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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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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막 10:46-52)

지난 설 연휴, 극장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영화가 있습니다. 혹시 영화 제목을 아십니까? 7번 방의 선물입니다. 7번 방의 선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람되었습니다. 그 숫자가 약 80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는 분들이 다 은혜를 입습니다. 눈물도 흘리고, 감동도 받고, 가족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한경이라는 감독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제작비는 그렇게 많이 들이지 않고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따뜻한 겁니다. 6세의 지능을 가진 지적장애인 아빠, 이름이 용구입니다. 용구는 마트의 주차관리원으로 일합니다.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7살 짜리 예승이라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예쁘고 똑똑하고 귀여운 딸이예요. 이 아빠는 딸을 너무너무나 사랑해요. 또 이 딸은 아빠가 조금 바보스러운 것을 아니까 아빠를 또 너무너무 사랑해요. 그래서 엄마는 없고 아빠와 딸이 너무나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이 아빠가 우연치 않게 엉뚱한 일에 말려들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린아이를 강간한 죄를 뒤집어쓰고 또 살인까지 한 죄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하필이면 그 아이가 무슨 경찰청장의 딸이예요. 뭐 죄를 묻지도 않고 상황만보고 이 사람을 그냥 죄인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경찰청장도 주장하고, 국선변호사도 이 사람을 무조건 죄인으로 또 판사도 무조건 죄인으로 몰고 가요. 

그래서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는데 교도소에 들어간 방이 하필이면 7번 방이예요. 7호실이예요. 그런데 거기 이미 흉악범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사기전과, 간통범, 소매치기, 밀수범, 자행공갈범 이런 사람들이 와 있는데 그분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이용구라는 아빠가 딸을 너무너무나 만나고 싶어하는거예요. 그래서 이 못된 사람들이 작전을 써가지고 일곱 살 딸을 교도소에 들여 보내는거예요. 정말 기상천외한 방법을 이 딸을 아빠와 만나게 하는거예요. 그리고 교도소에서 함께 생활하는거예요. 그러면서 그 교도소 사람들이 다 변해요. 그냥. 

그 아빠와 딸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흉악범들이 다 변해. 나중에 그 분 사람들 중에 사기전과자가 목사가 되고 뭐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무죄가 밝혀져야 하지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기 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이 바보 아빠가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였다고, 자기가 죄를 저질렀다고 스스로 자백을 하고 자기가 사형수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헤어지는데 그 이별의 장면이 너무 안타가워서 저도 막 울뻔했어요. 옆에 있는 여자분들은 다 우시더군요. 정말 그 장면이 깊이 뇌리에 새겨집니다. 그런데 이 딸이 나중에 법과를 졸업해서 변호사가 되요. 그리고 그 아빠의 누명의 벗겨줘요. 아주 따뜻하고 가족적인 영화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아버지와 딸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바이러스가 그 흉악범들을 다 변화시켜서 그들이 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이 성경에서도 사랑에 감동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여리고라는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따라가고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오늘 성경에 보니까 여리고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다.. 이 사람은 맹인이요, 이 사람은 또 거지요, 걸인이요, 그리고 이름이 바디매오, 사실 바디매오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예요. 그 “바”자라는 것은 누구의 아들, 그리니까 디매오라는 사람의 아들, 그게 어떻게 이름이 될 수 있나요? 그 이름은 사람들이 부를 때 디메오의 아들, 그래서 바디매오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어찌보면 그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사람, 가장 비참하고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 이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 예수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번에 십자가를 지고 이제 죽음을 경험하게 되시는데 그 길에 오늘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 “예수가 왔다. 예수가 왔다.” 그러니까는 그는 보지는 못하면서도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굴 한 번 보려고, 또 예수님을 만나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 말씀을 들으려고 막 몰려드는데, 그 바디매오의 소리라는 건 누구는 신경써주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게 시끄럽다고 막 꾸짖고, 책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디매오는 이것이 어쩌면 자기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저분을 만나야 내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는 소리 지릅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의 소리 속에서도 바디매오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바쁜 걸음을 멈추셔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바디매오를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내게로 데려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야,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 안심하고 일어나. 빨리 예수님께 가봐” 그러니까 바디매오가 너무 급해서 겉옷도 던져버리고 예수님께 달려 나아갔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뭐라고 그래요. “내가 네게 뭘 해줬으면 좋겠느냐?”라고 물으세요. “네가 원하는게 뭐냐?”, “예!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에 정말 주님을 너무나 사모하고 사랑하는 그 간절함 속에서 믿음으로 보았어요. 믿음.

예수님을 만나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구나. 그 믿음을 보셨어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할 때 바디매오가 곧 보게 되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육신의 눈이 띄여지게 된 거예요. 사실은 육신의 눈만 띄여진게 아니예요. 그 영혼의 눈의 띄여진거예요.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기분이 좋아서 잠시 따라간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정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오늘 마지막 52절에 보면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니라” 따르니라는 이 말은 “아콜로세우”라는 헬라어인데 이 말은 아무 때나 쓰는게 아니예요. 

누가복음 5장 11절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셨어요. “베드로야 나를 따르라” 그럴 때 이 아콜로세우예요, 바로 제자들을 부를 실 때 쓰는 말이예요. 또 누가가 세관에 있을 때, 그를 부르실 때 예수님이 이 말을 쓰셨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 바로 이 사람이 예수를 따랐다는 것은 제자가 되어서 주님을 따랐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거예요. 

우리는 역사속에 보면은 이 바디매오라는 제자가 신약시대의 기록에 소개되어집니다. 주전 1세기 사역자중에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주석가들은 바로 이 사역자 바디매오가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일 것이다 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바로 이 사역자 바디매오가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일 것이다.’ 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 실제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 사건이 일어난 연대가 주후 33년이에요. 실제로 마가복음이라는 성경이 기록된 연대는 주후 60년이에요. 그것을 따져보면 한 30년간의 차이가 있어요. 

다시 말하면 바디매오는 그 때 눈 뜨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 30년 동안 훌륭히 제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마가복음의 기자는 바디매오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님 때문에 병 고침 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예요.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다 기록된 것이 아니죠. 불과 몇 사람만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잘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여기에 기록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주목해 봅니다. 우리가 오늘 바디매오를 주목하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세미한 음성, 그의 신음과 같은 음성, 절규, 그의 부르짖음을 예수님은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가까이 오게 하시고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그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놀라워서 그 사랑을 지을 수가 없어서 일생을 주를 위해 헌신하면서 사역자로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오늘 사순절 첫 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우리가 묵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사순절이 되면 고기도 가능하면 줄이고 또 기도의 시간을 늘리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사랑하고 헌신하고 선을 행하고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고 보내는 것이 바로 전통적인 사순절입니다. 정말 바디매오의 그 세미한 음성까지 들으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 사순절에 기도할 때 저와 여러분의 기도도 들으실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중에 ‘주 만 바라볼지라.’ 라는 복음 성가가 있지요. 여러분 가사를 좀 소개해 보면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우리가 사순절에 주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에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음성도 들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은지 아마 오래 된 분들도 있을 거예요. 또 새신자도 있고, 그러나 처음 예수님 믿을 때 뜨거웠던 감격과 첫사랑을 우리가 간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 경우들이 많이 있어요. 마음이 냉담해지고 마음이 차가워지고 열정과 은혜를 잃어 버렸어요. 찬송을 불러도 무감각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저 그런 것 같고 이제 우리가 이 첫 사랑을 다시금 기억해야 해요.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사순절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이 놀라운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는 그래서 이 사순절에는 그 사랑의 눈을 뜨고 은혜의 눈을 뜨고 사명의 눈을 뜨는 아름다운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 우리가 특별한 절기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사순절에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 특별히 사랑에 관한 말씀 몇 가지를 묵상해 봅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신 계절이 바로 이 사순절입니다.

또 요한 일서 4장 10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아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외아들을 화목의 제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것을 기념하는 그 날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또 이사야 53절 5절 말씀을 같이 읽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아멘. 그분의 찔리심 그분의 채찍 맞으심 그분의 고난과 그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죄와 우리의 모든 허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대신 그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바디매오가 일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주의 제자가 되었듯이 우리가 잃어버린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회복하고 주님의 사랑에 눈을 뜨고 사명에 눈을 뜨는 그런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늘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잊어버리면 안돼요. 대개 마음이 냉담해지는 분들은 처음에는 뜨거웠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첫 사랑을 다 잊어 버렸어요. 열정도 식어 버렸어요. 남은 것은 형식과 율법밖에 없어요. 경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 사랑을 우리는 늘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큰 어려움 이죠. 부모의 은혜, 부모의 사랑을 잊어버리면 뭐가 되요? 불효자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해 버리면 그는 정말 형식적인 신자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내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건강해서 일도 부지런하게 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자식들 교육도 잘 시켰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까 이제는 아내도 떠나가고 자신의 몸도 쇠약해지고 참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한 노인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장성한 두 아들은 다 기반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노인은 너무 섭섭한 마음에 목수를 찾아 갑니다. 그리고 궤짝을 하나 주문했어요. 그리고 궤짝 안에다가 유리점에 가서 깨진 유리 조각을 나무 궤짝 안에다가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큰 자물쇠로 잠갔어요. 그리고 자기 침상 밑에 그 나무 궤짝을 가져다 놨어요. 

자주 오지도 않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아들들이 오더니 “아버지 저 궤짝이 뭐예요? 못 보던 것이네요?” 쳐다봤어요. “야 별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쓰지마.” 그럴수록 보지 말라니까 더 보고 싶은 거예요. 아버지가 화장실 가셨을 때 그것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너무 큰 자물쇠라서 열어 볼 수가 없었어요. 깰 수 없고 궁금했어요. 둘은 생각했어요. “아! 아버지가 우리 몰래 벌어놓으신 돈이 많이 있는가보다. 금붙이가 많은 가보다. 저것을 우리 주려고 그러는가?! 자 우리 이제 아버지를 모셔보자.” 그래서 일 년은 형님이 일 년은 동생이 아버지를 모시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 아버지가 몸이 좀 쇠약해지더니 돌아가셨어요. 장례식은 관심도 없어요. ‘저 궤짝 안에 무엇이 좀 들었나?’ 하고 나누려고 궤짝을 열어봤어요. 그랬더니 유리 조각만 가득 들은 거예요. 큰 아들이 화가 났어요. “이 노인네한테 우리가 당했어. 당했어” 화를 냅니다. 동생도 그것을 쳐다보니까 “야 이놈아 까지 것 뭘 쳐다봐 갖고 싶으면 너나 가져!!” 동생은 그래도 아버님께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아버지 유품이라도 내가 갖다가 보관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이런 시가 생각났어요.

나뭇가지가 조용하려 해도 바람이 쉬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려 해도 자식들은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하는 시가 생각났어요. 그는 유리는 버리고 나무 궤짝을 끌고 집으로 갔어요. 그랬더니 부인이 “이 까짓 거 쓸데없는 것을 뭐 하러 가져 왔냐고” 막 신경질을 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려고 보니까 그 나무 궤짝 밑에 편지가 한 장 놓여 있어요.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 둘 째 아들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나이 40먹은 사람이 통곡을 합니다. 그랬더니 부엌에 있던 아내가 뛰어 오고 방에 있던 아들이 뛰어 오고 “아빠 왜 이러냐고?!” 그리고 그 편지를 읽고 함께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아들을 가졌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울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던 날 나는 너무 좋아서 웃었다. 그 때부터 30년 동안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그들은 나를 울게 하였고 또 웃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늙었다. 그리고 아들들은 달라졌다. 나를 기뻐서 울게 하지도 않고 나를 좋아서 웃게 하지도 않는다. 내게 남은 것은 그들에 대한 기억뿐이다. 처음에는 진주 같이 아름다웠던 기억들, 중간엔 등록금 대려고 내 등뼈를 휘게 했던 기억들, 지금은 삭은 팔이 유리 조각 같이 나를 찌르는 기억들,.... (생략) 아~~ 내 아들들만은 나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노년이 나 같지 않기를... 

이것을 보고 둘 째 아들의 온 가족이 통곡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지 못하면 부모와 자식관의 관계도 갈라질 수 있는 거예요. 그 사랑을 잊어버리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도 갈라 놓을 수 있는 거예요. 기억하지 못하면 십자가와 우리 사이도 갈라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고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어떻게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으며 많은 축복을 내리셨는가를 다시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에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그리고 나를 위해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수치와 부끄러움을 십자가에서 당하셨는가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우리는 감동 받아서 사명에 눈뜨고 은혜에 눈뜨는 주의 백성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바디매오가 주님을 통해서 경험한 그 사랑에 은혜를 우리가 경험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해요?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부르짖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해요. 

만약 바디매오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했던 그 말을 듣고 기도하기를 중단했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더 크게 부르짖고 소리 지르면서 ‘다윗의 아들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기도했어요. 이 사순절은 기도하는 절기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부르짖는 것 하나님 저의 첫사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저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제가 은혜에 눈뜨게 해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에요. 정말 주님의 그 사랑이 한 조각이라도 우리 마음에 남겨있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세밀한 음성을 들으시는 주님께서 어찌 여러분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순절은 또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절기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부를 때 바디매오는 겉옷을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갑니다. 여러분 겉옷이라는 것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는 것 아시죠. 겉은 어쩌면 그들에게 크레디트 카드와 같은 거예요. 우리는 카트를 가지고 은행에서 돈을 꿀 수 있잖아요. 신용을 담보하고 그런데 구약에 보면 유대인들의 겉옷은 낮에는 자리 멍석으로 쓰고 밤에는 이불로 사용합니다. 유대인들은 추워서 밤에는 겉옷이 없으면 못자요. 겉옷은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구약에 보면 전당포에 가서 돈을 꿀 때도 겉 옷을 저당 잡히고 돈을 꾸어요. 겉옷은 그 만큼 중요한 거예요. 재산 목록 1호에요. 저당잡히고 돈을 꿀 수 있으니까. 그러나 또 율법에 보면 누가 남의 것을 저당 잡으면 저녁에 되기 전에 그것을 돌려주라고 하였어요. 왜? 겉옷이 없으면 그 사람이 추워서 잠을 잘 못자니까 겉옷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 바디매오는 겉 옷을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갑니다. 예수님 만나는데 거추장스러운 거 방해가 되는 거 있죠? 그것 다 던져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에요. 그래서 금욕과 절제와 거룩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공교롭게도 마가복음 10장에는 이 바디매오의 말씀은 10장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런데 처음의 부분을 보면 자기 아내를 버리는 이혼을 하려는 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랑에 눈을 떴는지 모르겠어요. 또 두 번째는 마을 사람들이 어린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겸손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교만을 경계하십니다. 또 세 번째는 젊은 관원이 예수님꼐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계명을 말하니까 내가 다 지켰다고 해요.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가 돈이 많은 사람인 것을 네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재물이 많은고로 그냥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싸웁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여 예수님이 하늘보좌에 앉으시면 저희를 우의정 자리에 좌의정 자리에 앉게 하소서.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시기심에 서로 싸웁니다. 서로 높은 자리에 낮으려고....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너무나 안타까우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디매오란 이 거지맹인이 눈뜨는 사건을 통해서 참으로 그들이 떠야할 눈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사순절동안 우리는 쾌락의 즐거움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교만을 낮춰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방해가 된다면 물질까지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보다 높아지려는 명예까지도 던져버려야 해요. 그래야지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달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바디매오의 고백은 위대한 고백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너를 불쌍히 다웃의 자손이라는 말은 아무나 쓰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뜻이고 우리의 구주라는 뜻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데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아직까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적이 없어요. 어찌보면 예수님은 아무 것도 모르는 눈은 떳지만 영의 눈이 닫혀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욕심에만 가득차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 바디매오 사건을 통해서 그들을 깨우쳐 주시는 거예요. 너희도 바로 영의 눈을 떠야 한다. 오늘 바디매오의 영의 눈을 뜨고 나의 제자가 된 것처럼 너희도 욕망의 눈을 감고 영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모든 불필요한 것들이 다 제거되고 순수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런 계절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찬송가 작곡자 중에 페니 크로스비 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6개월 때 의사의 실수로 시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30세가 될 때까지 절망의 삶을 삽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재능이 있고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였지만 그는 꿈을 펼치지 못합니다. 절망가운데 불행가운데 하루하루를 맹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가 한번은 뉴욕 전도집회에 권유를 받고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때 그가 들었던 찬송이 너무 은혜로웠어요. 왠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이 찬양을 듣는 순간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어요.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게 그의 마음속에 믿어지기 시작했어요.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눈물이 흘려 내렸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나는 이제 주님을 위하여 어떻게 내 생명을 드릴 수 있을까. 그 마지막 가사가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 찬양을 들을 때에 ‘하나님 저 같은 맹인도 주님께 드릴 것이 있을까요?’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래 너에겐 아름다운 문학적인 재능이 있잖아. 시를 잘쓰고 작곡도 하는 재능이 있잖아. 그것을 나를 위해서 사용해봐. 그때부터 이 페니 크로소비는 찬송 작가가 됩니다. 그는 많은 찬송시를 쓰는데 95세가 될 때 까지 8천곡의 찬송시를 씁니다. 놀라운 일을 행하죠. 정말 그의 생애는 육신의 눈은 떠지지 않았지만 영의 눈이 떠져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바디매오의 육신이 눈이 떠지고 영의 눈이 떠지고 사명의 눈이 떠져서 주님을 따르는 살게 되었듯이 저와 여러분 이 사순절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심으로 나의 욕망과 욕심과 쾌락을 다 벗어버리시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감으로써 이 사랑을 회복하고 사명을 회복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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