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금은 하나님의 샬롬이 필요한 때 (삿 6:19-24)

첨부 1


지금은 하나님의 샬롬이 필요한 때 (삿 6:19-24)


인간은 어떤 때는 본능의 지배를 받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 혈기에 지배를 받고, 감정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 붙잡히며 하나님의 은혜에 지배를 받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서 모든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과 내 속에 자꾸 튀어나오는 그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마음과 심령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은 주님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예배할 때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 심령이 치유를 받는 것입니다.  내면의 상처가 치유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내면적인 모든 상처들로부터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의 영혼에 하늘의 평화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 심령 깊은 곳에 하늘의 풍요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만장일치로 '샬롬'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낯익은 단어, 그러면서도 엄청나게 신비한 단어, 그들의 모든 꿈과 이상을 포함하고 있는 소중한 단어가 '샬롬'이라는 이 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가장 간결한 사전적인 정의는 물론 '평화'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학자들은 예외 없이 평화라는 번역은 본래 샬롬이라는 이 단어가 포함하고자 하는 의미를 다 담아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라고 하면 전쟁이 끝이 난다든지, 혹은 갈등이 조정된 상태를 가리켜서 평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샬롬이라는 단어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본래 이 단어는 "완전하다, 건강하다, 성취하다"라는 말의 명사형입니다.
한 신학자는 샬롬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샬롬이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삶의 마당,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통전적으로 궁극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충만하고도 온전한 은혜의 상태이다."

서구권에서는 샬롬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peace'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그렇지만 'peace'라는 단어만으로는 '샬롬'이 내포하고자 하는 본래적 의미를 표현하는데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샬롬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단어들을 동원합니다.  그렇게 사용하는 단어들 가운데는 요즘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웰빙'(wellbeing), 혹은 충만함이라는 'wholeness', 건강함을 뜻하는 'integrity'라는 단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어쩌면 가장 긴장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정치 소멸로 정부 조직이 표류하는 가운데 환율은 올라가면서 국가 경제가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북한의 철없는 김정은이가 저지르는 통제되지 않는 행동들이 우리 모두를 염려와 두려움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는 것은 아닌지, 이러다가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우리도 내면 깊은 곳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샬롬일 것입니다.

주전 1,200년을 전후로 한 소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한 시대를 가리켜서 사사시대라고 말합니다.  그 사사시대에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기드온이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농부였던 기드온을 들어서 그 나라를 결정적인 재난에서 구출하는 지도자로 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농부에게 찾아오실 때 그의 이름이 '여호와 샬롬'이셨습니다.
그리고 샬롬이신 그 하나님을 만나면서 기드온은 민족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감격해 하면서 제단을 쌓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기드온은 그 제단의 이름을 가리켜서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 샬롬, 하나님은 평강이시다."  평강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변합니다.  놀랍게 쓰임을 받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인 기드온이 샬롬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이런 변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농부 기드온이 하나님을 만났던 그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살펴보면서 지금의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샬롬이 무엇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제 어느 때에 진정한 샬롬을 필요로 할까요?  우리가 샬롬을 필요로 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첫째로,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릴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갈 때,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릴 때 샬롬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형성하는 사사기 6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시니."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 족속들에게 넘겨주셨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악을 범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깨우쳐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웃 부족인 미디안 족속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미디안 족속들의 침략은 그냥 이스라엘 나라를 점령만 하는 그런 형태가 아닙니다.  일년에 한 번씩 파종할 때마다 미디안 족속들이 낙타 같은 짐승을 타고 일종의 기습 공격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씨를 뿌리고 있는 밭들을 그야말로 완전히 초토화시켜 놓고 후퇴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주었습니다.  파종을 못하니 당연히 추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추수도 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한 해 동안 먹고 살 길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칠 년 동안이나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칠 년입니다.  그렇게 칠 년 동안 먹을 것도 없이 고생을 했을 때 그들의 삶의 마당은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주위에 보면, 지나오는 시간들 속에서 이와 같이 내 삶의 마당이 기초부터 흔들리는 위기를 경험해야만 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마당이 흔들리는 가운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의 어려움을 통해서 삶에 심각한 위험을 경험하셨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삶의 정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가 바로 샬롬의 은혜입니다.

샬롬은 완성한다, 성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필요한 것들이,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구하고 있었던 것들이 다시 회복되는 상태가 바로 샬롬의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이 샬롬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회복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회복의 은혜가 필요하다면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할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의 마당이 흔들리고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던 중요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행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죄악을 깨우쳐주시기 위해서 채찍을 드시고 때리시는 사건이 바로 미디안의 침략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부터의 돌이킴과 회개가 선행되지 않을 때 회복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회개가 없는 회복의 은총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 년 동안이나 삶의 마당이 흔들리는 고통 가운데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 죄악으로부터 돌아서고자 하는 회개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6절 이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의 침략을 받고 깊은 어려운 궁지 속에 빠졌을 때 그들은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그들은 지금 회개의 부르짖음을 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는 새로운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경우 우리의 삶의 터전이 위협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시련을 경험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을 궁지에 빠뜨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흔들어 깨워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준비하신 건강한 미래를 향해서 다시 일어서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흔들어 주실 때 그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무너뜨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빚어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역겹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흔드신 것입니다.

호세아 6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렇습니다.  지금 찢어짐으로 고통 가운데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샬롬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분께서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깊은 수렁의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는 분이 계십니까?  샬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분께서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의 여정에서 나에게도 회복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 회복 이전에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내 삶의 터전이 아직도 흔들리고 있다면 흔들리는 내 삶의 마당에 엎드려 우리가 주님 앞에 토해내야 할 기도는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주여, 회개하오니 회복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억하십시오.  샬롬의 은혜 속에는 회복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회복의 은혜, 샬롬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살아왔던 지난 날의 삶을 가슴 아프게 직시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려 전심으로 회개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제 샬롬의 은혜가 필요할까요?
둘째로, 삶의 소명이 힘겹게 느껴질 때입니다.

새로운 삶의 소명, 새로운 인생의 과제가 나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 정말 필요한 은혜가 샬롬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회개를 확인하시면서 저들을 궁지와 위기에서 구출해 내시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 주시기 위해서 지도자들을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의 그 암흑했던 시기에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쓰셨던 지도자들을 사사라고 불렀습니다.  평소에는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재판관 역할을 하다가 전시에 상황이 어려워지면 백성들을 이끌고 군대의 지도자로서 사령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사사였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쇼패팀'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일종의 혁명 사령관과 같은 역할로 국난의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시기 위해서 세우셨던 사사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본래 아주 가난한 농부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밀 타작 마당에서 추수를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가난했던 농부를 만나자 마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만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아니 아무 것도 모르는 가난한 농부를 만나자마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위대한 용사여!"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무명의 농부에게 큰 용사라니요?  그러나 그것이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기대요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용사여!"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마 "큰 용사여!"라는 말이 기드온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말만 귀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어째서 미디안 족속이 쳐들어오며, 우리 이스라엘은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12절과 13절을 비교해 보면 12절 보다 13절이 훨씬 깁니다.  말이 많아지고 길어질 때에는 이해를 잘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부인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남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지난 화요일에 어떤 중년의 여전도사님을 만났는데 그 전도사님이 저에게 이런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은요 벽이에요, 벽.  제 말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해요."  지난 주일이 삼겹살 데이라서 저녁에 가족들이랑 식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삼겹살 식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멋진 곡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여보, 이게 무슨 곡이에요"라고 물었더니 남편이 대답하기를 "무슨 고기기는 돼지고기지."

그런 분들과 대화를 하면 정말 답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끈질기게 기드온을 설득하십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의 힘으로 이 백성을 구출하는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여전히 설득되지 않습니다.  기드온을 쓰시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기드온의 반응이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쉽게 말하면 이 말입니다.  "저 같이 작고 비천한 사람이 무슨 나라를 구출합니까?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을 때, 이 말은 기드온의 현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면 너를 큰 용사로 만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실 때 우리의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비천한 농부 기드온의 그 모습을 보시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농부이지만 그러나 이 농부 기드온에게서 한 나라를 구출할 위대한 용사로 쓰임 받을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똑똑한 사람을 쓰셨다면 세상 사람들은 본래부터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전혀 쓰임 받을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 쓰임 받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사기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하시고자 쓰셨던 사사들은 하나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가 되기 전에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시몬이라는 이름에는 "잎사귀"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잎사귀처럼 쉽게 변하고 흔들리던 연약한 인생을 살아왔던 시몬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네가 장차는 게바라 하리라.  베드로라 하리라."  아람어로는 게바이고, 희랍어로는 베드로인 이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네가 지금까지 흔들리는 나뭇잎 같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나는 너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인 반석과 같은 존재로 너를 사용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우리를 찾아오심은 언제나 미래 지향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에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교만에 빠져 있는 저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농부 기드온에게서 용사 기드온의 비전을 보신 하나님이십니다.  연약한 시몬에게서 반석 같은 베드로의 비전을 보시고 찾아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창녀 마리아에게서 성녀 마리아의 비전을 보시고 찾아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동일하게 오늘 우리를 향한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주저앉아 있는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쓸 거야."  그렇다면 우리는 엎드려야 합니다.  "주여,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사오니 뜻대로 쓰시옵소서.  저를 주께 드립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아직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지금 기드온은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분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인 것을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인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증거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드온은 이 일련의 기적을 경험하면서 정말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났던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평강이시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쓰시는 놀라운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인생 길에서 그 길이 험난하게 느껴지십니까?  내가 인생 길에서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무겁고 힘겹게 느껴지십니까?  아니 내게 주어진 이 직분과 사명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래서 그냥 주저앉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여러분이 구해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샬롬의 은혜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와 은혜를 구하십시오.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분의 평강을 구하십시오.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 샬롬,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의 나를 보지 마십시오.  어제의 부끄러웠던 나를 보지도 마십시오.  미래에 하나님께서 쓰실 나를 기대하며, 그 나를 보십시오.  그리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샬롬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새 은혜와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언제 샬롬의 은혜를 구해야 할까요?
세 번째로, 의외로 주의 임재가 두렵게 느껴질 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진 가장 보편적인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힘들고 어려운 것은 재정적인 부담 때문이 아닙니다.  사역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으면 어느 날 예배의 자리에서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니,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에도 갑자기 눈물 샘이 터지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그런 순간들이 경험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하나님 한 번 보여주세요, 하나님 제가 느끼고 싶어요."라고 말하다가 막상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면 그 하나님이 두려워집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마다 언제나 두려움과 놀라움에 휩싸여 완전히 압도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지금 기드온이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기드온은 자기를 부르시고 찾아오신 분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기드온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지팡이의 끝을 고기와 무교병에 살짝 대었더니 바위에 불이 나와서 그것들을 태워버립니다.  지금 기드온은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오셨고, 자기는 지금 하나님의 목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기드온은 두려움으로 엎드려 고백합니다.  본문 2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하나님을 경험했으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했다는 사실 앞에서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입니까?  그런데 본문에서 기드온은 "슬프도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구약에서는 죄인인 인생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순간 자신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하나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본문 2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두려워하며 슬퍼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해.  두려워하지 마.  너는 죽지 않아."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영혼 깊은 곳에 평안이 물밀 듯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두려움만의 대상이 아니라 친근함으로 다가오시는 평강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너무 감격하며 일어나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 샬롬, 하나님은 평강이십니다."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 앞에 다가올 때 그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다가 막상 하나님이 경험되어지기 시작하면 그 하나님이 두려워질 수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들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고, 만나고도 싶지만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이 나를 작살낼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다 펼쳐 보이시고 나를 죽일 것 같은 그런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공포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접근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주님이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보편적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왜 있는 줄 아십니까?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접근하지 못하는 우리의 안타까움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 곁에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와 평화하시고자 스스로 우리의 무거운 죄 짐을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그가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거룩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해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성경이 약속하는 놀라운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던져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안심해.  이제부터는 내가 너의 하나님이야.  내가 너의 아버지야.  너는 나의 사랑스런 아들이야."

그때 내 마음 깊은 곳에 물밀 듯이 임하는 구원의 평안, 사랑하는 여러분, 이 샬롬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이 샬롬의 은혜를 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는 끝 모를 대척점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과 중국의 경제는 살아나고 있는데 우리의 경제는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그야 말로 위기입니다.  더구나 북한은 제2의 조선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의 시대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샬롬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샬롬, 평강이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샬롬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언제 어느 때에나 우리의 마음에 샬롬으로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의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때입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