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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정원 가꾸기(2) (잠 4: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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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 가꾸기(2) (잠 4:20-27)

어떤 스승이 꽃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바구니인가?” 제자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꽃바구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스승은 바구니에서 꽃을 들어내고 생선을 가득 담고서 다시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바구니인가?” 이번에도 제자들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생선 바구니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줍니다. “맞다. 똑같은 바구니이지만 꽃을 담으면 꽃바구니요, 생선을 담으면 생선바구니이니라.” 
  
여러분,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거기에 큰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를 부르는 말이 달라집니다. 마음의 바구니에 욕심으로 가득 채우면 그 사람은 욕심꾸러기가 됩니다. 마음의 바구니에 미움으로 가득 채우면 그 사람은 결국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마음의 바구니에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 그 사람은 사랑의 사도가 되고, 마음의 바구니에 행복으로 가득 채우면 그 사람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우리 마음을 정원에 비유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란 책을 쓴 고든 맥도널드 목사님은 우리 마음을 정원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정원에 오셔서 산책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 마음의 정원에 잡초가 가득하여 아름다운 정원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오시기 꺼려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우리 마음의 정원을 잡초더미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정원에서 잡초들을 뽑아내는 것 뿐만 아니라, 잡초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라는 잡초들에는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등이 있습니다. 

그런 잡초들은 모두 우리 마음에 잡초의 씨앗들이 뿌려져서 자라는 것들인데, 우리 마음의 정원에 그런 잡초들이 자라도록 뿌려진 씨앗들이 바로 ‘정욕, 탐욕, 자만심, 미움, 이기심, 어리석음, 무지’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씨앗들이 우리 마음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으셨던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과 은혜가 가득할 때 우리 마음의 정원에는 잡초의 씨앗들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니시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기 위해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을 더럽히는 것은 비단 죄악의 씨앗들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을 더럽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세상에서 날아든 온갖 먼지들입니다.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김매기를 해주고 잘 관리를 한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화초와 정원수에 온갖 먼지들이 가득 쌓여있다면 그 정원은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도 세상의 온갖 먼지들이 날아와 아름다워야 할 정원을 더럽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정원에 날아든 먼지들을 날마다 제거해야 합니다. 
  
여러분, 곤충 가운데 가장 맑은 눈을 가진 곤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파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파리는 앞 두 다리로 끊임없이 얼굴을 비벼댑니다. 그런데 사실은 얼굴을 비벼대는 것이 아니라,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눈을 비벼대는 것이라고 합니다. 눈을 비벼대며 닦아내는 것입니다. 파리의 눈은 여러 개의 눈이 합쳐진 겹눈입니다. 

그러면 파리의 겹눈 하나에는 몇 개의 낱눈이 모여 만들어진 것인지 아십니까? 무려 4000개의 낱눈이 벌집 모양으로 합해져 겹눈 하나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4000개의 낱눈이 합해져 만들어진 겹눈이기 때문에 그 눈앞에 작은 먼지가 하나라도 끼게 되면 눈앞에 있는 먹잇감이 여러 개로 겹쳐보여서 먹잇감을 사냥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협하는 적의 모습 또한 여러 개로 겹쳐 보여 많은 적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파리는 4천 개나 되는 낱눈 하나하나에 먼지나 티가 묻지 않도록 매순간마다 깨끗하게 닦아야 합니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눈에서 먼지를 닦아내는 것입니다. 

파리가 맑은 눈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눈에서 먼지를 닦아내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먼지를 닦아내고 제거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 마음의 정원에 들어오는 먼지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아가려 하는 우리의 마음에 자꾸만 세상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가치관의 먼지가 날아 들어와 우리 마음의 정원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 마음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그래서 세상의 욕심에 따라 살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의 정원에 세상의 먼지가 날아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자꾸만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립니다. 무엇이 천국백성답게 사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판단하지 못하도록 세상의 가치, 세상적인 생각이라는 먼지들이 우리 마음의 정원에 끊임없이 날아 들어옵니다. 

우리가 매일 얼굴을 씻어도 밖에 잠깐 나갔다가 들어오면 얼굴이며 옷에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것처럼, 세상에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먼지들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들어와 우리의 마음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게 씻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5: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 날아 들어온 먼지를 깨끗하게 씻는 방법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을 거룩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명예나 자존심도 지켜야 합니다. 또 우리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나 남을 험담하는 말 등을 하지 않도록 우리의 입술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오늘 설교에 맞게 바꾼다면 우리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게 지키면 우리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지켜집니다. 깨끗한 마음에서 더럽고 추한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만 깨끗하게 지키면 우리의 행동 역시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본문 20-2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들어야 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 말씀을 우리 눈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하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자주 들어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을 주관하게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덧칠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젊은 목사가 탄광촌을 방문하여 갱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두울 뿐만 아니라 온갖 탄가루로 더러워진 갱도를 따라 들어가다가 통로 한쪽에 아름답고 하얀 꽃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둡고 먼지투성이인 갱도 안에 어떻게 저렇게 예쁜 꽃이 필 수 있을까’ 궁금하던 차에 한 광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시커먼 탄광에서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이 힐 수 있습니까?” 그러자 광부가 웃으며 말합니다. “탄가루를 그 꽃에 뿌려보십시오.” 젊은 목사는 광부가 시키는 대로 손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탄가루를 한 움큼 쥐어서 꽃잎에 뿌려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탄가루는 꽃잎에 닿자마자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꽃잎에는 탄가루가 전혀 남지 않았습니다. 꽃잎이 매끄러웠기 때문에 탄가루가 꽃잎에 붙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온갖 먼지들이 우리 마음의 정원에 날아 들어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갱도 안에 있는 꽃처럼 세상으로부터 날아 들어오는 먼지들이 달라붙지 못하도록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악된 마음은 세상의 먼지들을 더 끌어들입니다. 온갖 세상의 죄악의 먼지들을 다 뒤집어쓴 채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말씀으로 코팅하면 세상의 먼지들이 우리 마음에 달라붙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말씀으로 코팅해야 합니다. 말씀의 방수제를 마음에 뿌려 세상의 먼지들이 우리 마음의 정원에 달라붙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먼지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보다 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말씀에 주의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우리 눈에서 떠나지 못하게 해야 하고, 마음속에 그 말씀을 간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 마음의 정원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되려면 우리 마음의 정원의 날아 들어오는 세상의 죄악된 먼지를 차단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 날아 들어오는 먼지를 제거하는 청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먼지들이 날아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 날아 들어오는 세상의 먼지를 차단하는 방법은 침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인도 캘커타의 성자인 마더 테레사(Mother Theresa, 1910-1997)의 가르침과 말씀들을 앤서니 스턴(Anthony Stern) 박사가 정리해서 엮어 낸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마더 테레사는 다섯 가지 침묵에 대해서 말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경건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더 테레사가 말한 첫 번째 침묵은 입술의 침묵입니다. 꼭 해야 할 말 외에는 자제하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악하고 부조리한 세상의 모습들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안타까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많습니다. 정치인들의 모습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하려면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내 경험 이야기, 내 생각과 감정에서 나오는 말들도 하고 싶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심지어 암묵적인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는 먼저 입술이 침묵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입술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말을 통해서만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내가 한 말에 의해서 더 많은 영향력을 받습니다.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그 부정적인 생각을 입술을 통해서 내뱉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침묵은 마음의 침묵입니다. 마음의 침묵이라는 것은 내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술의 침묵이 외적인 침묵이라면 마음의 침묵은 내적인 침묵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서 얼마나 자주 요동치는지 모릅니다. 작은 사건이나 문제 앞에서 수시로 마음이 요동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의 침묵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언제나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궁극적인 지혜를 깨달은 전도자는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낫다.’(전도서 4:6)고 설파합니다. 내가 두 손에 가득 움켜쥐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수시로 변하는 세상을 움켜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어도, 심지어 두 손으로 세상을 움켜쥐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람을 잡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 내 손에서 빠져 나가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두 손에 세상의 것을 다 움켜쥐고서 언제 빠져 나갈지 몰라 불안해하는 것보다, 한 손에만 쥐고 있다 하더라도 세상의 변화에 동요하지 않고 마음이 평온한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좀더 둔감해져도 괜찮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합니다. 그런 세상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려다 보니, 세상 변화의 속도에 맞추기 못해서 늘 불안해하며 사라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도록 요구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마음의 침묵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스마트폰, 텔레비전, 인터넷, 그런 세상의 변화를 너무나도 빨리 알려주는 것으로부터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 마음의 정원에 하늘의 고요함이 찾아와 깃드는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침묵은 눈의 침묵입니다. 눈의 침묵은 우리의 눈으로 보면서 등급을 매기고 평가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평가합니다. 그 평가의 기준은 언제나 나 자신입니다. 내 생각과 내 주관에 따라서 평가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예쁜 사람과 못생긴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 사람이 정말 그런지도 모른 채, 우리 스스로 ‘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저 사람은 불행해’ 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출세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가려 합니다.
  
눈의 침묵을 통해 평가하는 것을 멈춘다는 것은 우리 눈이 평가한 것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눈이 언제나 좋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분명하게 들어오는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는데, 그것이 때로 우리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처음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의식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유혹을 받고 난 후 선악과를 바라보는데, 이전과 너무 다르게 보였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눈이 하라고 시키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눈의 침묵을 통해서 판단을 유보하면 세상을 훨씬 더 행복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과 친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26절에서 말씀합니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하게 하라.” 내가 가야할 바른 길만 보며 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눈을 유혹하는 세상의 것에 눈길 주지 말고, 우리가 가야할 곧은 길만을 보며 가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침묵은 귀의 침묵입니다. 들어도 듣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남을 험담하는 말을 할지라도 듣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소문이 들릴지라도 듣지 않는 것처럼 평온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소리들은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우리의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우리 마음의 정원을 더럽히는 쓰레기들에 불과합니다. 
  
오늘 주보에 제가 이런 글을 써놓았습니다. 글랜 힐슨(Glann Hilson)이라는 영성신학자는 ‘우리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로, 너무 바쁘게 사는 것과 너무 시끄럽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까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침묵하며 하나님과 대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소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동차의 경적소리만 소음이 아니라 계속 켜져 있는 텔레비전의 소리, 인터넷이나 신문에서 들려오는 세상 돌아가는 소리, 친구들과 떠들며 대화하는 소리, 스마트폰에 취해 거기에서 들려오는 온갖 정보의 소리 등 우리의 귀를 시끄럽게 만드는 소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정원을 지저분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귀를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의 정원에 찾아오셔서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침묵은 정신의 침묵입니다. 정신의 침묵은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이 솟구치는 거짓되고 가식적인 생각들, 파괴적이고 욕망에 끌리는 생각들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정신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놀랍고 풍성하신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정원에는 늘 아름다운 꽃이 핀 멋진 정원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침묵은 우리 마음의 정원에 먼지가 날아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비닐하우스와 같습니다. 
미국의 카톨릭 신부이자 작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 쓴 ‘침묵의 기도’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때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형제들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해 줄 때 
침묵은 자비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나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에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더라도 타인에게 영광이 돌려지도록 내버려 둘 때 
침묵은 겸손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이 있기 위해 세상의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침묵은 믿음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그 침묵은 경배입니다. 

그 분만이 내 마음을 이해하시면 족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고 그분의 위로를 갈망할 때 
십자가의 침묵처럼 잠잠히 그분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길 때 
침묵은 기도입니다.

여러분, 침묵은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는 시간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놓는 가장 정확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침묵은 우리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최상의 방법 중 하나입니다. 침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최선의 방법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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