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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 (마 13:18-25)

첨부 1


하나님의 나라 (마 13:18-25)


I. 천국

사람들이 나이 들고 늙어 가면 평준화 과정을 겪는 답니다. 
50이 넘으면 잘 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이나 비슷해진답니다. 
미모의 평준화입니다. 
60이 넘어서면 다 같이 건망증으로 깜박 깜박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지식의 평준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70이 넘어서면 모두 야채에 보리밥 좋아하고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같아지는 먹는 것 부의 평준화 현상이 옵니다. 
80이 넘어서면 모두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건강의 평준화가 옵니다.
저희 교회 90이 넘으신 어르신들은 젊은이 못지않게 말고 예배드리고 교회봉사하고 섬기는 삽니다. 
90, 100세가 넘어서면 산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그게 그거랍니다. 
생사의 평준화입니다.

비교에 시달리고 차별에 열등감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은 눈물도 고통도 가난도 질병도 없는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건설할 수 있는 세계 – 천국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 옛날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워하던 천당개념 –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밤도 두려움도 없고 다시는 저주가 없는 천국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복음서, 특별히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천국은 예수님 선포의 중심주제였습니다. 
마태복음 4:17입니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가복음 1:15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어떨때는 천국이고 어떨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란 단어를 가능한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 천국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들에겐 훨씬 더 지성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하늘은 오히려 귀신이 우굴거리는 곳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16회)과 누가복음(32회)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48회나 나옵니다만 천국이란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엔 3번만 하나님의 나라로 기록되었고 30회이상 천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3대요소를 국토와 국민과 주권으로 배웠습니다. 
국토가 있고 국민도 있지만 주권이 없는 것을 식민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의 가장 큰 뜻은 주권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홍정길 목사님의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저는 황금길을 걷는다고 할적마다 참 기분이 좋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황금이 신입니다. 돈이 하나님입니다. 그런 인생을 향해서 예수 믿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황금같은 것은 발로 깔아 뭉게면서 걷는 존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분좋고 통쾌합니까? 생각만해도 신이납니다. 이 세상에서는 돈이 신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에게 천국에서는 발로 밟고 다니는 아스팔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그것들을 쫓아 살 인생이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가장 중요한 뜻은 빛나는 보석집이 아닙니다. 황금길이 아닙니다. 열두 진주 대문이 아닙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길은 천국의 왕이 되신 우리 주님의 다스림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주께서 다스리는 곳입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지옥을 생각할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펄펄 끓는 유황불, 
그 속에서 죽지못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연상됩니다. 

성경이 또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황불이, 그 뜨거운 불이 지옥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사실 그 불 속에 있어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느브갓네살의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옥일 수가 없습니다. 

II. 비유와 그 목적

예수님께서 하늘의 언어와 개념을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가르칠 때 종종 비유로 설명하곤 하셨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13장은 7-8개 달하는 천국비유로 꽉 차 있습니다. 

13장 34절에 예수께서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 비유가 아니면 아예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말씀도 나옵니다.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 말씀을 가지고 아예 성경 전체가 비유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 특히 천국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단들이 모든 성경을 비유로 해석하면서 예수님이 하시듯 성경 말씀을 자기 자신들에게로 연결하다 보니 자기가 구세주가 되고 하나님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가르치고 천국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서 말씀을 자신에게로 연결했지만, 인간 그 누구도 예언의 말씀을 자신에게 연결할 수 있는 권세나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장엄한 계시를 인간들에게 전하는데 있어 우리가 친숙한 것, 
우리가 경험해서 익히 알고 있는 것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땅에서 가르칠 때에 땅의 것들을 들어 설명하면 쉽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쓰셨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첫째, 듣는 사람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의사 교환을 할 때는 항상 전하는 자는 듣는 자를 생각해야 되고, 듣는 자는 전하는 자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오해 없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오해가 생기는 것은 각자 자기 코드를 가지고 들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코드로 상대방의 표현을 이해하는 좋은 예가 개와 고양이의 경우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만나면 툭하고 싸웁니다. 왜냐하면 개와 고양이는 서로 사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는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웃지 않습니다. 대신 꼬리를 올리고 흔듭니다. 기분이 좋다는 표현입니다. 개가 짖을 때도 기분이 나쁘고 두려워서 짖는 것과 기분이 좋아서 짖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감추고 짖으면 사납게 보이고 반대로 꼬리를 올리고 흔들면서 짖으면 부드럽게 보입니다.  

고양이는 개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땅으로 축 쳐집니다. 반대로 경계를 할 때는 꼬리가 올라갑니다. 개와 고양이가 서로 만나서 개가 기분이 좋아서 꼬리를 흔들면서 프로포즈하면 고양는 ‘이 개가 나한테 감정 상했나? 왜 꼬리를 세우고 그러지?’ 하면서 개를 경계하고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개는 ‘나는 같이 놀자고 하는데 저게 왜 야옹하며 이빨을 드러내고 사납게 굴어? 한 판 하자는 거야?’ 하면서 꼬리를 아래로 쳐지게 합니다. 이처럼 개와 고양이는 사인이 너무 다릅니다.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땅에서 말씀하실 때, 영원의 이야기를 시간 안에서 이야기 하실 때, 인간이 경험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을 인간 세상의 이야기로 하려 할 때에 바로 인간 중심으로 설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비유로 말씀하신 두 번째 목적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4절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1절에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곁에 늘 따라다니던 무리들과 제자들이 의아심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온 백성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야라면 왜 대적들이 예수님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왜 그토록 율법을 잘 아는 율법사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메시야를 반대하지? 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거절할까? 
메시야가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면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에 문제가 있나? 
아니면 말씀을 받아들이는 백성들에게 문제가 있나? 

이에 대해 성경은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백성들의 의구심을 해소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네 가지 밭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씨 뿌리는 분은 예수님, 씨는 예수님이 전파하신 천국의 말씀.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씨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씨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천국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씨가 떨어진 밭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밭은 성령을 거역하는 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받고 똑같은 메시야를 만났는데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밭들도 있습니다. 

셋째, 비유로 말씀하신 세 번째 목적은 재미있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설교 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설교자가 짓는 죄가 하나 있는데 재미없게 설교하는 것이다. 재미없는 설교는 죄다.” 개그를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무조건 웃겨야 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김집사가 계속 졸고 있어서 목사가 신경이 쓰여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집사 옆에 있는 이집사에게 “이집사님, 혼자만 설교 듣지 말고 옆에 있는 김집사 좀 깨우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집사가 김집사를 흔들어 깨우며 속으로 투덜대기를, “목사님이 재워놓고 나보고 깨우라고 그러네.”
비유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줍니다. 분명하고 선명해서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유설교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III. 천국 비유

성경에 천국에 관한 많은 비유들이 있지만 마태복음 13장에는 일곱 내지 여덟 가지 비유가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천국! 이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말만 들어도 입가에 미소가 흘러넘치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인간의 언어 가운데 최고로 아름다운 말은 천국인 것 같습니다. “천국 같다”고 하면 최고의 극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천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도 나는 천국에 갑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당당함이 있고 배짱이 있고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천국 하면 어떤 사람은 죽어서 가는 곳으로만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현실적인 천국을 경험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만 치우치고 강조하면 비성경적인 관점이 됩니다. 

한때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천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죽어서 가는 천국, 종말론적인 천국에만 관심을 가지고 시끄럽게 하더니, 이제는 천국은 이 지상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천국에 대해 말할 때에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도대체 현실적인 천국은 무엇이며, 죽어서 가는 천국은 무엇인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는데 낙원은 무엇이며, 죽으면 땅에 들어가는 육신은 어떻게 되는가? 천국에 들어가는 영혼은 어디에 머무는가? 영혼이 있는 곳은 금성인가 토성인가 목성인가? 

천국에 대해서는 성경에 수학공식처럼 딱 떨어지게 설명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해 딱 떨어지는 설명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수학공식처럼 딱 떨어지게 설명하면 사람들이 신통해서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애매하게 기록해 놓았으면 애매한 게 진리입니다. 애매한 것을 딱 떨어지게 바꾸어 설명하면 그것이 이단이 됩니다. 성경에 모순되게 기록되었으면 모순된 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갖다 맞추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고 100% 인간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완벽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가 어디 있는가? 
또 삼위일체, 셋이면 셋이고 하나면 하나지,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 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첫 번째 비유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설명하는 주석가가 많이 있습니다. 또 씨앗 비유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4가지 밭 비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천국 비유의 일부라고 한다면 이 비유는 좋은 땅 비유, 옥토 비유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이 비유가 천국 비유라고 한다면 가라지가 어떻고 길가가 어떻고 흙이 얕은 돌밭이 어떻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좋은 땅이 되라는 것입니다. 
좋은 밭이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땅 비유 혹은 옥토 비유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의심받고 거절당하고 천국논쟁의 가운데 서시고 충돌을 경험해야 되는 예수님, 그분이 전했던 천국복음이 도전받고 의문시되어지고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버려 시시해 보이지만 그 복음을 받아들인 옥토에서는 커다란 결실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목적입니다. 바로 당신들을 통하여 천국 복음은 반드시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하고 예수를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을 거부하지 말라. 씨를 잘 받아들여라. 천국 복음을 잘 받아 들여라. 너는 천국의 열매를 보게 되는 옥토라는 말입니다. 

좋은 땅이라고 할 때 “좋은”(칼로스)은 자연이 아름다울 때, 도덕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성품이 아름답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란 기름지고 수분이 적당하고 햇볕이 잘 드는 땅, 잡초 같은 불필요한 것들이 잘 제거된 땅을 말합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의 4분의 3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토에 떨어진 4분의 1이 잃어버린 4분의 3을 채우고도 넉넉히 남고, 그것이 또 다른 밭에 떨어지는 씨앗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소 30배, 어지간하면 60배, 잘 자라면 100배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좋은 땅, 옥토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가라지가 끊임없이 뿌려지고 내 마음에 세상적인 것들이 들랑거려 나도 모르게 길가밭이 되고, 염려 근심 쾌락 욕심 등이 가시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밭을 옥토로 간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옥토가 되었을 때 오는 복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말씀의 씨앗이 떨어질 때마다 말씀이 잘 받아들이는 마음밭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말씀이 귀에 잘 안들어 오면, “주여, 내 귀가 저주를 받았나입니다. 내 영혼의 밭을 옥토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며 눈물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땅이 좋아서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금방 뿌리를 내리는 영혼의 밭은 복되다 하는 것입니다. 가시가 없어서 한번 자란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 마음밭이 얼마나 복된 마음밭인가? 내 영혼에 가시가 없게 하여 주옵소서. 걸핏하면 변덕부리고 시험드는 일이 없도록 깊이 있고 영양가 있는 마음밭이 되게 하여 주소서. 기도하십시오. 

쉽게 설명할까요? 
설교를 듣는데 설교가 재미있고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면 지금 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가 행복하고 은혜가 되면 내 영혼이 지금 복을 받고 있구나. 천국에 살고 있구나.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IV. 천국의 세 차원

마태복음 13장 씨앗에 관한 비유가 3가지 정도 등장하는데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 비유들을 살펴보면 천국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집니다. 소위 천국의 세 차원입니다. 

구원이 무엇인가를 비유적으로 설명할 때 흔히 출애굽사건을 들어 설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출되었습니다. 해방되었고 이미 자유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과거형 구원입니다. 광야를 여행하며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갈등을 겪어야 되고 고민해야 되고 피를 흘려야 됩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노정, 곧 현재적 구원입니다. 이 사람들이 언젠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미래적 구원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사탄의 영향력을 떠난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에서 이미 호적을 파낸 것입니다. 이는 과거형 구원입니다. 이제 신분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천국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이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의 발은 이 세상을 디디고 살아갑니다. 거기엔 커다란 영적인 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승리는 보장되어 있지만 때로 피 흘리는 싸움을 날마다 계속해야 합니다. 이는 현재적 구원입니다. 구원은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개인에겐 종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는 날 하나님 곁에서 눈을 뜹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온전한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는 미래형 구원입니다. 

천국에도 이처럼 구원의 세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천국은 이미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공간적으로 이 지상에 천국이 임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씨앗이 이 땅에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내 안에 이미 천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내 안에 천국이 임했기 때문에 내가 오늘 죽어도 눈 뜨면 천국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형 천국, 이미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둘째, 천국은 현재 내 안에서 이루어져 갑니다. 현재적 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죄악과 모순이 가득한 세상 한복판에서 내가 고통과 고난을 당한다 해도 내 안에 이미 시작된 이 천국을 빼앗을 자는 없습니다. 간단없는 영적 전쟁이 끊임없이 내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적 천국입니다. 

셋째, 천국은 추수의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 완성의 날이 언제인지는 아버지만 아십니다. 미래적 천국입니다. 

천국은 캔(can) 제품처럼 완제품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천국은 말씀의 씨앗으로 임합니다. 그래서 농사가 필요합니다. 그 씨앗이 옥토에 떨어진다고 해서 룰루랄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얘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같은 밭에서 가라지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가라지와 함께 살고 가라지와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가라지같은 백성들과 공존하는 아픔을 마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V. 가라지를 뽑을까요?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던가요? 예수 믿으면 병도 들지 않고 아픈 것도 없던가요? 예수 믿으면 죽지 않고 바로 하나님 나라로 바로 올라가던가요? 오히려 오래 살아야 될 사람은 빨리 죽고 죽었으면 하는 사람은 오래 삽니다.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핍박을 겪고 악한 사람이 오히려 형통합니다. 이 땅에서의 천국은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곁에 악이 소멸되고 선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악이 공존합니다. 심지어 구원 받은 사람 안에서도 끊임없이 선과 악이 싸우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도 언제나 행복과 불행이 공존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행복과 아픔이 공존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도 기독교 국가에서도 여전히 악은 존재합니다. 

큰 한숨을 쉬며 예수님께 정말 물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 왜 그런가요?”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27절) 이 질문은 오래된 신학적 질문입니다.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왜 악이 승리하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악으로 인하여 시달림을 당해야 하는가? 인류는 지금껏 이와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해 왔습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니라”(28, 38-39절) 

예수님이 뿌린 천국 씨앗과 마귀가 뿌린 가라지는 참 비슷합니다. 밀밭에 고구마를 심었다면 당장 골라낼 수 있습니다. 보리밭에 참외를 심으면 금방 골라낼 것입니다. 벼를 심은 논에 수박을 심으면 금방 구별해 냅니다. 

이단은 머리부터 다른 것이 아닙니다. 들어가 보면 더 반듯해 보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진리대로 살려고 몸부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예수를 헛 믿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단(異端)은 ‘다를 이’(異), ‘꼬리 단’(端)자를 쓴다. 머리는 같지만 따라가다 보면 꼬리가 달라집니다. 같은 길 같고 옳은 길 같아서 따라가다 보면 꼬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서 결국 지옥으로 가고 맙니다. 

마귀는 양의 가죽을 쓴 이리 떼입니다. 천국의 자녀들과 같아 보입니다. 때로 더 신앙적이고 더 기도를 많이 하고, 더 충성하고 봉사도 확실하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분이 전통교회가 이단들이 가진 열심만큼 열심을 내면 세상을 벌써 뒤집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성도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고 교회의 약점을 비판하고 자기들만 의롭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 마귀가 까만 망토를 쓰고 덧니 아래로 피를 뚝뚝 흘리며 보기도 흉한 뿔을 달고 낄낄거리며 나타나면 어느 누가 그를 천사로 여기고 넘어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귀는 가장 신앙적이고 아름다운 것처럼 가장합니다.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칼날을 감추고 무서운 발톱과 이빨을 숨기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백성인 양을 찢어서 지옥으로 함께 데리고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라지를 사탄의 자식이라고 단호히 선언하십니다. 심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자기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질타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의 자녀가 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가라지와 함께 살아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악랄한 가라지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공통된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원수들을 손 좀 봐주시지! 하나님의 백성, 천국을 해치는 저 가라지를 뽑아 버리면 될텐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두시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28절) 하고 묻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유대 땅에서 로마인들을 뽑아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라는 예수님이 로마인들을 뽑아낼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라지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그를 메시야라고 믿을 수 있는 유대인들은 없어 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세리와 창기 그리고 온갖 죄인들을 뽑아내고 율법이 이루어지는 왕국, 곧 유대교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광야에 숨어 깨끗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던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아예 알곡들을 저 유토피아의 세계로 데리고 가서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던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의 악한 자들과 교회를 괴롭히고 하나님의 백성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손 좀 봐 주시길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30절) 예수님의 말씀은 농사 상식과 너무나 다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농부들의 상식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농사 상식에 의하면 가라지는 일찍 뽑아줄 수록 좋다. 그래야 알곡이 잘 자라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추수 때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왜 추수 때까지 두라고 말씀하셨을까?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절) 하나님은 100개의 가라지보다 한 알의 알곡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초점은 언제나 알곡에 있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그 가라지가 어떻게 생겼느냐? 그것이 뭘 하느냐? 그것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알곡을 하나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내가 택한 백성은 하나도 잃고 싶지 않다는 것이 우리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벼락이라도 쳐서 악을 멸하시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내를 통하여 의인을 연단할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해 멋진 알곡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더욱 긴장된 삶을 살아가게 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며, 그것은 내가 더욱 나 자신을 돌아보며 순수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예수님을 닮아 가게 해 줍니다. 가라지가 오히려 기도하게 만들었고, 기도하는 가운데 내 성품이 예수님을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청어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런던까지 그냥 싣고 오면 오는 사이에 많은 청어들이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싱싱한 청어떼를 공급하기 위해 청어떼 속에 천적인 바다메기나 숭어 한 두 마리 넣어두면 그 청어들이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바싹 긴장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도망 다니다 보면 죽을 시간이 없어서 살아서 육지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자라도록 허용된 가라지가 언제까지 내 곁에서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악으로부터 공격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추수 때가 있습니다. 이 추수 때는 종말의 때이며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39절)

악은 영원히 승리하지 못합니다. 또 영원히 우리 곁에 존재하지도 못합니다. 
종말은 반드시 오고 악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천사들을 시켜 실수 없이 가라지를 모두 거두어 풀무불 속에 사르겠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시니 내 손으로 심판하고 싶은 마음은 접어야 합니다. 급한 성격 탓에 내가 심판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심판이 아니라 오늘도 부지런히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심판하다보면 자칫 알곡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천사들의 심판 심부름에는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알곡은 단 한 톨도 실수 없이 곡간에 들어갈 것입니다. 가라지는 단 한 줄기도 실수 없이 지옥불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지옥이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상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천국이 실재하듯이 지옥도 실재합니다. 지옥은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세상 살아가다가 어떠한 어려움에 처하든지, 어떠한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살 수 있습니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기도해야 합니다.  

미래의 추수 때는 천국에 속한 자에겐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에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심판의 날,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저는 길지않은 삶을 살았는데 2-3번정도 죽음의 길목까지 갔다온 경험이 있습니다.

어린시절 우리 어머니가 눕혀 놓았는데 아이가 그냥 죽었더래요. 
붙들고 엉엉 우는데 얘가 와앙~ 울더랍니다. 제가 기억은 못하지요.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5-6학년때쯤 되었을까요? 학교갔다 왔더니 큰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친구들 3-4명이 끌어안아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우리동리의 가장 큰나무 중 하나가 우리집 감나무였습니다. 감나무에 올라가서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큰집 형들이 감나무의 감을 모두 땄습니다. 그런데 꼭대기에 맛있게 영글은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그게 아까웠습니다. 내가 저걸 따야지~ 생각하고 작대기를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높은지 감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까 동리가 다 보입니다. 손에 닿을까 말까한 홍시가 한 개 있었습니다. 손으로 잡으려 하는데 10cm 정도 짧습니다. 그때 제 가슴에 나뭇가지가 지나갑니다. 

거기다 몸을 기대고 홍시를 탁 낚아채는 순간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져 버렸습니다. 땅을 향하여 곤두박질치며 떨어지는데 우리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하다 저를 보셨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쳐다봅니다. 제가 땅에 떨어지는데 나무쪽에는 감나무 뿌리들이 밖으로 얼기설기 드러나 있습니다. 거기 떨어지면 뼈가 으스러지는 겁니다. 처마밑에는 아름들이 돌들이 쫘악 놓여져 있습니다. 거기 떨어지면 머리가 떨어지든 몸이 떨어지든 박살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지름이 50cm될까말까한 짚더미가 쌓여있었습니다. 할머니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시다가 그곳에 짚을 우연히 쌓아 두셨답니다. 사람 다니는 길인데 그곳에 짚더미를 쌓아 놓은 겁니다. 그 자리에 제가 폴싹 주저앉았습니다. 

상채기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새끼손가락 하나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나이에 소중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떨어지는 몇 초 사이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같은 천국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린나이에 친구들과의 관계,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야기들, 기도하면서 꿈을 꾸었던 미래의 내 얘기가 순식간에 휘익~ 소용돌이치며 지나가는 겁니다. 내 마음에 이렇게 하다가 죽는구나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는구나. 

‘내가 다치면 어떻게 하나’ 불안한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고 편안해 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황홀한 생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것이구나. 오늘 내 호흡이 끝난다 할지라도 천국으로 직행하는 내 삶이 천국으로 직통으로 연결되어지는 엄청난 평안이 제게 있다는 것을 어린나이에 깨달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임종을 지켜 드리며 만나보았는데 구원얻은 사람들의 마지막 가는 모습이 얼마나 근사하고 멋진지 모릅니다.

제가 한소망교회를 막 개척할 무렵이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신학교에서 채플을 인도하고 태백에 있는 KBS공개홀 강원도에 있는 학생들이 모여 집회를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강사로 가야 하는데 시간이 조금 늦었습니다. 제 아내가 운전을 하고 갑니다. 과속을 하고 언덕에 올라섰는데 올라서자마자 급커브길입니다. 급브레이크를 잡았는데 차가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른쪽은 청천벼락입니다. 떨어지면 부속품 하나 찾을 길이 없습니다. 뼈 하나 찾을 길이 없는 벼랑입니다. 마침 차가 돌고 돌다가 논뚝길 밭뚝길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달리던 차가 한바퀴 돌고 두바퀴 돌고 세바퀴 돌다가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게 되는데 차가 구르는 시간 속에 몇 초나 지났겠습니까? 

그 시간 동안 지나왔던 모든 얘기들이 다 지나갑니다.
한소망교회 몇 명 안되는 교인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천국으로 연결되어지는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지나가더라구요. 한번 더 경험했습니다.

그때도 얼른 알았습니다. 모든 생각들이 지나갑니다. 제가 그동안 했던 설교가 내게 주는 메시지로 지나갑니다. 

천국이 이렇게 가는 구나. 준비된 설교 한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다음 공동체를 만나기도 전에 가는 것을. 밥을 지어놓고 먹지 못하고 가는 게 인생인 것을, 사업하여 고생하고 열매를 먹지 못하고 언젠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계획하고 꿈꾸는 일 다 이루지 못하고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인생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도 얼마나 편안한지요.

한소망교회는 앞으로 어떡하지, 우리 아이들은 어떡하지, 이 생각이 한번도 나지 않습니다. 신비한 황홀함감이 차가 구르는 시간에 있는 겁니다.
아 구원얻는 백성들은 이 세상이 끝나는 그 시간에 곧바로 천국으로 이어지는 평안이 있구나. 

여러분들 어느날 주님께서 여러분이 주님 앞으로 가야 될 시간, 
주님께서 부르시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 영접했으면 하나님 잘 믿었으면 편안히 가십시오. 
염려하지 마세요 천국으로 직행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온갖 고난과 시련과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가 싸워가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족과 이웃들에게 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아주 멋진 곳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져 있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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