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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정원 가꾸기(3) (막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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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 가꾸기(3) (막 4:1-9)

우리의 마음은 정원과 같습니다. 그 마음의 정원을 어떻게 꾸미느냐 에 따라서 아름답고 멋진 정원이 될 수도 있고, 쓰레기 더미와 같이 더럽고 추한 정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함께 거니시고 함께 행복을 나누는 아름답고 따뜻한 정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답고 멋진 정원이 되어야 할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는 잡초들 때문입니다. 미움, 탐심, 이기심, 무지와 같은 잡초의 씨앗들이 뿌려져 우리 마음에서 자라나 아름다워야 할 정원을 잡초더미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런 잡초들이 우리 마음의 정원에서 자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가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죽으신 그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가 우리 마음의 정원에서 자라는 잡초들을 제거하는 제초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을 더럽히는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온갖 먼지들입니다. 정원에 잡초들을 뽑아내는 김매기를 통해서, 그리고 제초제를 통해서 잡초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해 놓는다 하더라도 밖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먼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 정원 역시 아름다운 정원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정원에도 세상적인 생각과 가치관이라는 먼지가 매일 매순간 들어옵니다. 그 먼지를 차단해야만 우리 마음의 정원은 아름다운 정원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먼지들이 우리 마음의 정원에 들오지 못하도록 막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코팅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여 말씀으로 우리 마음이 코팅되면 세상의 먼지들이 우리 마음의 정원에 있는 화초나 정원수에 붙어있지 못하고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을 통해서 우리의 입과 마음과 눈과 귀를 막을 때 세상의 먼지는 우리 마음의 정원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침묵은 우리 마음의 정원을 먼지로부터 보호하는 비닐하우스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원에서 잡초를 다 뽑아내고 외부에서 먼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대비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드는 일이 끝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예쁜 화초들과 아름다운 정원수들을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잡초를 다 뽑고 먼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예쁜 화초와 아름다운 나무들이 심어져 있지 않다면 그곳은 정원이 아니라 허허벌판이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정원도 하나님께서 오셔서 산책하시고 기쁨으로 우리와 만나시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기 위해서는 예쁜 화초들과 아름다운 나무들을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사진을 한 장 보여드리겠습니다.<사진> 이곳이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마 다녀오신 분들은 기억나실 것입니다. 경남 거제에 있는 외도 보타니아라고 하는 섬입니다. 이 외도는 개인이 소유한 섬입니다.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원단사업을 하던 이창호-최호숙 씨 부부가 1969년부터 약 30년간 지극 정성으로 가꾸어서 지금의 아름다운 외도 보타니아가 되었습니다. 이 섬 근처로 낚시를 왔다가 태풍을 만나 우연히 이 섬에서 하룻밤 민박을 하게 된 이씨가 수백 년 된 동백나무가 땔감으로 베어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해서 3년여에 걸쳐 그 섬을 모두 사 들이게 되었고, 그 섬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69년이라면 서울에서 외도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외도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는 시절에 이씨 부부는 서울에서 섬으로 내려갈 때마다 수십 년 된 나무들을 사서 옮겨심기를 반복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밀감나무를 심기도 했고, 척박한 토양에 거름을 공급하기 위해서 이 섬에서 돼지를 기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돼지파동과 겨울철에 몰아친 한파로 몇 년 동안 수고했던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지극정성으로 그 섬을 가꾸어 아름다운 섬을 만들었고, 1995년 ‘외도해상공원’이란 이름으로 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 이창호 회장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지금도 외도는 여러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가꾸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고 싶은 곳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약 4만 4천여 평이나 되는 그 넓은 땅에 온갖 화초와 아름다운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과 노력이 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허허벌판과 같은 그곳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되기까지는 그저 그 섬을 사서 대충 심심풀이로 텃밭을 가꾸듯 해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돈을 들여야 했고, 육체적인 노동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다 수없이 많은 화초들과 나무들을 심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외도 보타니아에는 800여종의 온대식물과 아열대 식물 등을 비롯해서 엄청나게 많은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고, 계절마다 피는 꽃들로 언제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외도 보타니아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외도처럼 크진 않다 할지라도 작은 정원을 하나 만들어 소유하려 해도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만들어지고, 또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노력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의 크기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외도 보타니아와 같이 거대한 마음의 정원을 가꾸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가정 집 대문 옆에 만들어놓은 작은 정원과 같은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정원의 크기가 얼마이든지 상관없이 나무나 꽃을 심어야 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가꾸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정원은 잡초들이 가득한 쓰레기더미나 먼지더미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정원에 씨를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체험하고서 ‘예수님 을 따라다니면 먹을 것 걱정 없겠구나’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한복음 6:26)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쳐주시니까 자신의 병을 고침 받고 싶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기들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권위 있는 말씀이어서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말씀을 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잘 가르치시는 선생(랍비) 정도로 생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잘 풀어주시는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그저 말씀 잘하는 분 정도로만 알고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다같이 말씀을 듣는다 하더라도 다 똑같이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 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병고침 받고 싶다는 생각에서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오늘은 어떤 기적을 행하실까?’ 궁금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은 어떤 말씀을 해 주실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그들이 다 똑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면서, 어떤 사람이 말씀을 복되게 듣고 받는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씨가 뿌려진 곳이 각각 달랐습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뿌려지기도 했고, 어떤 씨는 흙이 얕은 돌밭에 뿌려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에 뿌려지기도 했고, 어떤 씨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될 좋은 땅에 뿌려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의 말씀을 오늘 본문 바로 이어 나오는 10절 이하에서 분명하게 해석해 주십니다.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사탄에게 말씀을 빼앗긴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긴 듣지만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배의 자리에 와서 앉아있지만 마음은 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말씀을 듣긴 들어도 듣지 않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돌밭에 씨가 뿌려진 사람인데,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그 말씀을 행하다가 어떤 고난이나 시련이 닥치면 그 말씀을 포기해버리고 만 사람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겠노라고 다짐도 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나갈 때에는 기쁜 마음으로 갑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도록 호락호락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때로는 유혹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련을 주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길은 세상이 추구하는 길과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려 할 때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늘 하던 방식으로 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내게 어려움이 닥친다는 것 때문에 그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기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 돌밭에 뿌려진 씨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기뻐해도, 삶에는 말씀에 따른 열매가 없습니다. 여전히 내 생각과 내 욕심을 따라 살고, 여전히 세상적인 사고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말랐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씨앗이 땅에서 움이 돋아 자랄 때에 태양볕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곡식이나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에 태양이 없어도 괜찮습니까? 아니지요. 태양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해가 돋은 후에 시들고 말라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돌밭에 뿌려진 씨앗이 시들고 말라버린 것이 태양 때문입니까? 우리가 종종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나무들과 풀과 곡식들이 자라게 하기 위해서 태양빛을 비쳐주십니다. 그 태양볕 때문에 곡식들이 광합성 작용을 하고, 열매 맺도록 자라갑니다. 태양이 없다면 어느 곡식이든, 어떤 나무이든 제대로 자랄 수 없고 결국 죽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문제는 태양이 떠올랐기 때문에 곡식이 말라버린 것이 아니라,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린 것입니다. 그 태양볕을 마가복음 4:17절에서는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박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환난이나 박해, 시련이 있기 때문에 삶이 힘들거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곡식이나 나무가 자람에 있어서 태양볕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통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련과 박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견뎌내야만 열매가 맺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련과 박해가 따라온다는 것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가시떨기에 씨가 뿌려진 사람입니다. 가시떨기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두 번째 사람처럼 말씀을 들을 때에는 기쁨으로 듣습니다.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살려할 때에 유혹이 찾아오는데,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해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다가는 손해만 볼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 하니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불안하기도 합니다. 평소 하던 대로 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 새로운 길을 가려하다 보니 불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손해 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씨가 뿌려져 싹은 났지만, 곧 말라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네 번째 사람은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사람입니다. 좋은 땅은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작업이 필요합니다. 때로 그 밭도 길가와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밭에 아무 것도 심겨져 있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리로 지나다닙니다. 그러면서 그 밭도 길가처럼 단단한 흙덩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농부는 그 밭에 씨를 뿌리기 위해서 쟁기질을 하고 써레질을 합니다. 단단한 흙덩이를 깨서 부드러운 흙이 되게 만듭니다. 그 밭에도 돌멩이들이 있었습니다. 돌밭처럼 많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 밭에도 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 밭에서 돌멩이들을 주워냈습니다. 씨가 뿌리를 내리는데 방해되는 돌멩이들을 다 주워내서 좋은 밭이 되었습니다. 그 밭에도 잡초가 자랐고, 가시덤불과 같은 것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런 것들을 다 걷어치웠습니다. 그래서 좋은 밭이 되었고, 뿌린 씨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 예쁜 화초를 심고 아름다운 나무들을 심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화초들이 예쁜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뿌릴 꽃씨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좋은 밭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많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좋은 밭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씨를 뿌린다 하더라도 그 꽃씨는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나무를 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땅 속에 돌멩이나 큰 바위덩어리가 있는데도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나무를 심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먼저 그 돌멩이와 바위들을 제거한 후에 나무를 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햇빛과 비를 받으면서, 때로는 바람과 폭풍우가 몰아친다 하더라도 끄떡하지 않고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 좋은 나무와 화초를 심을 수 있도록 좋은 밭이 되게 만들었다면 우리는 거기에 여러 종류의 화초며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한 종류의 화초만 심어 놓은 밭을 우리는 정원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화원일 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나무라고 해서 그것만 많이 심지도 않습니다. 한 종류의 과일나무만 심어놓으면 그것은 정원이 아니라 과수원입니다.
  
에덴동산에는 한 종류의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에 보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에덴 동산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정원에 온갖 종류의 풀과 화초와 나무들이 가득했다는 말씀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외도 보타니아에 4만여 평이 넘는 그 넓은 섬에 한 종류의 나무만 심어 놓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방문하진 않을 것입니다. 수백 수천 종류의 나무며 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뿜어내고, 저마다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기에 그 섬이 유명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가고 싶은 섬이 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도 그렇습니다. 한 종류의 나무만 심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심어야 합니다. 여러 종류의 화초들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시사철 향기가 나야 하고, 사시사철 멋진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좋은 밭에 뿌려진 씨를 말씀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씨앗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예쁜 꽃과 다양한 열매를 맺는 나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정원에 기도의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예배의 나무, 찬양의 나무도 많이 심어야 합니다. 봉사의 헌신의 나무도 심어야 하고, 사랑의 나무도 심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를 좋아한다고 기도만 해서도 안되고, 봉사하는 것만 해서도 안 됩니다.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좋은 정원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신앙의 나무들을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선한 일에 열매 맺는 나무들을 많이 심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도 좋지만, 더욱 향기 나는 꽃은 이웃에게 향기가 되는 꽃내음이고, 더욱 아름다운 열매는 이웃에게 기꺼이 나눠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선한 일에 열심해야 합니다. 선함의 나무와 꽃을 우리 마음의 정원에 많이 심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4: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함의 열매를 맺는 나무를 우리 마음의 정원에 많이 심어야 합니다. 선함은 우리의 삶에 맺혀진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선행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지어드리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6: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가정들에게’라는 말씀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소홀하기 쉽습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뒤로 미루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게 말씀하십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먼저 하라고 말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하라’는 말씀은 주어진 기회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작은 것을 나누어주는 작은 실천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거창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작은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바로 선행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입니다. 
  
철길 옆에 작은 석탄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공장 울타리 옆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화물기차가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공장 주인은 가끔씩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석탄 덩어리를 삽으로 퍼서 울타리 너머 철길 쪽으로 던지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쓸모없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직원이 어느 날 보니 쓸모없는 석탄덩어리가 아님을 알고 깜짝 놀라며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사장님, 왜 쓸만한 석탄 덩어리를 담 너머로 버리시는 거예요?’ 그러자 주인이 조용하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사실 철길 너머에 가난한 할머니가 한 분 사신다네, 그런데 너무 가난해서 집에 불을 피울 석탄을 살수가 없어 기차가 지나가면 기차에서 떨어지는 석탄 몇 개를 주어다가 집에 불을 지피곤 했지. 그런데 이젠 기차가 석탄 대신에 기름을 태워 가는데도, 눈이 어두워진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석탄을 주우러 오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할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게 하려고 매일 석탄을 조금씩 던져놓는 것일세.’ 

여러분, 나 자신만을 생각하면 나누고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 가운데 조금 떼어낸다 하더라도 내 삶이 무너지거나 살기 힘들 정도로 팍팍해지진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 심겨진 선행이라는 나무가 자라서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그 가지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배고픈 나그네들이 따 먹을 수 있도록 내어준다면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정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정원에는 우리 주님께서 매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행복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나만 즐기기 위해서 만든 정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와서 쉬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정원을 만들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가장 찾아오고 싶어 하시는 바로 그런 마음의 정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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