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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본 (요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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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본 (요 13:1-11)


못은 섬김의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못이 되기보다 망치가 되고 싶어 합니다. 못이 되어 망치에게 늘 얻어맞는 것을 싫어합니다. 망치는 힘이 있습니다. 망치는 망치를 든 사람에게 권력을 줍니다. 망치를 든 사람은 망치를 내리치면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래서 망치를 잡은 손은 무섭습니다. 그 무서운 손으로 내리칠 때마다 못은 고통을 받지만 망치는 희열을 느낍니다. 그러나 참으로 위대한 일은 망치가 아니라 못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신경득 시인은 망치 대신 못이 되고 싶다고 노래했습니다. 

“나는 망치보다는 못이 되고 싶어/
얻어맞으면 맞을수록 깊게 깊게 박혀 어둠 속에 숨어서/
짧게 또는 길게 받쳐 주는 힘이 되고 싶어/
한 개 못이 되어 더러는 걸려 주는 힘이거나 버티어 주는 힘이 되고 싶어”

못은 자기를 감춥니다. 못은 망치에게 맞으면서 깊게 깊게 박혀 어둠 속에 자신을 숨깁니다. 못은 자신을 감추며 받쳐주는 힘이 되고, 버티어주는 힘이 되어 줍니다. 
저는 못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고, 발에 못을 박았던 망치는 누구를 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대고 내리쳤던 망치는 구주를 못 박는 줄을 차마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쳐준 못,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못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프게 했던 못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고통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못이 한 일은 힘들었지만 인류를 위해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못이 한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못의 역할은 망치로 맞아가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머물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못은 고통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섬겼습니다. 못의 고통과 아픔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사랑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못처럼 사셨습니다. 망치에게 얻어맞고,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얻어맞으면 맞을수록 깊게 깊게 박힌 못처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망치를 손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건을 손에 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망치가 아니라 못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못처럼 우리 영혼을 받쳐주는 구주가 되셨습니다. 고통스런 인생길에서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망치의 길이 아닙니다. 못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고후 12:9은 말씀합니다.
아이작 펄만은 네 살이 채 되기 전에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이올린에 전념함으로써 그 역경을 극복하였습니다. 그 후로 줄곧 그는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는 다리를 사용할 수 없었지만 음악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참으로 헌신이 돋보이는 감동적인 사례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종들은 이와 비슷한 헌신을 하나님께 보였습니다. 그들은 신체 일부분의 능력을 상실하여 고통을 받았지만 다른 방법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영감을 얻었습니다. 예를 들어,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암 부스는 자신이 장님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절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긍정적으로 앞을 내다보며, 그는 자기가 볼 수 있었을 때 그리스도를 섬겨왔으며, 장님이 되더라도 예수님을 최선을 다해 섬길 것이라고 동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상실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힘을 다해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 너머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16절)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려할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이시여, 우리의 한계가 어떤 것이든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소서.

주여, 제게 깊은 뜻을 주셔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당신을 지속적으로 신뢰하게 하시고
고난, 근심, 분쟁 속에서도
날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소서
우리를 구속하는 어떤 상황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는 일을 제한할 수 없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과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룬 줄을 아셨습니다. 사람이 가져야 할 지혜 가운데 하나는 바로 때를 아는 지혜입니다. 요 12:27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 민망한 때를 모면할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죽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지금이야말로 죽을 때가 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십자가를 향해서 나가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어려움에 부닥칠 때가 있고 교회도 난처한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될 수 있으면 빠져나갈 궁리나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나를 보내신 것은 이때의 어려운 일을 잘 수습하기 위해서 나를 이렇게 보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해야 참 일꾼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일해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지금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책임하게 나 몰라라 하고 제자들과 자기 사람들을 버려두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곳은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미 천국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이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데 우리가 날마다 천국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천국과는 상관없는 세상 일에 매여 살고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감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을 아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주님이 잘 아십니다. 우리 혼자서는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우리를 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고 하는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보셔요. 비록 삶은 온전하지는 못하다고 해도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우리가 잘 해보려고 얼마나 수고하고 있는지 주님이 아십니다. 어찌 보면 일만 만들었는데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였구나 착하고 충성된 종아. 우리가 좋을 때만 아니라 여전히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주님을 기억하는 그 마음을 주님이 아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주님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능력을 더하여 주시길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오래 주님을 믿었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리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그 은혜가 날마다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마귀가 어떻게 해서든 우리 앞에 걸림돌을 놓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가 백 가지를 다 가졌다고 해도 우리가 가지지 못한 한 가지를 전부인양 포장해서 우리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기에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아주 간교한 짓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악한 마귀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오직 하나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계신데 주님과 함께 하고 말고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시겠습니까? 그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주님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주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건 내 생각으로 내 경험으로 내 환경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실패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는 설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 백부장이 자기 종을 위해 주님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내 종이 중풍병으로 누워있으니 고쳐주옵소서.” 주인이 하인을 위해서 어떤 부탁을 한다는 것이 그것도 이스라엘 땅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자기 집의 하인을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고 하는 것부터가 아주 특이합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이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니 “주께서 이방인된 내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니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가서 만나야 고쳐주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백부장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저도 남의 부하로 있고 또 제 밑에도 부하가 있어서 잘 아는 바지만 부하는 상관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그러니 주께서 말씀만 하십시오. 주께서 명령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네 믿음대로 되어라”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때로부터 그 하인이 나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현실이 되도록 만드는 역사가 있습니다. 너희가 마음으로 믿고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하면 너희 말한 대로 되리라고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되 우리의 믿음과 고백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쉽게 넘어질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령 없이 세상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강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겠지만 우리는 악한 마귀와 대적해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도권이 마귀에게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에 매여 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능력으로 이 죄의 주도권을 끊어내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데 누구에게 그런 능력이 나타나느냐 하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요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항상 유지하며 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120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령을 받고 날마다 충만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깨어 있어 기도하여야 하는데 이런 기도의 능력 역시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는 시간 시간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되 이를 위해 더욱 주님 앞에 예배하며 말씀과 기도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주님을 바로 알고 말씀을 따라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의 손을 붙잡아야 됩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것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으로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들이야말로 바로 주님의 사람들이요 따라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것도 잠시 사랑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좋을 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를 세워주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 할 때는 좋아하다가 조금 아니다 싶으면 매몰차게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은혜 아래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을 통해서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능력을 더하여 주실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주님이 있는 곳 예수님의 영광의 자리에 우리도 함께 있게 해 주시겠다고 요17:24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 맞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보배롭게 선택하셨고 보배로운 백성 삼으신 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말은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그 어떤 이유로든 돌아서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결코 주님에게 등을 돌리지 않아야 됩니다. 만약 등을 돌리게 된다면 그건 곧 마귀를 초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요 그 결과는 죽음과 파멸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시고 나를 택하시고 나를 충성된 일꾼으로 여겨 직분을 맡기심을 감사하며 충성함으로 주님의 깊으신 뜻 즉 우리에게 복 주시고 우리를 복되게 만드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대로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섬김의 사랑입니다.
사무엘 브랭글 목사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한 모습을 보고,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기 위해서 사역하고 있던 교회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구세군에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 가서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한 무더기 쌓여있는 흙투성이의 장화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생각하며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는 일생동안 많은 이들을 섬김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표기도, 부서별로 하는 기도, 개인적인 기도에서 “저로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하면서 높은 위치에서 호령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머리가 될 수 있는 자는 꼬리에 있는 자들을 섬기는 섬김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섬김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제자 둘을 보내 유월절 음식 먹을 곳을 준비하게 하신 예수께서 이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십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팔려고 마음먹은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예외 없이 닦아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죄의 도리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을 하셨는데 원래 이게 식사 중간에 발을 씻는 것이 아니고 식사하기 전에 그 집에 들어오는 입구에서 발을 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 하는 일이냐 하면 종이 하는 일입니다. 종이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드리게 돼 있는 것이고 종이 없는 집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씻어 드리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이 나라의 전통으로 보아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얼마나 놀랍고 또 송구스럽겠습니까? 더욱 예수를 팔려고 했던 가룟 유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를 팔려고 하고 있는데 그런 자기를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다가 발을 씻어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그는 발을 내밀고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어찌 사람으로서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양심에 화인 맞은 자라는 말도 있듯이 그의 양심이 죽어 있기에 그는 이 좋은 기회에고 회개를 하지 못하고 맙니다. 결국 나중 그가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팔았음을 후회하고 뉘우쳤지만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고 말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죄악의 길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깨닫지를 못합니다. 결국 후회할 때는 때가 늦어 회개할 기회조차 잃게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쨌든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가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어주면서 차례차례 돌아가는데 베드로 차례가 됐는데 베드로가 말하기를 “선생님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희가 선생님의 발을 씻어 드려야지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니요?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절대로 제 발은 씻기지 못하실 겁니다. 저는 허락지 않겠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성격이 다른 사람보다는 좀 쾌활하기도 하고 직선적이기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생각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표현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라는 말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네 발을 이렇게 씻겨주지 아니하면 너와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래 두 번째 충격을 받은 겁니다.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씻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에 첫 번째 충격을 받았고 두 번째 충격은 만일 예수님이 나를 씻어주시지 아니하면 예수님하고 나하고 상관이 없게 된다는데 대해서 놀라운 충격을 받은 겁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발을 씻고 안 씻고 하는 게 뭐 그다지 중요한 일이라고 상관이 있고 없고 하는 문제에까지 이게 연결이 되는 것인가?” 이건 정말 놀라운 얘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하고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은 베드로로서는 더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에게 발을 씻으라고 우두커니 내 놓고 앉아있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주님하고 상관이 없어진다는 것은 더 감당할 수가 없는 중대 사건입니다. 그래서 “아 그렇다면 발뿐이 아니라 그냥 온 몸을 전체를 다 씻어 주십시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미 목욕은 했으니까 발만 씻어도 돼” 그렇게 말씀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죄의 신학, 사죄의 도리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암만 주여 주여 하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주의 이름으로 능력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이런 활동 저런 사업을 한다고 암만 떠벌리고 돌아 다녀도 주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사실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일차적으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죄의 문젭니다. 죄가 문제되지 아니하면 구원도 문제가 되지 않고 구원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구주도 필요가 없게 되고 구주가 필요 없다고 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을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죄란 인간이면 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인간이 도달해야 될 목표점이 있는데 그것을 명중을 못시키고 빗나가 버렸다, 탈선을 했다, 그것을 하마르티아 죄라고 합니다. 그럼 그 죄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느냐 하면 죽은 사람이 마치 자기 자신을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처럼 죄인이 자기 자신의 죄를 씻거나 자기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죄가 없는 이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인데 죄인인 다른 인간을 구원할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죄는 곧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는 하나님께로의 복귀이고 이건 내 힘으로 될 수는 없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내 힘으로 건너갈 수 없는 함정이 생겨 버렸고 내 힘으로 파괴할 수 없는 장벽이 생겨 버렸습니다. 그러니깐 내가 내 힘만 가지곤 하나님께로의 복귀라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거기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그 함정을 메워주고 누군가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장벽을 헐어서 길을 열어주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그 중보자도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자격이 구비가 돼야 되는데 하나는 신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과 통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는 인성을 가지고 있어야 인간과 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며 인간이고 인간이며 하나님인, 신성과 인성을 같이 지니고 있는 존재는 있을 수가 없어요. 천사는 그런 점에서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마는 인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이들은 인성은 가지고 있지만 신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시며 인간이고 인간이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통하고 인간에게도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을 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도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는 게 죄입니다. 그래 병자가 병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나와서 고통을 호소할 적에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딸아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런 말씀을 하셨지 네 병의 원인이 없어졌다는 얘기부터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씻고 안 씻는 것은 절대적인 문제입니다. “죄를 씻지 않으면 너하고 나하고 상관이 없다.” 죄를 사함 받지 않고는 누구도 예수하고 아무 상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야 돼. 씻지 아니하면 네가 나에게 씻김을 받지 아니하면 너하고 나하고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베드로가 깜짝 놀란 겁니다. 그래 “온 몸을 다 씻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목욕하듯 씻는 것이고 하나는 발 씻듯 씻는 것입니다.” 이건 목욕하는 거와 같은 회개가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30세가 되도록 하나님을 모르고 암흑 가운데 살아온 사람이 30세가 되어서 비로소 믿음에 눈이 떴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을 우리 심령에게 뿌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회개인 것이요 이를 가리켜서 이미 목욕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의 뿌리를 뽑아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도 모르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발을 씻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 자녀다운 삶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아름다운 삶을 다 함께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소수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하던 시대에 요하네스버그 시내에 있는 흑인교회 성시온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기 위해 세족식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백인이 나타나 한 여인 앞에 가더니 무릎을 꿇고 그 여인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여인은 물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백인 남자는 흑인 백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존경하던 올리브 판사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가 발을 씻어 준 여인은 올리브 판사 집에서 20년 간 종살이를 한 종이었습니다.

여인이 깜짝 놀라 사양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의 중심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 안에서 흑인과 백인이 무슨 차이가 있으며 또한 주인과 종의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 모두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시 너무 충격적이었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올리브 판사는 판사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성도분만 아니라 남아공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상적, 인간적 자존심이나 권위나 명예 같은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겸손과 희생의 실천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허리를 굽혀 손수 대야에 손을 넣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 라고 본을 보이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겸손하게 죄인들을 섬기며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인들을 감싸안아주는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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