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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향로를 든 사람 (민 16: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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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를 든 사람 (민 16:41-50)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한 매우 가슴 아픈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극은 하나의 반역 사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민수기 16장에 그 사건 전말이 나옵니다. 

레위의 후손으로서 모세의 사촌인 <고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인 <다단>과 <아비람>과 파당을 만들어 모세와 아론에 대항했습니다. 이백 오십 명의 지휘관도 이들 편에 가담했습니다. 광야 사십 년 동안에 있었던 가장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역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의 반역에는 몇 가지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왜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모세와 아론은 한 번도 지도자가 되겠다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면서까지 그를 세우셨습니다. 모세는 어떤 면으로는 억지로 지도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모세는 당장이라도 물러났을 것입니다. 

또 다른 명분은 <왜 빨리 가나안에 인도하지 않느냐>는 항의였습니다. 그러나 이 불평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이나 지내게 된 것은 민수기 13-14장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이 보냈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보고했고, 백성들이 그 불신앙의 보고에 부화뇌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광야에서 사십 년을 지나게 된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또 이들은 13절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라고 말했는데, 노예살이하던 땅 애굽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미화하는 것은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노예살이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들은 교묘한 말로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고 모세와 아론을 끌어내리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얻고자 했을 뿐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반역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께서 과연 누가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인지를 보이실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에게 향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모두 백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진노를 내리셨습니다. 

16장 31절 이하를 보면 땅이 갈라져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삼켰다고 했고, 또 이백 오십 명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불로 죽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도한 백성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34절을 보면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이르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존재여서인지 이스라엘은 겨우 하루 만에 이 두려움마저 잊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와서 사람들이 죽은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였습니다. 41-42절을 보세요.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2차로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는데,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급한 절대 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이 때 이 위기의 불을 끈 인물이 바로 <아론>입니다. 아론은 이 날의 영웅이었습니다. 아론은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아 향을 피워 들고 백성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백성을 위해 속죄했을 때, 비로소 전염병이 멈추었습니다. 

본문 46-48절을 읽어봅시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한복판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아론이 두려워하지 않고 그 고통의 한 가운데 서지 않았다면,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아론의 발이 진노의 땅 한 복판에 서는 그 순간, 재앙은 멈추었고, 그는 백성을 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날 이후 아론의 존재는 백성들의 마음에 크게 각인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백성들이 아론에게 보인 존경심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백성들이 보인 반응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20장 29절을 보면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삼십 일 동안 애곡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삼십 일간의 애곡>은 아론을 향한 백성들의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그로 인한 비극과 고통의 이야기들은 오늘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 때문에 어나가던 광야와 같습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고통들이 발생하여 사람들을 죽게 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고통, 질병의 고통, 망가진 인간관계로 인한 고통, 실패로 인한 고통과 좌절, 무너진 사회정의와 무질서, 그리고 생태계 파괴로 인한 괴로움, 삶의 허무함으로 인한 진한 슬픔의 와중에서 쓰러지고 있습니다. 

이 무서운 진노를 멈추게 할 분은 누구입니까? 근본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통의 한 복판에 서서 그 고통을 멈추게 한 아론>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향로를 드시는 대신에 당신 자신을 십자가 위에 높이 드셨습니다. 아론의 향로에 향이 태워지고 있었던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그 분의 피가 흘려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려지신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방황하던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목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가난을 극복하게 하는 지혜를 배우는가 하면, 가난을 견디고 경제적 부요함 이상의 기쁨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실패를 디디고 재기하였고, 열등감의 늪에서 건짐을 받고 존귀한 자화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악의 수렁에서 건짐을 받고 생명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 한 가운데, 가정 한 복판에, 우리 교회 한 가운데 임하여 서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면, 고통은 끝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기원합니다.이 구원의 은총으로 기쁨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우리도 아론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고통의 현장에 세워 소금과 빛이 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을 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게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단지 구원을 받는 사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상에 이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 구원의 향로를 들고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들어야 할 향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 힘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구주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라는 향로를 들고 갈 뿐입니다. 아론이 제단의 불을 담아 향을 피운 향로를 들고 서 있었다면, 우리는 성령의 불로 가슴을 채우고, 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향기를 날리면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오늘의 아론으로서 사명자의 삶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꼭 우리가 그렇게 살려고 애쓸 필요가 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향하여 귀한 삶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향로를 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설교 후에 부를 찬양처럼 <주님 다시 오실 때가지 이 사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란 우리들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고 부끄러워 <향로를 들 사람을 뽑는 하늘나라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부끄럽게 살았고,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과연 아론처럼 남은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사명자로 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아론의 삶을 더듬어 봄으로써 용기를 얻고자 합니다. 

얼마 전 김황식 총리의 국회 답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야당의 모 국회의원이 이명박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을 때, 김 총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사실에 기반을 두고 말해 달라. 이 정부에서 행한 모든 정책에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는 원리>는 모든 것에 다 적용됩니다. 들판에 서 있는 나무는 아침 햇빛을 받아 화사하게 빛나지만, 나무의 뒤에는 그림자도 함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빛과 그림자는 누구의 인생에나 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사람을 평가하곤 합니다. <그는 틀려  먹었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지 말고, 과거의 삶과 미래의 가능성을 함께 고려한다면, 평가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죄를 저질러 세인의 비판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모든 사람이 그의 어두운 그림자만 보고 <죽일 놈>이라고 욕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그의 현재만 보지 않고, 과거를 함께 바라봅니다. 과거를 살펴보면 그에게도 한 때는 꿈도, 사랑과 선행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거를 합쳐서 바라보면 <죽일 놈>에서 <죽일 정도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사람>이라고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또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그의 미래를 합쳐서 보기도 합니다. 지금은 죽일 놈일지라도 그가 개과천선하여 남을 위해 살아갈 미래를 고려해 보면 <죽일 놈>에서 <기대해도 좋을 녀석>으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비로소 용서가 가능하게 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평가하는 이러한 종합적 사고방식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난 희망이 없어!>라고 단정하면 안 됩니다. 비록 지금 초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과거에는 뜨거운 꿈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적 구원입니다. 구원은 장차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변화되어 사명자로 살아감으로써 이 세상에서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론도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4장 14절입니다. 거기서 그는 말할 줄 모른다고 하면서 백성의 지도자 되길 거부하던 모세의 대변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그는 주인공이 아니라, 모세의 개인비서처럼, 대변인처럼 볼품없이 등장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는 치명적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이 보여주는 대로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으로 불러 십계명을 비롯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아 백성이 동요했을 때,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을 현혹했던 인물이 아론이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론을 용서하시고 그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고, 그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 될 불로 분향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레위기 10장에 기록된 비극입니다. 

또 민수기 12장을 통해 보면 그는 누이 미리암과 합세하여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미리암이 나병에 걸리는 치명적인 고통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기록들은 아론은 하나님을 위해 쓰일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제사장이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징벌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아론은 백성에게 임한 진노가 그치게 하는 구원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보여주는 극적 반전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끄러운 아론>이 <명예로운 구원자 아론>이 된 배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아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결정적 순간에 향로를 들고 서게 하심으로써 다른 이들을 고통에서 건지는 사명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추진하신 <아론 만들기 프로젝트>의 결과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쓸모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붙드시고 인도하셔서 마지막에는 귀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를 희망없는 죄인으로 낙인찍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 아래 걸음을 멈추시고,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삭개오를 희망 없는 죄인으로 보고 계신 게 아니라, 삭개오의 미래를 큰 기대감을 가지고 보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삭개오는 <좋은 사람으로 변할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가셨을 때,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고, 이로 인해 삭개오는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란 향로를 들고 섬으로써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한 <또 하나의 아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기대는 삭개오를 또 하나의 아론이 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숯불에 구운 생선을 아침식사로 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에는 베드로를 <희망 없는 배신자>로 낙인찍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과거를 바라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르던 열정이 가득했던 과거의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던 멋진 모습을 기억하셨습니다. 비록 눈앞의 베드로는 <배신자>지만, 과거의 베드로는 <썩 훌륭한 제자>였음을 기억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베드로의 미래를 바라보셨습니다. 그가 용서를 받아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복음을 위해 끝까지 헌신할 충실한 사람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던 예수님의 가슴에는 베드로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대대로 초대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고,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베드로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또 하나의 아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보여주는 이야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유는 그 분이 죄인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시는 이야기, 그를 훈련시켜 결국엔 아름답게 섬기게 하시는 이야기,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향로를 들고 섬으로써 다른 이들의 고통을 그치는 사명자가 되게 하시는 멋진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또 하나의 아론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 이야기가 우리를 통해 이어지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에 향로를 들고 선 아론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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