 물을 넣었다. 포도주를 연하게 만들어서, 마시더라도 취하지 않게 했다. 그래야 유월절을, 경건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잔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하셨다. 그 잔을 마시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기도하셨을 것이다. 그 후에 그 잔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이때 예수님은 그 잔을 나눠서, 다른 작은 잔들에 따르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들고 계신 잔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돌아가면서, 모두 그 잔을 조금씩 마셨다. 유월절 만찬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지만, 예수님이 잔의 의미가 바뀌었다. 유월절 잔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좌우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유월절 양의 피를 뜻했다. 하나님은 유월절 피로,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기로 약속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 문에 칠해져 있는,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들의 집은 그냥 넘어갔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약속한 대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 여기서 유월절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유월(逾越, 踰越)은, 한자로, ‘넘을 유, 넘을 월’이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출애굽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시고, 그들의 집을 구원하심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잔의 의미가 달라졌다. 유월절 잔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여서 바른, 양의 피를 의미했다. 그러나 성찬의 잔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예수님의 피, 곧 언약의 피를 의미한다. 이처럼 예수님이 잔의 의미를 바꾸셨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채찍에 맞으며, 가시관을 쓰며,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며, 또 창에 찔리시면서, 자신의 피를 아낌없이 흘리셨다. 왜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나? 

(마26:28)을 보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신 목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예수님이 피를 흘리신 이유는, 죄 많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기 위해서였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흘리신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부르고 있다. 
(출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는, 피를 뿌려야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뿌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마다, 매번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히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렸기에, 이제는 더 이상 제물이 필요 없다(히9:12).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 짐승의 피로 세운 약속을, 옛 언약이라고 한다. 옛 언약은 계속해서, 짐승을 죽여야 한다.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한다.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새 언약은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드려서, 영원한 언약을 세웠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실체로,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를 흘릴 것이다. 너희는 내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피로, 하나님과 새 언약, 곧 영원한 언약을 세우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고전11:25)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이상 그림자인, 출애굽의 어린 양을, 기념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어린양의 실체이신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님을 기념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아낌없이 흘려 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다. 
아울러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 언약 곧 영원한 언약을, 단번에 세웠다.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11:25) 기념하라는, 기억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잊지 말고, 늘 기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자. 우리의 눈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귀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자. 우리의 손은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우리의 발은 예수님과 함께 걷자. 이렇듯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3.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오신다(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시며, 피를 흘리고 죽으실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제자들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을 주셨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하면서, 하시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그 이유는 제자들의 마음에, 확실한 소망을 심어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힘주어 말씀하시면서, 자신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유월절을 종결하셨다. 이때의 만찬을, 최후의 만찬, 곧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앞으로는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시면서,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말씀했다. 새롭게 예수님은, 성찬을 제정하셨다. 그러면 언제까지 예수님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는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이다. (눅22:18)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다. 

이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여, 다시 죽음도 없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때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다. 아픈 것도 없다. 그런데 신천지라고 하면서, 아픈 사람이 있고, 죽는 사람이 있는 곳은 가짜다. (마26:29)에, 그 때 예수님은, 다시 오시어 제자들과 함께 마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새로이 떡도 함께 드실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런 뜻으로 말씀했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니라. 내가 다시 와서, 너희와 함께 먹고, 마실 때가 있을 것이니라. 그러니 그때까지 계속해서, 나를 기억하며, 나를 기다려라.”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주신 예수님을, 늘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항상 기억하며 찬양해야 한다. 더 나아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언제나 기억하며, 소망한다.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전통적으로 유월절 음식을 다 먹고 나면, 마지막 순서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시편(113-118)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 돌렸다. (시118:22-23)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구절과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이 구절들은, 바리새인들과 천국에 관한 논쟁에서,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성찬을 마감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성찬을 마감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내의 다락방에서 나와서,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다. 

결론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거룩한 몸을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피를 흘리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오신다. 그때는 심판의 주로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구원이 여기에 있다고 하는, 가짜에게 속이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늘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 예수님은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 자매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은 (막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한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안으로는 서로 사랑하며, 밖으로는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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