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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내 앞에 그 보좌가 있다 (행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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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그 보좌가 있다 (행 1:9-11)

1. 우리는 지금 '사도신경'의 고백을 따라가며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고백은 이것입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중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것도 그렇고,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다는 것도 그렇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주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입니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이 고백을 제대로 이해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 듭니다. 절대 다수는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반면, "승천? 이 무슨 신화 같은 소리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이 고백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주 어느 한 곳으로 이사 가신 것처럼 믿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사람이라면 이 셋 중에 어느 하나의 경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해하기 어렵다 하여 외면하는 것도 옳지 않고,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에게 인생을 걸고 산다면, 이 고백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기 위해 한 번쯤 진지하게 씨름을 해보아야 합니다. 

이 고백을 붙들고 씨름하기 전에 먼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부활에 대해 말씀 드리면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셨고 하나님이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 세계가 전부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일 받아들인다면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 즉 '세계관'(world-view)이 변하지 않으면 이 고백은 아무 의미가 없거나 전설처럼 들릴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좋아하는 과학자 김용준 박사에 대한 서평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과학>이라는 책에 대해 천문학자 이명현 박사가 글을 썼습니다. 김용준 박사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김용옥 박사의 형입니다. 자기 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김용옥 박사가 "그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라고 말하는 바로 그분입니다. 김용준 박사는 경건한 기독교인입니다. 저는 그분의 글도 읽었지만, 과학과 신앙에 대한 강의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이명현 박사는 김용준 박사의 사상을 높이 칭찬했는데, 딱 하나, 트집을 잡습니다. 김용준 박사가 자신의 과학적인 사고를 자신이 믿는 기독교에는 적용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기독교적인 인식의 한계 안에 갇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명현 박사는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기독교...그것은 그의 자산이자 그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인식의 벽 같은 한계일 것이다. 

저는 이 문장에 며칠 동안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 동안 제 마음속에 떠나지 않았던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인식을 어떤 한계 속에 가두는 '구속자'인가, 아니면 유물론적인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 주는 '해방자'인가?" 제가 보기에는 이명현 박사의 무신론과 유물론이 오히려 인식의 벽이며 한계처럼 보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세계는 물질계를 포함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신비로운 세계입니다. 

유물론적인 인식의 한계 안에 갇힌 사람은 부활도 믿을 수 없고, 승천도 믿을 수 없습니다. 보는 것으로만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만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반면, 믿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물질 세계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도 그리고 승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씨름해 볼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2. 먼저, "하늘에 오르시어"라는 고백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고백은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기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승천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은 이것이 유일합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40일 동안 사도들과 신도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의 전통에서 보면, 40일은 특별한 기간입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산에 머물며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 엘리야는 40일 동안 호렙산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 나가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예를 다 들 수 없지만, 이 세 가지 예에서도 충분히 드러나듯, 성경에서 40일은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기간(transitional period)입니다. 그 전통에 따라 우리는 지금 40일의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40일은 기도와 묵상과 금식과 봉사를 통해 부활의 아침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기 이전에 40일을 지내셨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40일째 되는 날,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몇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그리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대목을 누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9절)

누가는 여기서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으며,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수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화폭에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 하니 만화 같아 보입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화가라 해도 달리 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화폭에 담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분이 "들려 올라가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사건을 우리 말로 '승천'이라고 부릅니다. '오르다'라는 뜻의 '승'(昇)과 '하늘'을 뜻하는 '천'(天)이 합쳐진 말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또 무슨 뜻입니까? 전래 동화에 나오는 선녀처럼 둥실 두둥실 떠올라 우주 한 편에 있는 장소로 이사 갔다는 뜻입니까? 

이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부활하신 주님이 더 이상 육신의 한계 안에 갇힌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은 1차원 시간과 3차원 공간을 넘어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간 사건입니다.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가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물리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사실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을 가리키는 '비유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차원으로, 원래 있던 자리로, 요한복음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옮겨가셨다는 뜻입니다. '장소'를 옮긴 것이 아니라 '상태'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오르시어"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새가 날아다니는 창공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의미로 풀자면,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가셔서"라고 고백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던 주님께서 다시금 당신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진실을 전하려면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을 언어로 담을 때 사용하는 것이 '비유 언어'입니다. 문제는 '비유 언어'를 '사실 언어'로 오해하여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전설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3. 다음,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고백을 생각해 보십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비유 언어입니다. 

장로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곧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보좌가 하나 놓여 있고, 그 보좌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계 4:2)

이렇게 적었다고 하여 우주 어느 곳에 공중에 떠 있는 왕좌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분이 보좌 위에 앉아 계신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온 우주에 대한 그분의 주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가야바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예수님은 "그대가 그리스도요?"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믿지 않을 것이요, 내가 물어보아도, 여러분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부터 인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오. (눅 22:67-68)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 상 첫 순교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산헤드린 앞에서 즉결 심판을 받고 투석형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날아오는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은 자신에게 돌을 던지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행 7:56)

이 구절을 읽고 "어, 앉아 계시다고 했는데 왜 스데반은 서 있다고 했을까요?"라고 따지는 분은 없겠지요? 복음을 위해 순교한 스데반을 하나님의 품으로 영접하기 위해 서 있는 모습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비유이듯, '보좌 우편'도 비유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오른쪽'은 특별한 관계를 뜻합니다. 흔히 쓰는 말 중에 '나의 오른팔이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친밀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른쪽'에는 이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 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시 16:11)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성부 하나님과 같은 차원에 계시다는 뜻이요, 성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 안에 잠시 오셨던 주님은 다시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가신 것입니다. 


4.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혹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어,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이 이 세상에는 없나?"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물질 세계에만 갇혀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오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질 세계에서는 한 곳에 있으면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는 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육신이고 물질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이 땅에는 없다고 말한다면, 여전히 부활하신 주님을 물질 세계 안에 갇힌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부활은 물질 세계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도 역시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 가셨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원하신다면 당신을 물질 세계 안에서 나타내 보이실 수 있지만, 그 안에 갇히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뛰어 넘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이곳에는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나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주 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눈을 뜨면 바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은 다른 곳으로 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신에 갇혀 있다가 부활로써 영적인 존재가 되었고 승천을 통해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간 예수님은 그 전보다 더 이 세상에 가까이 계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진리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려오셨던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 분이십니다. (엡 4:10)

"만물을 충만하게 한다"는 말은 온 우주에 당신의 임재로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의 모든 곳을 당신의 임재로 채우십니다. 그러므로 승천으로 인해 주님이 멀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계실 때는 한 곳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시간의 한 지점에만 묶이셨지만, 이제는 언제 어디나 누구에게나 만나 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을 계속하여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장 10절에서 승천하신 주님은 그 이후에 성령을 통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믿는 이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살아생전에 그분과 함께 지냈던 것보다 승천하신 후에 더 친밀한 방법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때로 손으로 잡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어서 답답했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는 한, 과거 갈릴리에서 그분과 함께 지낼 때보다 더 깊은 차원의 사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때로, "아, 예수님 시대 사람들을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님을 실제로 보고 그분에게 직접 배운 열 두 제자들은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그럴 것 같습니다만, 제자들이 제대로 믿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입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을 때는 그들은 끊임없이 오해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을 때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제자답게 그리고 사도답게 믿고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관한 한 우리가 사도들보다 불리한 상황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면, 우리도 사도들처럼 믿을 수 있습니다. 


5. 저는 지난 주간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님'에 대해 깊이 묵상했습니다. 묵상할수록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분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를 느끼게 되고, 느끼는 정도만큼 제 마음이 설렜습니다. 제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존재를 통치하십니다.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를 모두 통틀어 그분의 다스림에서 벗어날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탄과 그 하수들인 귀신들까지도 우리 주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그분을 저는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한 편으로는 죽을 만큼 두려운 일입니다.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지구, 지구의 먼지와도 같은 내가 온 우주의 왕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그 사실을 제대로 느낀다면, 숨이 멎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 앞에 몸을 웅크리고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 5:8)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가 그분 앞에서 떨어야 할 모든 이유를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치워 버리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를 모두 통치하시는 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언제라도 나를 만나 주신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흥분해야 합니다.

지난 주, 3부 예배에 유명한 가수 한 분이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배를 드리러 계단을 올라오다가 사인을 해 달라는 교인들 때문에 예배에 늦었다고 합니다. 수수하게 차려 입은 그분이 유명한 가수라는 것이 확인되자 이곳 저곳에서 술렁거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센터빌로 가는 중에 제 아내가 그럽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설마 이보다 더 흥분하겠지?" 저는 무심코 대답했습니다. "그럴까?"

안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지금 설레지 않는다면, 오늘 몸을 입고 우리 중에 오신다 해도 우리는 연예인을 만났을 때만큼도 흥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 스스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내 마음은 얼마나 설레는가?"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묵상하다 보니, 내가 어떤 분을 주님으로 믿고 의지하고 고백하는지를 더 깊이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예배 중간에 우리 중에 오시지 않아도 그분을 알고 그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렙니다. 설렐 뿐 아니라 마음 깊은 평안과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 무엇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알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저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흘 길 인생을 가다 보면, 곤고한 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약해져서 악한 영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면증으로 인해 밤이 너무도 길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삶의 터전이 한 번에 꺼지는 듯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누구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의 이름을 믿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악한 영은 쫓겨가고,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어둠은 물러갑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임을 알고 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 보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통해 그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열정이 생깁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과 돈과 명예를 위해 허비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도 귀한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태양빛을 본 사람이 호롱불에 만족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 인생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시기 원하십니까?" 진실하게 그렇게 묻고 응답을 구할 때, 주님께서는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한 소원을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이루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도록 돕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헌신합니다. 그것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을 믿는 사람다운 삶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십시다. 사순절을 위해 추천한 책, 필립 얀시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를 읽으신 분들은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새롭게 알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이 다하도록 알아가도 다 알 수 없는 분입니다. 탄생으로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의 예수를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벅찬 일입니다. 그러니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분을 아는 것은 더욱 벅찬 일입니다. 하지만 마음 설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그분을 바라 보십시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매일을 살아 가십시다. 그분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결코 죄악에 빠지거나 고난에 짓눌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믿는다면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사흘 길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골 3:1-4)

기왕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셨다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여기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을 믿고, 그 주님을 위해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생명이 저와 여러분 안에서 왕성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저희를 붙드셔서
주님의 위엄과 영광에
합당하게 만들어 주소서.
주님의 생명이
저희 안에서 역사하게 해주소서.
아멘.

(깅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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