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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고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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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고 (요 3:22-30)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에는 사전에 누군가 준비자가 필요했습니다. 길을 닦는 자가 필요하였습니다. 그 역할을 세례요한이 하였습니다. 본문은 세례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은 위인으로 태어납니다. 성경은 위인들이 태어날 때 분명한 동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에도 천사로부터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잉태될 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계시하였습니다. 세례요한도 태어날 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예비자

세례요한은 철두철미 예수를 위해서 예비자로 태어났습니다.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게 되면 며칠 전에 선발대가 먼저 출발하여 길을 닦고 의전을 준비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태어나기 6개월 전에 먼저 태어났습니다. 세례요한은 순전이 예수를 위해서 먼저 와서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3:11),”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눅3:16),”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한 번도 예비자로서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백성들은 세례요한이 메시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이 메시야가 아니냐(요1:23)” 하고 물을 때 그는 손사래를 치며 “나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은 “예비자요 준비자요 길을 닦는 자”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나는 주연이 아니다 주연은 내 뒤에 오신다”는 말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고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였고 자신의 역할에서 절대로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이 선을 넘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욕심이 나면 선을 넘고 유혹받고 길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가는 곳 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예수님은 인기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유다가 볼 때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곧 한자리를 하게 될 것 같이 보였습니다. 욕심이 생겼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 지점에서 그만 선을 넘습니다. 길을 벗어납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와 형제 남매간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백성들이 모세의 명령을 잘 따릅니다. 여기서 아론과 미리암이 욕심이 생깁니다. 나도 모세 못지않은 영성이 있는데 지도력이 있는데 우리도 모세의 형제 남매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어느 날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너만 지도자냐, 하나님이 너하고만 말씀하시더냐, 하나님이 우리와는 말씀하시지 않느냐(민12:2).” 그것은 하나님께 도전행위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너는 모세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론과 미리암이 선을 넘었습니다. 욕심이 생겨서 도전을 합니다. 그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 셋을 불러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하고 진노하셨다고 했습니다(민12:8). 그 결과 주동했던 미리암에게는 나병이 걸리게 하고 아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느 월간 잡지를 보니까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어느 철없는 장군이 다음 차례는 나다 하고 호언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옷을 벗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욕심입니다. 자기 분수를 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배반은 그 과정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아주 충직했습니다. 그는 결코 그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신의 분수와 사명과 역할에 아주 철두철미 합니다. 

오직 외길 삶

세례요한은 평생(평생이라야 30년) 오직 한길만 걸어갑니다. 평생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곁눈질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중심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인생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메시야가 아니냐 하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 소리 듣고도 전혀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분수를 넘지 않고 오직 자기 길만 갔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런 요소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융통성이 많습니다. 융통성이 많다는 말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복음의 중심이 불분명 하다는 말이고 이쪽도 저쪽도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중심이 모호하고 불분명하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너무 적당히 적당히를 외치다 보면 타협하게 됩니다. 주일예배를 적당히 하다보면 5분 늦고 다음에는 10분 늦고 그 다음에는 빠지게 됩니다. 11조도 적당히 하다보면 나중에는 정신도 중심도 없어지게 됩니다. 교사가 성가대원이 적당히 하다보면 불분명해지고 나중에는 매번 늦고 적당히 빠지게 됩니다. 직장에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자주 옮겨 다닙니다. 돈을 더 준다면 미련 없이 옮겨 다닙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인생을 되돌아보면 하자와 흠집과 결점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공직자 청문회를 보십시오. 오늘에 와서 되돌아보고 털어보니까 다 걸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융통성이 많았고 적당히 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원칙과 길이 있었는데 적당히 편법을 적용한 결과입니다. 오늘에 와서 보니까 다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낼 세금을 적당히 무마해서 내지 않았습니다. 아들 병역을 적당히 해서 빼냈습니다. 미리 정보를 캐내서 노른자 땅을 사 놓았습니다. 그 때는 많은 이익을 얻었고 그래서 좋아했습니다. 그 말은 원칙에서 이탈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관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니 너무 융통성을 발휘하고 편법을 누린 것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오늘 앞길에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좀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나라가 돈 좀 벌었다고 수출 좀 한다고 다된 것처럼 행사하면 안 됩니다. 돈 좀 벌고 선진국이 되려면 생각이 여물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융통성을 발휘하면 안 됩니다. 

원칙에 가까워야 합니다. 원칙에 가까우려면 누가 보지 않아도 돈 낼 것은 내야 합니다. 의무도 이행해야 합니다. 세금도 자진해서 내야 합니다. 아들의 등을 떼밀어서라도 군에 보내야 합니다. 몸이 빈약하면 매일 밤 피자 사 먹여서 살찌게 해서라도 보내야 합니다. 척추가 고장 났으면 사전에 빨리 치료시켜서 보내야 합니다. 저는 군목에 입대할 때 가슴이 아파서 군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의관은 도저히 이 몸으로 갈 수 없다, 가면 쓰러진다고 집에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눈감아 달라, 나는 군에 가겠다, 당당하게 군을 마치고 싶다고 호소해서 군에 갔다가 마쳤습니다. 척추 수술을 한 청년이 군에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신체검사에서 걸릴 것 같다고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군의관에게 호소해서 반드시 갔다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갔다 오면 한 평생 마음이 시원합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당당해집니다. 삶에는 이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당당함은 내 삶에서 매사에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국가안전보장 위원회가 있습니다. 2010년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직후 이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청와대 자하벙커에서 대통령 국정원장 국방장관 외교장관 통일장관 행안부장관 국무총리실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 8명이 모여 진행되었습니다. 그 회의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하기 위해서 모인 모임입니다. 그런데 그 8명중 국방장관 빼고 2명은 면제자였고 1명은 보충역이고 1명은 조기제대자이고 만기 제대자는 3명뿐이었습니다. 말이 됩니까. 영국이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의무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영국 여왕의 손자가 아프칸 전쟁 때 전투기를 타고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영국 여왕의 아들인 왕자를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 때 전쟁에 직접 참전시켰습니다. 오늘 미국에 대해서 우습게 말들을 하는데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미국인 부자들과 장성들과 정치인들은 아들들을 앞 다퉈 전투에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6·25때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아들을 한국전에 참전시켰습니다. 옛날 로마시대에 집정관들은 전쟁이 나면 자신들이 먼저 참여하였고 자식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혹 전쟁에서 자식들이 전사를 하면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로마가 그렇게 오래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외길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아버지가 현직 제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세습제입니다. 말하자면 세례요한은 그 시대의 기득권자입니다. 미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처럼 취직하려고 이력서를 써 들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제사장직이 자동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이 외길의 사명을 다 하려고 그 기득권을 포기합니다. 야인으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 시대 현직 제사장의 아들이,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 광야로 나아가 죽은 약대 털을 벗겨 걸치고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잡아 먹어가며 그 시대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눅3:7).” 그 소리를 그 시대 집권자들이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랬다고 누구도 쫓아가서 요한을 체포하거나 고소하거나 구속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그런 요한을 구경하려고 광야로 나아갔다가 그 소리를 듣고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 한사람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요한을 두려워하였고 모두 그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세례요한은 예비자의 길만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오직 외길만 걸어갔고 뒤도 처다 보지 않고 주어진 사명의 길만 갔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당신이 메시야가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오직 예수 

또한 세례요한은 예수님 보다 6개월 전에 와서 예수를 위해 제자들을 미리 양육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들(요 1:35-40)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일찌감치 에베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행 19:1-7). 아불로는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행 18:24-28). 베드로 요한은 세례 요한이 양육한 제자였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쫒았던 것은 그런 훈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출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쳤고 귀신을 내쫓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직감으로 예수신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당신이 그분입니까”하고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가서 요한에게 전하라 눈먼 자가 보고 저는 자가 뛰고 나병환자가 깨끗하여진다고 전하라.” 그 말은 그 시대에 그런 능력을 행하는 자는 메시야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요한에게 암호로 내가 메시아요 예수라는 사실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 연락을 받고 세례요한은 이제 내 사명은 끝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나타나면 조연은 사라져 주어야 합니다. 이제 그는 보름달처럼 흥해야 하고 나는 그믐달처럼 쇄하여야 합니다. 

그때부터 세례요한은 헤롯왕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세례요한을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당시 집권자인 헤롯왕에게 세례요한의 존재는 가시 같은 존재였고 거북스런 존재였습니다. 오늘 말로 말하면 극단의 재야인사입니다. 당시 왕은 헤롯 안디바였는데 이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를 탐내서 빼앗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탓을 못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거침없이 질타하고 힐난하고 고발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감옥에 넣고 입을 막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달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요한은 타협이 안 되었습니다. 헤롯이 고민했습니다. 

요한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헤롯의 아내 그 잘난 여인 헤로디아였습니다. 무능한 남편을 버리고 왕과 동거하고 있는데 세례요한이 자꾸만 방해를 합니다. 이 여인이 한을 품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전국에서 귀인들이 모여 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딸 살로매를 내세워 춤을 추게 하였고 흥에 겨웠던 헤롯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며 약속하자 어린 의붓딸 살로매는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래서 목이 달아나 순교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적당히 타협만 했더라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이 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입만 열면 예수가 튀어나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라는 말만 듣고도 바닷물로 뛰어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충성을 다 바쳐 목숨을 바쳐 섬길 대상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는 대명사처럼 따라다니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광야의 소리”입니다. 소리는 말을 담아 외친 후에 곧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 말은 예수이고 소리는 세례요한입니다. 말은 한번 뱉으면 오래 남고 글로 쓰면 더 오래남습니다. 그리고 소리는 한번 뱉으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그 소리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대로 세례요한은 예수를 전하고 그가 오심을 준비하고 그가 오신 것을 보는 순간 소리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을 향하여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없다(11)”고 평하였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오직 한길 오직 한 가지 일을 위해 철저하게 살아가다가 죽는 것은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은 젊었을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을 탐독하여 읽으면서 소설 속에 나오는 롯데에 대해서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상호를 “롯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평생 예수만 연구하여 기독론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평생 3만 페이지 원고를 썼는데 그중 2만 페이지가 “예수에 관한 연구”라고 합니다. 음악가 헨델은 복음서 중에 유독 마가복음을 탐독하였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주제는 “수난 받는 예수“입니다. 예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던 중 그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 곡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그렇게 집중하고 탐독하고 매료 중에 있으십니까. 사람마다 지금 생각이 집중된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나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께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가. 깊이 들어가 있는가, 지금 내 인생에 예수가 얼마나 몇 %나 차지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주님께서 손해 보라고 하면 나는 얼마나 흔쾌하게 ‘예’ 하고 대답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세례요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나는 무슨 말로 응답할 수 있을까.” 이 대답은 여러분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기간입니다. 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님은 보름달처럼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그믐달처럼 쇠하여야 하리라.”이것이 여러분 모두의 대답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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