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민 22:21-35)

첨부 1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민 22:21-35)

여러분은 하던 일이 자꾸 막히고 일이 뜻대로 잘 안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예를 들어 하던 사업이 자꾸 꼬입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일마다 잘 안될 때 어찌합니까? 

“왜 내 길이 막히고 일이 뜻대로 안되는가?” 고민하면서 해답을 찾아 보셨나요? 이럴때 우리 크리스찬은 어찌 해야 하나요?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왜 이다지도 어려움이 많은가?”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되나?”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이 아닌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   

물론, 문제의 원인이 내가 아닌 남에게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일종에 연단과 훈련일 수 있습니다.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시기질투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과는 별 상관없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이런 것은 자기가 원인이 아닌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크게 쓰시기 위한 계획으로 연단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포로로 끌려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나라의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신 결과로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니엘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막히고 일이 뜻대로 안 되는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원인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내게 있다고 알면 쉽게 해결책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생고생하며 가는 것입니다.   

왜 우리길이 막힐까요?

어떤 이유로 길이 막히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 욕심에 따라 가려할 때 길이 막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 모압 평지에서 오래 동안 기거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그 모압 땅에 들어올 때 그들의 길을 막는 족속이 있었습니다. 바로 살던 모압 족속입니다.   

그 모압 나라 왕의 이름은 ‘발락’이란 왕이었습니다. 그 발락 왕은 이미 이스라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근처에 아모리인들을 무섭게 몰살시킨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도 군사력으로는 그들의 길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찌할까 고민하고 연구하다가 한 가지 계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계책은 다름 아니라 당대에 유명한 선지자였던 “발람”을 불러와 이스라엘 나라를 저주하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죠? 그는 선지자가 저주하면 그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계책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발락 왕은 사람들을 보내어 ‘발람’ 선지자에게 자기 청을 들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대가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발람 선지자는 그 부탁을 한마디로 거절하지 않고 하루저녁 기도해보겠다는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기도꺼리가 아닙니다. 

일반 상식을 가지고도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도해보겠다는 것은 이미 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증거입니다. 그래도 기도해보니 하나님이 가지도 말라고 하시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12절을 다 같이 보세요.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결국 다음날 아침 발람이 일어나 그들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발락 왕은 포기치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더 신분이 높은 고관을 보내어 요청합니다. 
그때도 발람은 그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겠다며 기다리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발람의 마음이 이미 탐욕에 사로잡힌 것을 아시고 조건부로 허용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허용하시기를 했으나 발람이 이미 마음이 기울여져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인 것이 뻔하면 안 가야 하는데 어쩔 수 없다고 갑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길이 막히고 어려움을 당한 것입니다.   

21절 이하를 보세요. 

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22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길을 막아섰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판단력도 잃었고 도 그 길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길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사 많은 문제는 욕심이 원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선지자 발람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하려고 나선 것인가요?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는 기도해보겠다는 것일까요? 
욕심 때문입니다. 돈과 명예, 부귀와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안 그런가요?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런 짓을 하지 않나요? 말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범하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합니다. 
십일조 떼먹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떼먹고 있지 않나요? 
저녁예배 수요예배 빼먹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않나요? 
시대가 그러니 어쩔 수 없어......., 다들 피곤하니 어쩔 수 없어……. 

교회 중직자들도 그렇습니다. 장로도 권사도 안수집사도, 여전도 회장이고 부장이고 구역장이고 다들 괜찮겠지 하고 간단 말입니다. 자기 앞길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있는 것도 모르고 가는 것입니다.   

욕심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욕심을 부립니다. 만족이 별로 없습니다. 

그 길 길목에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사자가 있는지도 모르고 가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하나님이 원하는 길인지 원치 않는 길인지 그것도 분간 못하면 죽습니다.   

왜 길이 막히나요? 


2. 하나님의 뜻보다 내 형편을 앞세울 때 길이 막힙니다. 

발람 선지자는 모압 왕의 초청이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초청을 단호히 거절치 못했나요? 그것은 욕심이 첫째 이유고 두 번째는 형편 때문입니다. 어떤 형편일까요? 

당대에 선지자는 삶이 그다지 윤택하지 않았습니다. 궁색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 시대도 그랬습니다. 선지 생도부인이 엘리사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부르짖습니다.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종을 삼겠다고 합니다. 엘리사 밑에서 훈련받던 선지생도가 빚을 졌는데 그것을 갚지 못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빚쟁이들이 와서 아들들을 데려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사 시대도 선지자들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발람선지자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초청이 왔습니다. 그러니 그 초청에 응하면 엄청난 대가가 주겠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세요.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그러니 한마디로 거절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기도꺼리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고관들이 왔습니다. 16절~17절을 보세요 

16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17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그러니 또 기도해 본답니다.  

따라서 하세요. /우리의 기도 중에 / 기도꺼리도 아닌 것이 있다./ 

기도는 기도꺼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꺼리가 안 되는 것을 기도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편을 핑계 삼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치 않지만 허용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응답이 아닙니다. 내 고집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응답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착각하고 가면 그 길은 고난의 길이고 막히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혹독한 결과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발람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허락을 안했습니다. 
그런데도 두 번 요청하니 또 기도합니다. 첫 번째 안 된다 했으면 두 번째도 안 되는 것이잖습니까? 그런데 그는 기도하고 결국 조건부로 허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응답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형편을 핑계 삼아 주의 일을 내려 놓치 마세요. 
형편을 핑계 삼아 사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주시는 고귀한 직분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그 거룩한 사역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것일까요? 
왜 예배에 기도 맡은 분이 기도를 안 한 것일까요? 

형편 때문입니까? 능력 때문입니까? 형편이 안된다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기에 직분까지 내려놓는지 주님이 보고계십니다.   

능력은 누가 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주십니다. 
혹시 여러분 속에 있는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좀 더 편하게 믿자는 욕심, 그리고 남들 즐기는 여유 여가 나도 누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 포기한다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발람은 그랬습니다.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면 집안에 쌓여 있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일신의 평안, 명예, 형편, 이것 때문에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간다면,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이 핑계 저 핑계 댑니다. 
아직 때가 안돼서, 아직 남편이 안 믿어서, 아직 능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욕심과 탐심 때문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욕심과 탐심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세요. 왜 그들이 헌신하고 죽었지요? 
형편을 핑계 삼아 교회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그 결과는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문등병에 걸린 게하시를 보세요. 
그는 왜 문등병자가 되었나요? 나아만 장군이 가져온 예물을 받으면 형편이 풀릴텐데 주인이 거절합니다. 그러나 뒤따라가 거짓말을 하고 받아 옵니다. 탐심의 탈을 쓴 사람의 무서운 결과입니다.   

왜 길이 막히는 것일까요?


3. 내 영안이 어두우면 앞길이 막힙니다. 

발람은 탐심이라는 것 때문에 이미 눈이 어두웠습니다. 
영안이 어두우니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고집대로 갑니다. 발람은 하나님이 허락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갑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 길을 막으려고 나타났습니다.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을 막습니다. 그런데 발람을 태우고 가는 나귀는 그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는데 발람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귀도 보는 천사를 하나님의 종은 못보고 있습니다. 

결국 애매한 나귀만 채찍 매를 맞습니다. 그래도 나귀가 길을 이탈합니다. 그냥 가다가는 자기 주인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발람은 “이놈의 나귀가 미쳤나” 하면서 계속 채찍질합니다. 

그러다 좌우에 담이 막힌 좁을 길로 들어섰습니다. 나귀가 담벼락에 비벼대니 발람의 발이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자 막 채찍질하며 나귀 배를 걷어찹니다. 그래도 나귀는 그 여호와의 사자를 피하려고 하는데 이젠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귀가 엎드립니다. 이제 발람이 열이 날대로 났습니다. 이제는 지팡이로 나귀를 내려칩니다. “야! 너 죽고 싶어 환장했냐?”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은 안 되었으나 아마도 그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귀 입을 열어 말하게 합니다. 28절을 보세요. 

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그러자 발람이 큰소리칩니다. 29절 보세요.
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성도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솔직히 발람이 나귀를 향해 한 말은 누가 들어야 할 말입니까? 

“너 죽고 싶어 환장했냐?” 
이 말은 발람이 자신에게 해야 할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도 모르고 나귀를 향해 펄펄 뜁니다. 영안이 어두운 자의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죽을 줄도 모르고 그 길로 가려고 애를 쓰는 이 모습이 누구의 모습일까요? 
혹시 우리 모습은 아닐까요? 우리가 영안이 어두워지면 내가 할 말을 남에게 듣게 됩니다.  

요나를 보세요. 하나님 가라고 한 니느웨는 가지 않고 반대편 다시스로 도망칩니다. 풍랑을 만납니다. 배가 침몰직전인데도 배 밑바닥에 들어가 잡니다. 그때 선장이 내려와 야단을 칩니다. “자는 자여, 어찌하여 자느냐?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합니다. 이 말은 실상 누가 해야 할 말인가요? 선지자인 요나가 해야 할 말인데 지금 자기가 듣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를 도와 살려주려는 나귀를 향해 화를 내고 걷어차고 있는 모습은 우리 모습이 아닌가요? 목사가 “그리하면 안 돼요 그러면 큰일 납니다” 외치면 그 소리를 무시하고 고집부리며 가고 있지는 안나요?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연구하면서 재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하나님의 사자는 발람을 데리러 온 귀족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치 않았나요? 왜 하나님은 그들은 건들지도 않고 왜 발람하고만 싸우는 것일까요? 
분명히 모압 귀족들과 함께 가는 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하고는 상대도 않습니다. 

왜죠?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니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안 믿는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둡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 되면 그냥 두지 않고 길을 막습니다. 
교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을 많이 봅니다. 중학생들도 그짓합니다. 이놈들 하고 야단을 쳐도 꿈쩍도 안합니다. 요즘 애들이 무서워 말도 못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내아들이 끼어 있다 합시다. 그냥 갑니까? 그냥 갈 수 없습니다. 뭔말인지 깨달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길을 막을 때 그때가 복입니다. 하지 말라 할 때 그때가 복입니다. 

사업의 길을 막습니까?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세요. 
자녀의 길을 막으십니까? 그 길이 자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계속하려고 고집부리지 마세요. 내 고집을 꺾고 속히 돌아서는 것이 사는 길임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길을 막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것이 하나님의 막으심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발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탐심문제요, 하나는 영안이 감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하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탐욕, 탐심입니다.   

우리는 내 영적 눈을 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진다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면 단호하게 끊어 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내게 유익한 나귀, 내 생명을 살리려고 애쓰는 나귀를 걷어차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그리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막으실 때는 속히 포기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가려는 성도에게 천사까지 동원하시어 막으십니다. 

그런데도 고집을 부리면 결국 갈 수는 있을지 몰라요. 발림도 결국은 갔습니다. 고집을 부리니까 갑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도 비참합니다. 발림의 말년은 어땠을까요? 그는 가서 발락왕의 부탁대로 저주를 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이 강제로 발람의 입을 통해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결국 민수기31장 8절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왕들을 처형할 때 함께 처형을 당합니다. 비참한 말로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막고 있다면 깨닫고 포기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최일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