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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내 길을 가리라! (눅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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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길을 가리라! (눅 13:31-35)

<살려면 예루살렘을 떠나라!>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우리는 누가복음 13장 31-35절 말씀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큰 위기에 대처하시는 예수님의 단호한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살다보면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지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순간이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일하고 돈 버는 데에만 집중하다가 자녀문제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아이가 삐뚤어졌습니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정도로 비행청소년이 되어 있습니다. 한 평생 사노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와 같은 위기를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36세 된 남자가 골수암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렸습니다. 이미 폐에까지 전이가 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두 아들과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폐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수술이 성공할 확률은 절반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수술 전날 아내가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병상을 떠나면서 남편에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여보,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좀 쉬세요!” 그 때 남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는다면 앞으로 두 눈 감고 쉬는 일 밖에는 남아있지 않소. 나는 오랫동안 깨어 있고 싶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싶소!”

참으로 비장한 자세가 아닌가싶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 죽음을 코앞에 두신 예수님의 자세에도 이와 같은 비장함이 묻어 있습니다. 31절을 봅니다. 바리새인 몇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말했습니다. “여기를 떠나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여기 예수님께 찾아와 이런 경고를 하는 바리새인들은 누구일까요? 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반대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님의 주적들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피하려면 예루살렘을 빨리 떠나라고 경고하는 이 몇몇 바리새인들은 누구였고, 그들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기자는 바리새인 전체가 아닌 일부 바리새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안전을 걱정해준 비교적 호의적인 바리새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바리새인들이 준 경고는 분명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가는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니 예루살렘을 속히 떠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이들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32-33절을 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민다는 헤롯 임금을 여우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우처럼 교활하고 간교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땅을 파고 망대를 허무는 여우처럼 파괴만 일삼는 사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여우같은 헤롯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이것은 대단히 문학적 표현입니다. 오늘과 내일은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그동안 해 오셨던 것처럼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계속하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완전해진다”는 말은 제삼일에 가서는 모든 일을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제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날입니다. 평소에 늘 해오시던 그대로 귀신을 내쫓고 각색 질병을 고치시는 봉사사역을 계속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서 33절에서는 더욱 더 단호하게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가시겠다고 선언합니다. 어떤 시련과 역경이 기다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주저하지 않고 걸어가시겠다는 다짐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야 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져야 합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바리새인들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면 안 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전이 있는 성도(聖都)입니다. 놀랍게도 가장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할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차례로 죽였습니다. 나봇과 스가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죽음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수많은 선지자들처럼, 이제 예수님 역시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역시 한목숨 살겠다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이제 예수님은 34-35절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슬픈 탄식을 쏟아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여우냐? 암탉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러 예루살렘에 찾아온 선지자들을 죽인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이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몇 번이고 당신의 날개 아래 품으려 하셨던 사실을 상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미워하고 배척하면 나 역시 그를 피하거나 배척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해치고 죽이려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암탉의 심정으로 끊임없이 품으려 하십니다!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배척하는 사람을 끌어안습니다. 

여기 헤롯 임금은 ‘여우’같은 사람으로, 예수님은 ‘암탉’같은 분으로 비유가 됐습니다. ‘여우’와 ‘암탉,’ 참 기가 막힌 대조이지요! 우리는 포도원 망대를 무너뜨리는 여우가 되면 안 됩니다. 이웃을 해치는 교활하고 간악한 여우가 되면 안 됩니다. 끝없이, 끝없이 어린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는 암탉이 되어야만 합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덜컥 임신을 했습니다. 이때는 성도덕을 들먹이며 옳고 그름을 가르칠 때가 아닙니다. 암탉처럼 끌어안고 품을 때입니다. 사춘기 아들이 마약에 손을 댔습니다. 이때도 마약중독의 잘못을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없습니다. 새끼를 품는 암탉처럼 품을 때 마약을 끊습니다. 아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실수로 사고가 났습니다. 이때도 교통법규를 말하며 안전운행을 왜 못 했느냐고 훈계할 때가 아닙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주고 암탉의 심정으로 끌어안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여우같이 따지고 정죄해서 안 됩니다. 암탉같이 품을 때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용서가 놀라운 치유와 회복을 가져옵니다! 

어떤 TV에서 AIDS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들에 관한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의사들 가운데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환자들을 고쳐주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항상 도덕 선생이 되어 잘잘못을 따지고 일방적으로 정죄하는 의사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리려 하기보다는 죄를 저질렀으니 AIDS에 걸린 것이 당연하다는 자세를 보입니다. 암탉의 마음보다 여우의 마음을 품는 의사는 좋은 의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우처럼 교활하고 간악한 방법으로 당신을 죽이려는 헤롯을 비롯한 예루살렘 거민들을 암탉이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듯이 몇 번이고 또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당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시면 되지만 끝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예루살렘에 남아서 기꺼이 십자가의 수치와 수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났고 첫 번째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도 넘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죄 많은 예루살렘에서 기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죄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큽니다!
  

<나는 내 길을 가리라!>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니 예루살렘을 빨리 떠나라!” 참으로 살이 떨리는 무서운 경고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뜻은 단호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예루살렘에서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지만 죄와 죽음에 빠진 인류를 구할 수 있다면 예루살렘을 결코 떠나시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예수님은 주변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당신의 목적에 충실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에만 충실할 수 있다면 어떤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당당히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에서 남아공의 조시아 투과니 선수가 우승했습니다. 2시간 12분 36초의 기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봉주 선수는 불과 3초 차이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라톤 경기에는 모두 122명이 출전해서 111명이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마라톤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이 진행되었고 관중들도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이제 올림픽 경기의 폐회식을 준비하기 위해 관악대가 리허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10번째 선수가 들어온 지 1시간 30분이 지난 시간에 111번째 선수가 트랙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압둘 베사르 와시키 선수였습니다. 그는 왼쪽 허벅지와 종아리를 압박붕대로 동여맨 채 절룩거리면서 경기장에 들어섰습니다. 

4시간 24분 17초의 기록으로 올림픽 사상 가장 늦은 기록이었으며, 1등과도 2시간 11분 11초의 차이가 나는 형편없는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을 대표해서 와시키 선수는 끝까지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결국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 와시키 선수에게 사람들은 뜨거운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나는 내 길을 가리라!”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결단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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