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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의 본분 (요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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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본분 (요 12:28)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삶의 목적은 육상선수가 달려가는 방향과 같습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못하다면 이는 마치 달리는 선수가 방향 없이 달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목적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결정되어 집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청년이 대도시에 와서 대학을 다니다가 방학을 맞아 시골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농사철이라 아버지가 소를 몰고 힘겹게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도와드리고자 아들이 쟁기를 잡았습니다. 한참 밭을 갈다가 뒤를 돌아보니 밭이랑이 꾸불꾸불해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그것은 목표를 정하지 않아서 그렇다. 저 건너편에 어떤 목표를 하나 정해서 그것을 바라보고 소를 몰아 밭을 갈아야 한다.”하고 일러주었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건너편 산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밭을 갈았습니다. 잠시 후 밭이랑을 뒤돌아보았더니 이번에도 밭이랑이 꾸불꾸불했습니다. 이상하여 아버지께 다시 여쭈어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너 어디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느냐?” “저 건너편의 풀을 뜯어먹고 있는 검은 소였습니다.” “이 녀석아, 그 소는 이리저리 다니며 풀을 뜯어먹고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니 그렇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목표로 정해야 밭이랑이 바르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건너편 산에 있는 바위를 바라보면서 밭을 갈았습니다. 그제야 밭이랑이 곧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마치 소를 앞세워 밭을 가는 농부와 같습니다. 목표가 없는 삶은 그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가 꾸불꾸불하여 보기에 흉하여 헛된 세월을 보낸 사람입니다. 아무 목적 없는 방탕한 삶, 하루살이 이생을 살아가는 삶이 그렇습니다. 
건너편 산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바라보면서 밭을 갈았을 때 밭이랑은 역시 꾸불꾸불했습니다. 이 세상의 움직이는 것, 즉 변화무상한 세상의 것들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의 발자취는 역시 부끄럽고 후회를 남기게 됩니다. 

몽골의 영웅 징키스칸이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내 시신을 담은 관 좌우에 구멍을 내고, 양손을 그 구멍 밖으로 내어 상여가 지나갈 때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빈손으로 가는 내 모습을 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 부귀와 명예를 위해 살아간 삶은 이처럼 후회를 남기게 됩니다. 

움직이지 않는 바위를 목표로 삼고 밭을 갈았을 때, 밭이랑이 곧고 쓸모가 있었듯, 변하지 않는 것을 목표한 삶이 아름답고, 보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권력도, 명예도, 재물도 다 움직입니다. 이 세상에는 움직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올바른 삶의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전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눈앞에 두신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 가시기전 예수님은“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28)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한 점 후회도 없으셨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인류의 무릎이 주님 앞에 꿇어 섬기는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살아가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12:26에 말씀하시기를“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1. 인간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우주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걸작 품입니다. 왜 인간을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이사야 43:7에 말씀하시기를“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하셨습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 무엇임을 밝히신 아주 소중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명예나, 권세나, 부귀영화가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 살아가면 꾸불꾸불한 밭이랑같이 부끄러운 발자취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높은 권세와 명예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축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88 서울올림픽에서 육상 삼관왕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입니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가운데 미국 NBC방송의 한 기자가“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으로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재능이 무엇입니까? 그 재능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둔 순간에“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2:27-2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세상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으신지라 십자가 지는 것이 너무도 괴로우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27에“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안일을 요구하는 육신의 생각을 억누르시고 다시 기도하시기를“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요한복음 12:2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지실 각오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해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할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들도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기 전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되는 우상을 섬기며, 죄를 범하되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들이 시간시간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당시의 사람들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들은 자기 자신의 속사람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욕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욕망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대하여 요한복음 10:1`8에 말씀하시기를“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을 채포하러 온 사람들을 향해 제자 베드로가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복음 26:52~54)하셨습니다. 육신의 욕망을 스스로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힘없는 사람처럼 그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므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12:26)하셨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어 구원받고 축복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육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하셨습니다. 나를 비운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내안에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3)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의 전설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석유 재벌이었던 록펠러는 30대에 이미 미국의 최대 재벌이 되었고, 40대에는 세계의 최대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창 나이인 50대 초반에 그는 중한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약도 그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신문사들은 록펠러 사망의 특종 순간을 놓치지 않고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날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거리며 괴로워하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성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성경을 폈습니다. 

그때 가슴깊이 와 닫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35)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록펠러는 깊이 깨달았습니다.“아! 그렇다.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아왔구나! 내가 재산을 모을 줄만 알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줄을 몰랐구나. 이제 이 돈을 보람되게 써야 되겠구나!”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았습니다. 록펠러는 비서들을 불러 가장 보람되게 돈을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토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재산을 드려 세운 것이 록펠러 재단입니다. 인류의 복지를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 페니실린과 606호라는 항생제를 개발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록펠러는 24개 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헌납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배당이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 처치입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갔습니다. 이후 록펠러의 건강에 기적 같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다 빠졌던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그를 괴롭히던 불면증이 사라졌습니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으리라 예상했던 록펠러는 건강이 회복되어 9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가장 못된 방해꾼이 누군지 아십니까? 내안에서 나를 위하려는 내 자신입니다. 내안에 있는 나를 죽여야 하는데 이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안에 있는 내가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는 나를 방해합니다. 내안에 있는 내가 나타나 하나님보다 내가 영광을 받으려 합니다. 내가 영광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고 맙니다. 

사도행전 12:22~23 말씀에“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고 나를 향해 박수치는 세상 영광을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의 창설자인 요한 칼빈은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나를 위해서는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는 것은 서양 사람들의 상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석마저 없게 한 칼빈의 무덤은 지금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다 세례 요한의 마음처럼 “그는 홍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심정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썩어져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내 욕심, 내 이기심, 내 교만 등 이러한 속사람이 죽어질 때 비로소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33 말씀에“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하셨습니다. 나를 위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유익이나 내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면 이웃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죽여,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들의 구원을 이루셨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구원을 우리들이 전파해야 또 다른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본받아 내 속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원리가 바로 조금 전 말씀드린 말씀처럼“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린도전서 10:32-33)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운 삶, 자기의 속사람을 죽인 삶,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신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삶의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로 통해 이웃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주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 행복이 가득할 뿐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이름은 길이 남아 후대에 본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오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살아오셨습니까?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인간의 본분을 행하는데 가장 못된 걸림돌은 내안에 있는 나 자신입니다. 나를 나타내어 과시하고,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세상적인 욕망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하셨습니다. 나를 비운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내안에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3)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부인하는 것은 나의 다짐이나 각오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나를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안에 계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혜로 내안의 나를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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