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접을 땅에 쏟는 재앙 (계 16:17)

첨부 1


대접을 땅에 쏟는 재앙 (계 16:17)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재앙의 심판 소리가 요한에게 들려왔다. 이는 세상에 대한 최종적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곱 나팔 재앙에서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재앙 대신 구원을 받은 노래(계11:15)를 먼저 보여주었던 해설이 계15:8까지 계속되고 계16:1 본문에서 드디어 대접 재앙이 쏟아진다. 

일곱 나팔 환상의 재앙 규모보다 일곱 대접 환상의 피해 규모는 극적이고 더 증가되고 있다. 즉 일곱 나팔 재앙에서는 땅(계8:7), 바다(계8:8~9), 강물(계8:9~11), 해와 달과 별들(계8:12)의 삼분의 일이 훼손된다. 그런데 일곱 대접 재앙으로 땅(계16:2), 바다(계16:3), 강과 물의 근원(계16:4)이 모두 재앙을 입는다. 

그런데 여기서 일곱 나팔 재앙과 일곱 대접 재앙의 초점을 말한다면 일곱 나팔 재앙 시리즈는 신실하지 못한 자들을 향한 재앙이며 그들이 돌아서는 회개에 초점을 맞추는데 있다. 그러나 일곱 대접 재앙 시리즈는 다르다. 이어지는 재앙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심판하는데 초점이 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 혼돈을 한다. 

그러므로 일곱 대접 재앙은 대상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향한 것이 아니다. 일곱 대접 재앙의 심판의 대상이 짐승의 보좌와 그의 나라에 임하는 것이다. 그 정점의 하이라이트는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이고 그 무너지는 도성 바벨론의 멸망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이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6장 자체의 증언이다. 

또 일곱 대접 재앙의 이야기가 출애굽기 7~10장에 나오는 10가지 재앙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는 출애굽의 재앙 이야기를 안다. 출애굽 재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출애굽 재앙의 특징은 첫째, 애굽인에게만 재앙이 내렸고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내리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의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의 이야기는 애굽에만 재앙이 내리지 않고 애굽을 넘어 온 세상의 1/3을 향한 재앙이고 온 세상 전체를 향한 재앙으로 확대되는 이야기로 애굽을 뛰어넘는 심판으로 설명되지만 출애굽 재앙의 모습으로 심판을 예고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심판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즉 출애굽 재앙이 하나님의 백성과 애굽인들을 구별하여 임한 것처럼 재앙 시리즈를 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심판도 하나님의 백성과 사단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구분하여 임함으로써 성도들을 해방하고 승리의 노래,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재앙의 실제 목적이라는 것이다.  

출애굽 재앙의 특징은 둘째, 과거 히브리 민족의 이야기이지만 오늘 우리의 시대에 거울이 되어주는 이야기이다. 출애굽기는 구원과 해방, 자유의 책으로 마지막 때도 우리를 건져주실 묵시의 책과도 같은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지는 재앙의 시리즈 속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하신 목적이 있다는 분명한 출애굽기적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거울로 삼고 결론부터 언급한다면 세 종류의 인, 나팔, 대접의 재앙 시리즈는 하나님의 심판이 완전히 심판할 자를 향하여 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접 재앙은 사단과 짐승을 따르는 자에게 임하는 재앙인 것이다. 이제 분명해졌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재앙에서 제외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을 향한 충절에 대한 믿음과 인내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배교하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짐승에게 경배하지도 말고 신앙의 사람으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견딜 이유, 말씀을 지킬 이유, 그리스도인으로 인내해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눈으로 천사가 대접을 쏟을 때 일어나는 재앙을 보자.
오늘은 일곱 대접을 쏟는 재앙을 다 볼 수 없다. 먼저 첫째 천사의 대접 재앙을 보자.
  

첫째 천사의 대접 재앙 (계16:2)

계16:2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고 하였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쏟는다”는 단어를 계속 보게 된다. “쏟으라”가 1번, “쏟으매”가 6번, “쏟으니”가 1번 나온다. 이는 “쏟아붓다”의 헬라어 ?κχ?ω은 전문적인 종교적 언어가 아니지만 신에게 바치는 헌주를 쏟아붓는다는 제의적 의미로 쓰였다. 그래서 대접이 쏟아붓는 포도주와 관련이 있다. 대접에 담긴 것이 쏟아부어진다는 것은 환전히 부어지는 것, 거기에 남긴다거나 적당히가 없는 것이다. 대접 재앙은 이런 의미로 언제나 무서운 심판의 그림이다. 

렘1:13에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라는 표현은 무엇인가? 렘1: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쏟아부어지는 그림이다. 렘7:20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여기서도 부어진다는 것이 강력한 심판, 아주 무서운 심판을 나타낸다. 렘10:25에도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붓는다는 것이 곧 심판이다. 

그 첫째 심판의 재앙의 대상은 이미 설명해 드린대로 사단에게 속한 이들이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다. 짐승의 표를 받아야 했던 이유는 짐승의 표 없이는 매매를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 우상에게 경배를 했던 이유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짐승의 권세를 받은 둘째 짐승, 거짓 선지자가 미혹했기 때문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경제가 걸려 있으니 어찌할꼬. 배부름을 위해 영혼을 파는 것이다. 배부름을 위해 거룩을 파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듯한 권세와 능력을 보이는 이적으로 미혹하니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 흰 옷 입은 보혈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은 거절도 못하고 사단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심판의 날에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난 것이다.

우리는 미혹을 당하고 유혹에 속아서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이미 계14:11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이 경고는 잊어서는 안된다. 당장 매매를 하게 되는 편리함, 그 손쉬움에 속아버리면 잠깐의 편리함이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곤고함으로 되고 만다. 

계16:2에서 그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난다는 것, 그 아픔도 제대로 호소하지 못하는 종기다. 어떤 피부병, 암덩어리인지는 모르나 다섯 번째 천사가 대접을 쏟는 계16:10~11에 가서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라고 한다. 이것에 대해 Kraft라는 주석학자는 “첫 번째 재앙을 통해 오른손이나 이마에 새긴 짐승의 표가 악하고 독한 종기로 바뀐 것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마에, 오른손에 표를 받는 일이 대대적으로 캠페인 되면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마에, 손목에 붙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으면 그것이 심판의 날에 악성 피부병, 독한 종기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재앙은 출9:9~11에 나오는 여섯 번째 재앙을 연상시킨다. 모세가 화덕의 재 두 움큼을 바로의 목전에서 날릴 때 그 재가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는 재앙과도 비슷하다. 허나 이 종기의 재앙이 온 세상에 미치나 신앙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믿으라.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이나 신앙을 지키면 대접을 쏟는 첫째 재앙이 무관하다. 허나 우상 숭배자들은 종기 재앙을 피할 수 없다.

본래 성경이 보여주는 원리는 같다. 창세기 7~8장에 기록된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도 심판을 조롱하고 믿지 않던 자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멸망의 도구가 되었고 심판의 경고를 듣고 믿은 노아에게는 구원의 도구가 되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성 심판도 심판을 조롱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황 불비가 멸망의 도구가 되었다. 여호수아 시대에 여호수아 6장에 나오는 여리고 도성의 무너짐도 심판의 날을 알지 못하고 있던 자들에게는 최후의 순간이 되었다. 하지만 약속의 붉은 줄을 신뢰하고 믿고 기다린 자에게는 구원의 순간이 되었다. 

우리는 믿고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요청 앞에 서 있다. 시대가 악해지고 몹쓸 질병이 나돌고 수십 만이 죽어너어지는 쓰나미의 비참함, 기후 변화와 인간의 무정, 무자비한 모습들, 마지막 때의 징조들을 접할 때마다 깨어 있어 말씀대로 살려는 영적 각성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오늘 회개하고 오늘 돌이키자. 대접 재앙이 시작되면 회개라는 것은 없다. 완악한 그들에겐 오직 하나님 비방만이 있다. 

‘하나님이 이럴 수 있는가? 하나님이 무슨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인가?’

그러나 이렇게 되어야 한다. 신실한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기에 대접 재앙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라 믿기에 장래의 소망으로 믿고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날이 오면 다 뒤바뀐다. 득세하는 악은 처벌되고 신앙 때문에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겪은 자들에겐 구원의 손을 보게 된다.   

나는 요사이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이란 책을 보았다. 북한 노동당 간부가 예수를 믿게 된 과정과 그와 함께 예수를 믿고 산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고 순교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성경책을 구해오다 죽은 성도, 전도를 받고 전도자가 되어 살해당한 전용석, 옥중에서도 신앙을 지킨 이 김길남이란 이름으로 기록해 간 그 간증은 북한 성도들의 믿음과 기도가 얼마나 신실한 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의 순교를 각오한 신앙 때문에 남한 교회가 복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개끗하고 정결하게 순전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자신을 말씀과 보혈로 단장하고 그저 감사와 감사로 무장하고 주를 믿고 따르는 자는 나서야 하겠다. 

일곱 대접 재앙의 날! 그것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날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소망과 승리와 약속을 보는 날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