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단 6:6-11)

첨부 1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단 6:6-11)
   
새해 첫 주일이던 지난 1월 6일 새벽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조성민씨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큰 충격과 아픔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유망한 야구선수여서 일본에까지 가서 활약을 했고, 고 최진실 씨의 남편이기도 하였는데, 그만 이렇게 안타까운 마지막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알아보니 그는 1992년에 대학에 입학한 이른바 92학번입니다. 그런데, 야구계에서는 92학번을 가리켜서 ‘황금세대’라고 부를 정도로 좋은 재능을 지닌 야구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유명한 박찬호 선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엔 임선동 선수나 조성민 선수가 더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박찬호 선수가 미국의 Dodgers 야구팀과 계약을 맺고 떠날 때, ‘박찬호가 누구야? 잘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가졌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비슷하게 시작을 하였지만, 오늘 두 사람이 서 있는 자리는 너무나 다릅니다. 박찬호 선수는 자기관리가 아주 철저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그의 생활을 전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와인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야구선수에게는 와인이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항상 질문을 많이 가지고, 창피함을 무릅쓰고서라도 배우려고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그는 어린 야구선수들을 선발해서 장학금을 전달하고는 하는데, 그 자리에서도 그들이 야구에 대해서 자기에게 질문을 한 가지씩은 꼭 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한 학생이 ‘끈질긴 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투수인 박찬호선수로서는 좀 곤란한 질문이었든지, ‘이용규 선수에게 물어 보라.’고 대답을 해서 그 자리가 웃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박찬호는 웃지 않고 정색을 하면서 ‘오늘 집에 가서 이용규 선수에게 꼭 편지를 보내라. 답장이 안 오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미리 걱정하지 마라. 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는 것이 용기다.’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배우려 한 그의 야구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바로 오늘의 박찬호를 만들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박찬호는 지금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가장 기뻤던 순간은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투수 샌디 쿠펙스를 만났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날 용기를 내어서 샌디 쿠펙스에게 다가가 따로 식사 시간을 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샌디 쿠펙스는 이제 막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린 동양인 투수와 기꺼이 함께 하여 주었습니다. 박찬호는 ‘그날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물어봤는지 모른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막대한 연봉을 받고 텍사스로 팀을 옮겼지만, 곧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먹튀라는 불명예스런 이야기를 들으며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가 김성근 감독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며, 자기의 투구 폼을 교정 받으려 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교류도 없었지만, 박찬호는 미국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라는 명예도 저버리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메이저리그 124승이라고 하는, 동양인으로서 최다승의 기록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가 좋아 했던 말 중에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때 그가 속했던 뉴욕 양키즈의 명 포수인 요기 베라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2013년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걸어가는 길에 얼마나 멋지고 좋은 순간을 많이 감추어 놓으셨을까요? 아직 우리가 맞이하지 않은 시간들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오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힘차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바로 우리의 삶의 최상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더 좋은 순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준비하여 놓으셨습니다. 오늘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앞으로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기대감... 이렇게 감사와 기대감으로 채워지는 매일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마... 당시에 오늘 우리들처럼 매스컴이 발달한 시기였다면, 모든 언론매체들의 눈과 귀가 온통 어떤 한 사람의 집에 쏠려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그의 집 맨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의 문이 열리나 안 열리나... 그가 오늘도 다른 날처럼 다락방에 올라가서 창문을 열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 이것을 온 나라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강대국 메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메대라는 나라는 다리우스가 바빌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벨사살을 암살하면서 시작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여러 사람들 중에서 다리우스가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라는...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에 그곳에서 끌고 왔던 젊은이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로부터 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거의 6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한 나라가 멸망을 하고 다른 나라가 세워지는 정변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다니엘은 아직 건재합니다. 다리오가 전국을 셋으로 나눌 때, 다니엘도 그 한 부분을 담당하는 정승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 중에서도 왕에게 가장 깊은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제 왕은 다니엘을 국무총리로 세워서 온 나라를 다스리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두 정승이나 지방의 책임자들은 도저히 그냥 다니엘을 놓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뒤졌겠지요. 어떤 비리나 좋지 못한 일이 없는가? 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다니엘을 실족하게 할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그에게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다리오 왕을 충동하였습니다. 
   
삼십 일이라는 시간을 정해놓고서는 그 시간 동안 왕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간구할 수 없게 만드는 이상한 법이었습니다. 아마 다리오 왕은 그 제안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진 모양입니다. 당시의 임금들은 자기들이 절반쯤은 신이 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법은 왕이 도장을 찍자마자 곧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 법을 어기고 어떤 신에게든지 기도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곧 사자굴속에 던져져서 목숨을 잃고 말게 됩니다. 이 법은 겉으로는 다리오 임금의 위대함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직 한 사람... 다리오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를 사자 굴에 던져 넣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제 주사위는 다니엘에게 던져졌습니다. 다니엘 차례입니다. 아마도 그는 그 과정을 쭉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미리 손을 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당신을 신으로 높이려는 법이 아닙니다.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자 굴에 던져 넣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나를 신임하고 아끼신다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마셔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가 나서서 자기를 지키려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말씀의 어디서도 다니엘이 이렇게 하였다는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다니엘이라면... 그런 유혹도 받았을 법 합니다. 삼 십 일입니다... 계속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다. 한 달 정도만 하지 말라는 것인데... 길 다면 긴 시간이라고도 하겠지만... 기나긴 인생에서 보면 한 달이라는 시간은 정말 짧은 시간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양해를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 이것은 그들이 나에게 가하는 부당한 압력입니다.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못하게 하다니요... 그래도 참 다행입니다. 영원토록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한 달이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한 달만 좀 참아 주시고 이해해 주십시오. 제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은 아주 부당한 일입니다. 한 달 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니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꼭 다락방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을 열고서 기도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이제껏 전해 내려오는 소중한 관습이겠지만, 한 달 동안만큼은 좀 다르게 기도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숨어서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님 마음으로만 기도를 하면 또 어떨까요? 겉으로는 기도하지 않는 척 하면서 속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지켜 볼 수 없는 자리에서 기도를 하든지 말입니다... 

이제 다니엘의 행동 하나하나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도대체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그가 한 행동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다니엘은,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락방은 예루살렘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v.10) ‘그는 늘 하듯이...’ 왕의 도장이 찍혔는데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늘 하듯이... 이렇게 하면 자기가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자 굴에 대한 위협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도대체 다니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가 어떤 분이시기에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인가? 사실 우리들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난 송구영신 예배 시간에 우리들은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시간을 가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하나님께 말씀드릴 소원이나 목적이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이 마치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나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하면 자신의 생명이 끝날 것을 알면서도... 늘 하듯이 자신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것도 혹시라도 사람들의 눈에 보이면 어떻게 할까? 그것을 조금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를 않습니다. 마치 자기에게 좋은 기회가 오기나 한 것처럼...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신앙이나 사랑이 인간의 얄팍한 흉계에 대하야 흥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몰래 숨어서 기도하지를 않고 여전히 다락방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을 향하여서 난 창 문을 열고서는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이 그 창문을 열었을까? 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본문에도 창문을 열었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그는 틀림없이 창문을 활짝 열고서 기도하였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그에게는 자기가 믿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일...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다니엘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신 분인지... 어떤 인간이 지어낸 잔꾀나 흉계도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개입을 할 수가 없다는 것... 자기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섬기고 믿어야 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가장 소중한 삶의 가치와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일이라는 것... 그것을 다니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다니엘의 행동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사람이 바로 마하트마 간디였습니다. 그의 비폭력 정신에 입각한 저항 정신은 자기가 가진 믿음과 신념을 지키다가 묵묵히 사자굴로 향하는 다니엘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서, 그는 다니엘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으면서 많은 위로를 얻었다고 밝혔습니다. 다니엘이야말로 세상에 살았던 위대한 수동적인 저항자들(passive resisters) 중 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평가합니다. 저는 우리들 모두가 이러한 다니엘의 신앙을 닮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다니엘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려 하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꼭 다락방을 찾았습니다. 그가 다락방에 올라간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방에는 예루살렘을 향하는 창이 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항상 예루살렘을 향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지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다니엘은 바벨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메대와 페르시아가 개국할 때까지 오랫동안을 고달픈 포로 생활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생명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쁜 중에서라도 하루 세 번 틈을 내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를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아니면 한 주간을 살아가는 동안에 몇 번이나 하나님을 바라보려 하시는지요? 다니엘처럼 그렇게 어떤 조건 속에서도 주님을 지향하고, 바라보려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충만하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야고보서 1:17) 주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이렇게 하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빛과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려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온갖 좋은 선물들과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시편42:1) 

옛날 한 신앙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목마름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시는 분은 오로지 우리의 주님뿐이십니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을 정해놓고서 자기의 중심이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그를 바라보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다니엘은 또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같으면 너무나 많이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이 나에게 대해서 하는 행동을 보면서 말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아무리 내가 밉다고 하여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살아 있는 채로 사자 굴에 던져 넣으려 하는 것인지... 이런 일이 우리들에게 벌어진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끼겠습니까? 하지만, 다니엘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늘 하듯이...’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게 없이 행동을 합니다. 이런 다니엘의 믿음이 우리들 모두의 것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다니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면 사실 우리들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요? 좀 언짢고 듣기 싫은 말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하지를 않습니다. 늘 하던 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좀 견디기 어려운 일이나 고비를 당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자 굴은 생각도 할 수 없고, 우리들의 믿음으로는 고양이 굴도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사람들의 소리에...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쉽사리 흥분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상처도 참 잘 받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늘 하듯이... 말입니다. 당장은 언짢고 마음이 흔들려도... 그냥 무시하려 하고... 평상시의 마음을 유지하려 하다보면... 우리들에게도 다니엘처럼 사자 굴이 눈앞에 버티고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늘 하듯이 당당하게 우리의 길을 걸어 갈 수가 있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간디가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려온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나를 마구 흔들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이 부조리하게 돌아간다고 하여도...  실망스러운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을 통해서 세상에 대해 말씀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 다니엘에게 가장 소중한 일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 하며, 감사를 드렸다.’(v.10) 여기에 다니엘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담겨있습니다. 그는 지금 이 일을 위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다니엘에게 ‘당신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묻는 다면 그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을 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께 무릎 꿇는 것! 이것을 위해서 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소중한 일은 내게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다니엘과 우리들의 차이점이겠지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때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만, 그것이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에게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지는 일이 있더라도 중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이라고해서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을까요? 그도 우리들처럼 사람인데 말이지요.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지금 자기가 죽을 지경이라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셨다면(막14:34). 다니엘도 그런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그가 살고 있는 목적이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설혹 다니엘처럼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런 분명한 정신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세상을 살고 있는가? 내가 세상을 살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가지신 소원과 목적을 깨닫고 뜻을 깨닫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무릎 꿇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 갈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