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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라! 그대는 장자니라 (창 37: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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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그대는 장자니라 (창 37:18-24)

며칠 전 신문에 자그마하게 나온 기사 하나가 눈에 띠었습니다. ‘헬무트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1930-) 전 독일 총리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헬무트 콜’ 그러면 독일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도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1982년 독일 총리로 취임한 이래 1998년까지 16년 동안이나 총리의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1990년 동서독 독일이 통일될 때 통일의 주역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거의 감금된 상태로 ‘수감자’처럼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두 아들이 책을 통해서 밝힌 내용입니다. 헬무트 콜을 감금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입니다. 원래 부인은 2001년에 사망했고 2008년에 34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와 재혼을 했는데, 그 재혼한 아내가 헬무트 콜의 모든 생활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들들이 아버지를 찾아갈 때에도 재혼한 아내가 아들을 만나는 것까지 통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인 헬무트 콜을 마지막 찾아갔을 때가 거의 2년 전인 2011년 5월이었는데, 그 때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왔음에도 새엄마가 아들이 찾아온 것을 싫어했고, 헬무트 콜이 자신의 유일한 손녀를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10분쯤 지났을 때 그의 아내가 아들과 손녀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떠밀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것까지 통제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그를 찾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재혼한 젊은 아내가 그렇게 아들까지도 찾아오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이유는 16년 동안 총리를 하면서 외국 정상들과 주고받은 서신 등 수많은 기록물들에 대한 유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한 일간신문에서는 ‘거인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한 때 독일과 세계를 호령할만큼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그의 최후가 한없이 처량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힘을 잃으면 여인 한 사람에게 꼼짝하지 못하고, 사랑스런 손녀의 얼굴조차 볼 수 없게 통제받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남편들, 젊었을 때 부인에게 잘 하십시오. 콜 총리처럼 통제받으며 수감자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연세 드시면 부인이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십시오. 그래야 보고 싶은 손주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까요. ‘젊었을 때 내가 이래봬도 이런 사람이야!’ 하고 아무리 말해 봐도 힘을 잃으면 그 모든 과거가 내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은 11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11번째 아들인 요셉을 아주 각별하게 사랑했습니다. 그도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요셉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첫 번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알고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가게 됩니다. 하란은 외갓집입니다. 비록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없지만, 외갓집에는 외삼촌과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집을 떠나본 적이 없던 야곱이 비록 외삼촌네 집에 와서 살긴 하지만 처음 집을 떠나 사는 그 삶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는지는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야곱이 그 힘들고 외로운 삶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갓집에 도착해서 라헬을 보는 순간 야곱과 라헬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라헬을 ‘곱고 아리따운 여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창세기 29:17) 

야곱은 그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고, 외삼촌에게 라헬과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혼을 하게 됩니다. 외삼촌은 야곱에게 ‘7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면 라헬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을 하게 되고, 그 약속을 믿고 야곱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을 (외삼촌)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세기 29:20) 라헬과 결혼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7년간 머슴살이 하는 것을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한 7년의 시간이 흘러 라헬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고 맙니다. 둘째 딸 라헬과 결혼시켜주겠다고 해서 7년 동안 자신을 부려먹더니, 첫날밤을 자고 보니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여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이 아니라 언니인 레아였습니다. 언니보다 동생을 먼저 결혼시키지 않는다는 그 지방 풍습을 내세워서 뭔가 조금 모자라는 언니 레아를 야곱의 아내로 준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항의하자 ‘그러면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더 머슴살이 하라’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7년을 더 머슴살이를 하기로 하고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이제 야곱에게는 아내가 둘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 그리고 외삼촌에게 속아서 결혼한 언니 레아. 당연히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평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아내이면서도 야곱에게 찬밥신세가 된 레아를 권고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아에게 아들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라헬 역시 야곱의 아이를 갖기를 원했지만, 라헬은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레아와 라헬 사이에 야곱의 아이를 갖기 위한 무언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몸종을 동원하면서까지 야곱의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라헬에게는 여전히 아이가 없었습니다. 야곱에게 10명의 아들과 딸 하나가 생긴 이후에야 하나님께서는 라헬에게 아이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요셉입니다. 라헬뿐만 아니라 야곱 역시 얼마나 기다린 일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갖지 못해 맘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늘 안타깝고 가슴 아팠는데, 라헬이 드디어 아이를 낳았으니 야곱 또한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습니다.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은 더한다는 의미입니다. 요셉 한 아들만이 아니라 이제부터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해서 더 많은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 요셉이 야곱에게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아이이겠습니까?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특별대우를 했습니다. 요셉에게는 채색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채색옷’이라는 말은 색동바지저고리라는 말이 아니라, 손바닥과 발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말합니다. 손바닥과 발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었다는 것은 요셉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자식들은 다 양을 치거나 집안일을 도와야 했는데, 요셉은 그 모든 일에서 열외가 되었습니다. 어리기 때문에 일을 안 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긴 옷을 입혀줌으로 해서 어느 누구도 요셉에게 일을 시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이런 특별한 사랑을 받자 형들이 요셉을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누구는 자식이 아니란 말인가’ 하는 불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셉은 형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조리 아버지에게 일러바쳤습니다. 고자질을 한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놈이라 맘에 들지 않았는데, 자신들이 하는 말이며 행동을 아버지께 고자질하자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막내 요셉이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형들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해 주는데, 형들이 막내인 자신에게 절을 한다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이 더욱 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형들이 양을 치기 위해서 멀리 도단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야곱은 이스라엘 지형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는 헤브론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건기가 시작되면 남쪽에서부터 풀들이 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양떼를 먹이는 목동들은 양떼를 이끌고 풀을 찾아서 조금씩 조금씩 북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의 아들들이 이동해 간 것이 도단이었습니다. 헤브론에서 도단까지는 약 130km나 되는 먼 길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이 양떼를 이끌고 그 먼 길을 가 있는 것에 걱정이 되어서 요셉에게 ‘형들은 잘 있는지, 양떼들도 잘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기 위해서 멀리 도단까지 가게 됩니다. 그리고 도단에서 드디어 형들이 만나게 됩니다.
  
멀리서 요셉이 오는 모습을 본 형제들은 아버지도 멀리 계시겠다, 미운 놈 혼자 오는 것을 보고 요셉을 죽이기로 작당을 합니다. 죽인 후에 구덩이에 던져 넣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악한 짐승들에게 잡혀먹었다고 둘러대자’고 모의를 합니다. 드디어 요셉에 가까이 왔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입고 있던 그 채색옷을 벗기고는 그를 구덩이에 던지고 말았습니다. 구덩이는 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파 놓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11월부터 3월까지 비가 많이 오는 우기이고, 우기가 지나면 4월부터 10월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 쓰기 위해서 우기에 물을 받아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곳곳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놓습니다. 사람들도 쓸 뿐만 아니라, 양떼에게도 마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구덩이는 땅 속 깊이 파는데, 땅 속으로 들어갈수록 넓고 위쪽은 좁게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때때로 사람이나 짐승이 그곳에 빠지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구덩이가 깊고 크기도 하지만, 아래쪽이 위쪽보다 넓어서 사람이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빠져나오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덩이에 요셉을 쳐 넣으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요셉을 구덩이에 쳐 넣었는데 마침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우기에 저장해 놓은 구덩이의 물을 다 써버릴만큼 건기가 한 참 지났다는 뜻입니다. 

형들이 그렇게 못된 짓을 할 때 그래도 한 사람은 그런 형제들의 악행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바로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장자입니다. 레아에게서 르우벤이 태어났을 때 야곱은 너무 기뻤습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첫 번째로 얻은 아들이니 야곱이 기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지었습니다. 르우벤이란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다!’입니다. 
  
그 르우벤이 동생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할 때에 그들을 말렸습니다. 르우벤은 어떻게 해서든지 요셉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생명은 해치지 말자’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 말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다른 형제들은 모두 마음에 독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동생이 미웁다 한들 그래도 자기들의 동생인데, 어떻게 그 동생을 죽이려고 합니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아버지 몰래 죽이자고 한 것은 형들의 마음에 미음이 얼마나 가득했는지를 가늠케 해 줍니다. 큰 형인 르우벤 역시 어찌 그런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르우벤은 동생 요셉을 죽이지 말자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동생 요셉의 생명을 건져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죽여 구덩이에 던지자는 동생들의 제안에 반대하고, 그저 ‘구덩이에 던져놓자. 그러면 죽을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요셉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르우벤은 동생 요셉을 살려 아버지 품으로 돌려보고내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여러분, 왜 르우벤은 동생 요셉을 죽이는데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왜 르우벤은 다른 형제들을 말려 동생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려 했습니까? 동생 요셉이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르우벤도 요셉에게 미운 마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인 자신보다도 요셉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에 부아가 나기도 했고, 그런 사랑을 받고 있는 요셉이 밉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셉이 꿈을 꾸고서 큰형인 자신도 요셉 앞에 머리를 숙여 절할 것이라고 말할 때에는 요셉이 정말 미웠습니다. 그런데도 르우벤은 요셉을 죽이자고 하는 동생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요셉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동생들을 말려야 했습니다. 무엇이 르우벤에게 그런 마음을 갖게 만들었습니까?

창세기 42장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지 않는 정보를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에 애굽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야곱은 애굽에 먹을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을 애굽으로 보내 양식을 사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온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의 동생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일부러 형들에게 애굽을 정탐하러 온 간첩이라고 누명을 씌워서 3일 동안 감옥에 가두어놓습니다. 사흘 만에 국무총리 앞에 서게 된 요셉의 형들은 국무총리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자기들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세기 42:21)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의 상황을 회상한 것입니다. 
  
그들의 회상에 의하면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이 던져 넣었을 때 요셉은 그 구덩이 안에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였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형님들이 자신을 그 구덩이에 놔둔 채 여기를 떠나버린다면 자신은 그 구덩이 안에서 죽게 될 것이 뻔하기에, 형님들에게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걸복걸했습니다. 그런데도 형들은 동생 요셉의 그 눈물범벅이 된 아우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괴로움과 두려움 가운데 울부짖는지 잘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요셉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태연히 구덩이 옆에서 요셉이 가지고온 도시락을 나눠먹습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요셉의 절규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먹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 때 르우벤의 마음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동생 요셉의 생명만은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요셉의 생명만은 살려주어야 한다고 동생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죽이진 않고 동생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게 되었습니다. 그 구덩이 안에서 요셉이 살려달라고 애걸합니다. 울부짖습니다. 그럼에도 동생들은 모두 요셉의 그런 울부짖음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홀로 르우벤만 어떻게든 요셉의 생명은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를 살려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넷째인 유다가 큰 형의 마음을 알았는지 ‘요셉을 죽이는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으니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요셉을 팔자’고 제안을 해서, 요셉은 구덩이에서 죽지 않고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여러분, 르우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가 요셉을 사랑하거나 요셉 편을 들고 싶어서 요셉을 죽이지 말자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큰형으로서의 책임입니다. 큰형이기에 막내인 요셉을 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큰형에게는 동생들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장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도 헤아려야 합니다. 막내만 사랑하는 못마땅한 아버지일지라도, 장자인 자신을 장자답게 대우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자에게는 장자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동생을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가슴 아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장자의 책임입니다.

저는 르우벤에게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큰형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사악해지고 있습니다. 이성을 잃고 있습니다. 아무리 동생이 미웁더라도 죽여서도 안 되고 죽일 순 없는 것인데,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그런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한 사람의 소중한 인격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 사이에서는 한 아이를 왕따시켜 인격을 모독하고 그의 인생을 짓밟는 일을 죄책감 하나 갖지 않고 자행하고 있습니다. 돈이 생기고 이득이 생기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만 같은 두려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과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주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미워할 수밖에 없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세상을 품어주어야 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에 빛을 비춰야 합니다.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곳이요,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장자여야 합니다. 큰 형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장자입니다. 큰 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장자다워야 합니다. 권리만 누리려고 하는 장자가 아니라 장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장자여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는 장자답게 행동해야 하고, 장자답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 총회가 정한 남선교회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의 남선교회 회원들이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직장과 일터에서 큰 형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려 할 때에 우리는 조용히 경쟁의 자리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세상에 향기를 드러내야 합니다. 서로가 자기의 이득을 얻기 위해 혈안되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내 작은 것을 내어주어야 하고, 손해를 보고 억울할지라도 희생과 섬김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앞서 가려고 몸부림 칠 때에 우리는 우리보다 뒤쳐진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함께 가기 위해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남선교회가 시작된 것은 1924년입니다. 서울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기독청년 면려회 조선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그 후 남녀전도회로 세분화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교단 총회는 1968년 제53회 총회에서 3월 둘째 주일을 남선교회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기독청년 면려회는 독립운동은 물론이거니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야학과 토론회, 강연회 등을 개최하면서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려운 사회에 희망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시작되어 그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한국교회 남선교회가 오늘날 다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큰형으로서 생명 살리는 일에 무엇보다도 앞장서야 하고, 장자로서 세상을 책임지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결코 신앙인다운 모습일 수 없습니다. 내 가정만 행복하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왜곡된 사회적 풍토를 바꾸어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처럼, 세상에 갇혀 통제된 채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희망과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귀에 세상을 울부짖음이 들려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살려달라고 외치는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내밀어 그들의 손을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세상에서 먼저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장자입니다. 장자로서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대는 장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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