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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영혼의 거울을 볼 때에 (요 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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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혼의 거울을 볼 때에 (요  8:2-11) 

1.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 읽고 재미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거울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한 시골 남자가 장에 갔다가 거울을 처음 보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 너무나 신기해서, 거울을 한 개 사다가 장롱 깊숙이 숨겨 두고, 혼자서 가끔씩 꺼내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보니까 남편이 뭔가 수상했습니다. 장롱 앞에서 남편이 혼자서 뭔가를 들여다 보다가, 히죽히죽 웃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일하러 나간 사이에, 남편이 몰래 숨겨 놓은 거울을 꺼내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거울에 왠 아리따운 여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내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믿었던 남편이 집안에 다른 여자를 숨겨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 후로 아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본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하는 수 없이 시어머니에게 사실대로 털어 놓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며느리가 말한대로 장롱에 가서 거울을 꺼내 보고는 와서 하는 말이, "얘야, 걱정할 거 없더라. 팍삭 늙은 할망구더구나"..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2. 이렇게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거울을 보면서 우리 얼굴을 살핍니다.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고치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거울로 내 얼굴은 살필 수 있지만, 우리 마음을 살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모습을 살펴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들, 나쁜 일들, 밤에 꾸는 꿈을 통해서도, 인간관계를 통해서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또한 자신을 살피도록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사건 -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를 거울 삼아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 은혜 나누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 나의 영혼의 거울을 볼 때에 > 

I. 나의 영혼의 거울을 볼 때에, 우리는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3-5절).

1) 그러나 이 사건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기획/의도된 사건입니다. 6절에 보면,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만약에 예수님이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고 한다면, 이것은 평소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한 주장과 반대될 뿐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법권이 없었는데, 예수님이 그 여인에 대한 사법집행을 허락한다면, 이것은 로마정부와도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돌로 치지 말라고 한다면, 이것은 또한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모세법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자는 돌로 쳐 죽여라는 율법의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해도 걸려들고, 저렇게 말해도 걸려드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을 미끼로 잡아와서,, 돌로 치려고 했던 사람들은, 8장 마지막 절 (59절)에 보면, 결국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2) 오늘 우리가 이 사건 속에 들어가서 역할을 맡는다면, 우리는 누구의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합니까?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그녀를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겠습니까? 아니면, 죄를 짓고 잡혀 온 여인입니까? 그 여인을 구해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입니까? 또 아니면, 그 사건을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돌을 들어서 그 여인을 치려고 했던, 군중들, 백성들입니까? 제 생각에는 네 부류의 사람 모두가 다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는 그냥 구경하는 군중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좀 더 말씀을 깊이 읽어 보면,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군중이 아니라, 내가 바로 죄를 짓고 잡혀 온 간음한 여인과 같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본다면, 나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에 열심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 앞에 정말 귀를 기울인다면, 예수님과 같이, 남들을 용서해 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2. 어쨌든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과 같은 죄인이든지, 여인을 잡아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적 위선의 죄를 짓는 사람들이든지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1) 그래서 예수님은 잡아온 죄인들과  잡혀온 죄인들을 그 자리에 두고는 땅바닥에 뭔가를 쓰시면서 시간의 간격을 두셨던 것은 잡혀온 여인에게는 회개의 마음을 주시는 동시에, 잡아온 죄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위선의 죄를 깨닫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을 들고 여인을 치려고 기다리는 군중들에게도, 그들이 결코 그 여인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2) 그리고는 일어나셔서,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을 때에, 모두 그 말씀의 권위 앞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돌맹이를 내려두고, 슬금슬금 떠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9절에,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주님의 말씀앞에,, 자기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3) 다윗이 밧세바를 범해서 자기 아내로 빼앗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서 다윗을 책망하시는데, 나단이 한가지의 비유로 말하기를,  어떤 마을에 한 부자와 가난뱅이가 살고 있었는데, 부자는 양과 소가 엄청나게 많았고, 가난뱅이는 가진 것이라고는 단지 작은 암양새끼 한 마리 뿐이었는데, 이 양새끼를 너무나 애지중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왔습니다. 부자는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을 잡으려니까 아까워서 대신에 가난뱅이 집에 있는 암양새끼 한 마리를 강제로 빼앗아서 그것으로 손님을 대접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다윗은 화를 내면서 소리치기를,  “내가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그 놈을 당장 잡아 죽여라” 했습니다. 그 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말했나요?  -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오.”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분노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인줄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다윗이었습니다. 

로마서 2장 말씀에서도,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1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아느냐(3절) 했습니다. 

4)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죄성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용서가 우리에게서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바리새인인지를 돌아보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II. 나의 영혼의 거울을 볼 때에,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10-11절에,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하는 이 용서의 선포는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하신 “용서의 선포”입니다. 

1)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죄용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권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데 사용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권위를 가지고 용서하고, 사람을 살리고, 자유를 부여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하지만, 종교는 너무나 자주 사람들을 정죄하고, 때로 사람을 죽이고 삶을 파괴하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이런 종교의 잘못된 권위에 도전하신 것입니다. 

참된 종교, 참된 신앙은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자유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종교요, 신앙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내가 구원받고 축복받는 수단만이 아니라, 남을 살리고, 자유하게 하고, 남들이 용서를 누리게 하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2) 얼마전에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가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장발장이 배가 너무 고파서 빵을 한 개 훔쳤다가 19년의 징역을 살고 출감했습니다. 출감 후에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어느 교회의 주교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그날 밤에 장발장은,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주교집의 은그릇을 훔쳐서 도망가다가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제 종신형을 살아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발장을 잡아 온 경찰에게 주교는, 그 은그릇은 자신이 장발장에게 선물로 준 것이라고, 훔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해서 경찰을 돌려 보냈습니다. 경찰이 돌아가자 주교가 장발장에게 말하기를, 잊지 마시오, 절대로 잊지 마시오. 내가 준 돈으로 당신을 위해 사용하고,, 절대로 정직한 사람이 되시오.. 이 주교의 용서가 그동안 장발장의 마음에 얼음처럼 굳어 있던 모든 분노와 원한과 증오를 다 녹여버리고,  그를 새사람으로 살게 했습니다. 

3) 주님의 용서의 그 위력을 내가 안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그 용서의 위력도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주님에게서 죄용서 받은 자라는 그 확신과 감격이 있다면, 우리는 그 감격을 가지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읽는 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너도 너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해라” 하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2. Miroslave Volf 라는 사람이 쓴 <Free of Charge 베풂과 용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Volf 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는 기본적인 세가지의 양식이 있다 했습니다. 

A. 첫번째는, taking 입니다 - 가지는,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생존경쟁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내가 사는 길은,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요, 남의 것을 빼앗아야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남의 기회를 빼앗든, 남의 자리를 빼앗든, 남의 돈을 빼았든,, 어쨌든 남의 것을 가져야 내가 존재한다는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B. 두번째는, getting 입니다 – 주는만큼 받는 것입니다. 서로 바꾸는 Sale의 세계입니다. 내가 이만큼의 노력을 주면, 거기에 해당하는 임금을 주던지,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 받아야 하고, 내가 키워준 만큼, 내 뜻을 따라야 하고, 내가 해 준 만큼 감사와 존경을 받든지, 하여튼 뭔가를 돌려 받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C. 세번째는, giving 입니다 – 공짜로 주는 것입니다. 선물의 세계입니다. 


1) 이 세가지 삶의 유형은 평소에는 별로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당했을 때에는, 우리가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반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A. 먼저, taking의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은, 만일에 남에게 손해를 당하면  보복(revenge)을 합니다. 남의 것을 가져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 것을 남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할 때에 나오는 당연한 반응은 보복입니다. 게임이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보복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풍조가 이 세상에 있는데,  성경적이지 않은 사상입니다. 

B. 다음으로, getting 의 세계에서는 만일 손해를 당하면, justice (공평함/정의)를 요구합니다. 손해본만큼 보상을 요구합니다. 공평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공평함이란 좋은 것이고, 정의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만, 우리는 결코 정의를 행하는 것만으로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만일 이 사회에 정의만 있다면 미성숙한 자녀들이 정의로운 부모의 손에 살아 남겠습니까? 우리의 수많은 실수와 시행착오에, 정의가 적용되었다면, 지금 여기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분명히 우리는 정의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C. 그것이 바로 세번째의 경우 - Giving 의 세계입니다. 여기선,ㄴ 누가 나에게 해를 끼치면 For-giving  - 용서합니다. 누가 내게 손해를 입히면 때로 그 손해를 내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세계이고, 이것이 복음의 세계입니다.
 

3. 그러면서,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주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같이,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1) 혹시 누구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서, 한번 본 때를 보여주려고 벼르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본 때를 보여줄 기회를 찾지 마시고, 용서할 기회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용서해 주면 버릇 나빠진다거나, 정의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용서는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듯이, 용서의 방향과 목적은 바로 진리/정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2) 옳고 그름을 따지고,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는 결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옳다는 기준도 항상 나의 굴절된 시각으로 판단된 것일 때가 많습니다. 용서만이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는 방법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님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용서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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