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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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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더불어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또한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갈등과 마찰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크고 작은 갈등과 마찰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애써 세운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더불어 불편한 관계를 겪게 되었던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서로 불편한 관계를 겪게 되었습니까? 고린도후서 1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가 그 계획을 일방적으로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오해하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가 약속을 아주 쉽게 어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를 믿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비록 일부이지만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사도직을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생전에 그를 사도로 부르신 기록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가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그도 또한 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것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복음이 훼손되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강하게 그의 사도직을 옹호하는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서 변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의 화해를 위해서 그렇게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오늘 갈등이나 마찰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일상적인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연일 계속되는 북의 위협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마땅한데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남과 북이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과 마찰이 점점 더 증폭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이해 집단 사이의 갈등과 그 집단 내부의 갈등 상황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안타까운 것은 교회도 갈등과 마찰의 현실과 무관한 것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극심한 대립과 분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교회가 싸움터로 변하는 경우도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화해 사역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그 화해가 송두리째 실종되는 참으로 민망한 사태가 종종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서 분열과 갈등 상황이 그치지 않고 발생하는 것입니까?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의 지체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도 또한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윤리적인 결단이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그렇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주님의 그 명령은 우리로서는 따르기 어려운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내 지식, 내 수단 그리고 내 방법으로는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내 삶을 주님이 주장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상태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가 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전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있어서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또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저는 아주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습니다. 몇몇 교회 지도자들이 갑자기 저를 비난하며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런 것이 어떻게 목사가 되느냐?” 물론 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부끄러운 삶을 산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가 좋아서 신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고 또 제가 원해서 목사가 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부모님이 그토록 애써 키운 신학교를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비록 목사가 되었지만 목회는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부르신 주님이 친히 하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부끄러운 한국 교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가 심하게 싸우고 갈라선 것이 그 어떤 신학적 견해 차이 때문인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해방 직후 옥에 갇혔다가 출옥한 성도들을 중심으로 고려파, 즉 고신측이 갈라져 나갔습니다. 왜 그들이 갈라져 나갔습니까? 쉽게 말해서 자리 다툼에서 밀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을 좀 배려했으면 좋았을 텐데... 교회에 남아 있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전혀 양보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속되게 말해서 밥그릇 싸움, 감투 싸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믿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가지고 교회가 싸우고 갈라졌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았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사건의 핵심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또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화목에 동참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 주신 화해 사역에도 또한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역할은 하나님 나라 선교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귀중하고 또 영광스런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화목하게 하는 이 사역의 초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그 목표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불화와 갈등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불 때에 이 세상의 평화를 도모해야 할 책임도 또한 우리의 화해 사역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교회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힘써야 할 우리의 책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의혹과 불신의 씨앗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 숨어 있는 갈등의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각종 의혹과 불신이 과연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살피고 그런 사태를 미리 예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령 갈등이 이미 생겼을지라도 다시금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성령의 지혜를 구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찍이 주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기 위해서라도 이웃과 더불어 먼저 화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교회 안에서 화목할 뿐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도 참 평화를 건설해야 마땅합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참 평화의 도구로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충성스러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항상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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