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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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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3-48)

임진왜란, 정유왜란에 피란체험을 기록한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蔘尾錄에 보면 피난 가는 어머니가 굶다가 지쳐서 젖먹이를 버리는 기록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떡시루를 구해다 엎어서 돌로 눌러 넣고 흐느껴 울면서 뒤돌아보며 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기를 버릴 때 갓난아이는 보에 싸서 버리지만 기어다닐만한 아이는 구멍 뚫린 떡시루에 가둬버렸습니다. 혹시나 기력 있는 사람이 구해서 키울 가능성을 두고 한 극한 상황가운데 생겨난 어머니의 지혜입니다. 

1930년대 유랑극단인 예원좌藝苑座가 만주일대 순회공연을 마치고 두만강 유역 도문땅의 어느 여관방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유랑극단 단원 중에 "이시우"라는 젊은 음악 청년이 강변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오열하는 울음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통곡하는 여인의 사연을 알아보니 독립군에 들어간다고 두만강을 건너간 남편을 수소문했더니 이미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시우는 그 여인이 울던 그 자리에서 "두만강 푸른 물에"로 시작되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즉석에서 작사, 작곡해서 "장성월"이라는 소녀 가수에게 그날 밤무대에서 곧바로 부르게 했던 것입니다. 
근세사에 치욕적인 병자호란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수차례의 왜란으로 침략에 익숙해진 일본은 36년 동안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으로 야기된 6.25 동족상잔의 비극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의 침략으로 1.4후퇴의 칼바람 속에 희생된 사람들의 절규가 눈보라를 타고 지금도 겨울산하를 울부짖고 있습니다. 분단으로 인한 천만 이산가족의 골 깊은 한은 아직도 늙은 주름에 고스란히 남아 원수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만행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적의敵意감은 민족정서로 성화되어 세월이 가도 사그러 들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원수는 용서해야 됩니다. "우리 원수"라고 하지 않고 "네 원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원수를 말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수용하기에 힘들고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주위에 있는 어느 한 산에 오르셔서 유대인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유명한 산상수훈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온전"이라는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탐밈"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은 희생동물이 흠欠이 없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출 12:5). 

또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의로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창 9:6; 신 18:13; 삼하 22:26). 또한 "온전"은 완전한(perfect), 혹은 세우다(built) 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고전 14:20; 엡 4:13; 히 5:14; 6:1). 

하나님은 온전(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흠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온전(완전)하심 같이 온전해야 한다는 당위적當爲的(마땅히 해야 하는 것)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온전함이 무엇입니까? 

Ⅰ. 하나님이 주신 계명 실천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38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한 말입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1)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 …네 마음을 다하고… 』라고 했습니다. 
『 마음 』(카르디아, )은 외식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최고의 의지를 강조한 말입니다. 

2)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 …목숨을 다하고… 』라고 했습니다. 
『 목숨 』(푸쉬케, )은 육체를 가진 생명을 말하는 것으로 적당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 …뜻을 다하여… 』라고 했습니다. 

『 뜻 』이라는 헬라어 ‘디아노이아"는 맹목적 행동이 아니라 분명한 이해력과 통찰력을 가진 지적능력의 산물입니다. 

여기 『 다하여 』라는 말은 "전 인격과 전 존재기능을 모두 동원해서"라는 말입니다. 『 사랑하라 』의 헬라어 "아가페세이스"는 파격적인 사랑인 동시에 무조건적이고 아무 대가를 기대하지 아니하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들에게는 없는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랑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성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르쳐 주어야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러한 사랑을 친히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온전한 사랑입니다. 

시편 18편 1절에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사랑"은 깊은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여기 『 사랑하나이다 』에서 히브리어 "라함"은 주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사람이 주어主語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과 하나님과의 비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볼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온전함이 무엇입니까?


Ⅱ. 인간(내 이웃) 사랑의 계명 실천에 있습니다. 

본문 5장 43절에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9-40절에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둘째 계명이라고 해서 첫째 되는 계명과 차등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동일한 계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에서 그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1)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44절에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히는 자들에게 오히려 선을 베풀고 그들에게 관용하라는 말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44절에 『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했습니다. 『 핍박 』이라는 말은 정신적인 것을 포함한 물질적 박해 행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맞서서 대항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친히 보여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날아오는 돌비를 맞으면서도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행 7:60).
증언에 의하면 손양원 목사님도 공산당들에 의해 끌려가면서 무고히 맞을 때 이와 같은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핍박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와 사랑은 항상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면 반드시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D.A. Carson"은 말하기를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자신을 예언자 계열 위에 놓는 것이다. 그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성품의 연장 위에 놓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Plummer"는 말하기를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이다."(강병도 저, 호크마 마태복음 주석)라고 했습니다. 


Ⅲ.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고 했습니다.

1) 상대적 사랑(본능적 사랑)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46절에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고 했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멸시받는 직업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은 늘 부정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죄인 취급을 당해왔습니다. 
더욱이 당시 로마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로마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일하는 세리들을 매국노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일견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을 가난한 자의 재산을 갈취하는 강도로 취급했는가 하면 하나님을 도전하는 반역자로 취급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 즉 그의 부모형제들이나 자기에게 유익한 이해관계가 있는 세리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사랑 행위는 아무런 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2) 이기적 사랑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47절에 『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 문안한다 』는 말은 직접 방문이나 혹은 간접적으로 예의와 인사를 표시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형제 즉 같은 생각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만 문안하고 교제한다면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철저히 이해관계에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골육이나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사랑인 동시에 원시적 사랑이며 동물적 사랑입니다.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정된 이기심이라고 말한 "Braadus"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강병도, 마태복음 주석 중). 왜냐하면 골육이나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 사랑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본문 5장 44절에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에로스 사랑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타적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사랑할 만한 사람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모두를 하나씩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다른 신들은 인간에게 받아가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 3:16).

하나님은 죄에 대해 전혀 다른 개념으로 우리에게 접근해 오십니다. 계명의 위반이 죄가 아니라 사랑실천을 거부한데 대한 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율법적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형제를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타적 사랑실천은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선수적이요 무조건적이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유일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목적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다 이루신(율법완성, 예언 성취)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가치(구원)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 사랑에 보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계명적 실천입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나를 핍박하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내 이웃) 사랑의 계명적 실천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사랑으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교적 사랑, 신행일치의 사랑실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선수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일방적으로 나타난 것과 같이 우리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만 합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돌봄에 자기 자신에게 대가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적이고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습관적인 보호이며 관대함입니다. 
우리는 이기적利己的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타적利他的사랑을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온전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scott"는 말하기를 “진정 타락된 옛 인간의 삶은 손해에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자 우리의 온전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성도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되는 현상을 가지고 직설적 표현을 하자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이요, 그 크신 사랑에 보은적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보은적 역사役事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른 예배생활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운동을 온전히 이루도록 충성을 다합시다. 그리고 서로서로 격려하고 아껴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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