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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론적 신앙을 지킵시다 (벧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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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신앙을 지킵시다 (벧 3:1-7)


기독교는 종말론적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바로 종말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첫 번째 말씀이 이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한 마디로 말하면 현재 이 세상나라가 끝이 나고, 천국이 열리게 될 때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국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통치하는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부분적으로나마 천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따르는 사람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천국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삶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미 ‘현재적 종말’을 경험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 내 자신이 주인이었던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을 단적으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전 것은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미 종말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신앙은 이미 종말론적입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선포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10)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나라를 끝내시고 온전하게 천국을 여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초림하셔서는 천국을 소개해 주셨고 부분적으로 맛보게 하셨지만, 이제 재림하셔서는 천국을 온전하게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믿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10)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미래적 종말’을 고대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끝이 나고 새로운 세상 곧 천국이 시작되기를 고대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의 방해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믿음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본문 3-4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초대교회 때 벌써 종말론적 신앙을 뒤 흔드는 세력이 나타났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영향을 받고 종말론적 신앙을 포기하는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종말론적 신앙을 지키도록 권면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면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이런 일이 더욱 심각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너무도 귀한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종말론적 신앙을 뒤 흔들기 위한 사탄의 공격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종말론적 신앙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전생에 대한 믿음’입니다.
일전에 한 신경정신과의사가 [전생여행]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그 이후 우리 사회에 일종의 신드롬 형태로 전생에 대한 믿음이 확산되어 왔습니다.
사실 이 ‘전생’이란 개념은 고대 인도에서 발전된 윤회 사상이 불교를 통해 체계화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현대에 와서 뉴에이지 사상이 이 개념을 받아들여, 하나의 치유 방법의 형태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이 [전생여행]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생은 존재한다. 그리고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억을 찾아내기 위해 ‘최면술’을 사용해 왔습니다. 여러 TV 프로그램이 이 최면술의 장면을 방송했고, 심지어 연예인들을 동원해서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어느덧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생에 대한 믿음을 심어놓게 되었습니다.

한 통계 조사를 보니 일반인의 50%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생을 믿는다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25%에 가까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전생을 믿는다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생에 대한 믿음이 어느덧 우리의 종말론적 신앙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 전생에 대한 믿음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된 일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변영돈 박사의 학위 논문이 그것입니다. 이 논문의 결론은 전생에 대한 기억은 환상의 일종이라는 것입니다. 전생에 대한 기억은 태어날 때부터 뇌 속에 입력돼 있는 기억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얻은 외부 암시에 의해 형성된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 사람을 상대로 여러 차례 동일한 최면술을 시도했답니다. 그랬더니 매번 전생에 대한 기억이 다르게 나오더랍니다. 그러니 전생여행이란 한 마디로 환상여행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생이란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환생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고, 그 뒤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말 자체가 없다는 믿음입니다. 
번번이 종말에 대한 예언이 빗나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종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작년 2012년에는 전세계적으로 종말에 대한 예언이 강력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마야인들의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에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마야인들은 남다른 예지력으로 달력을 만들어 사용해 왔기 때문에 달력이 끝나는 이 날이 종말의 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과학적인 예측 때문입니다. 지구를 향해 소행성이 돌진해 온다거나 거대한 태양 폭발로 인한 플레어가 일어난다거나 행성 간 정렬을 통한 자기장 역전 현상 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말을 다루는 영화까지 나왔는데 그 제목이 [2012]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2012년 종말예언은 단순히 사이비 종파가 주장한 종말론이 아니고, 미래를 예측해 온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보기 좋게 그 예측이 빗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솝우화 [양치기 소년] 이야기처럼 사람들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믿지 않으려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종말 예언에까지 믿지 않으려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초대교회 때처럼 종말론적 신앙을 뒤 흔드는 세력들이 강력하게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적 신앙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종말론적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 신앙은 왜곡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현실의 기복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종말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 지면 저 천국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대한 관심만 증대됩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복을 누리는 일에만 관심이 집중되게 됩니다.
다음으로 거룩한 삶에 대한 헌신이 사라지게 됩니다. 종말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 지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자 하는 열망이 약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인다운 거룩에 대한 헌신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종말론적 신앙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말론적 신앙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진실한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실한 마음이란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말합니다. 밤에 달빛 아래 깨끗하게 보이는 광경이 낮에 해다 뜬 뒤에도 여전히 깨끗한 상태를 말합니다. 처음 예수 믿고 주님 앞에 뜨거운 마음 순수한 마음 바로 그 마음을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 신앙을 잃어버리게 된 우선적인 이유가 저들이 진실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 풍조로 더럽혀 졌고,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에 현혹되어 그들의 마음이 어지럽혀 졌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

출 3:5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모세와 대면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왜 신을 벗으라고 하셨을까요? 발은 그 사람의 행적 곧 발자취를 상징합니다. 그가 어느 곳을 다녔는지, 그가 어느 곳에 머물렀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 때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됐었는지를 이야기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과거에 왕자로 40년을 보내며 마음속에 품었던 것들을 다 내려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또 과거에 양치기로 40년을 보내며 마음속에 품었던 것들을 다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새롭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담을 수 있게 그 마음을 진실된 마음으로 바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습니다. 그리고 세상 살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닌 다른 많은 마음들이 쌓여왔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힙니다. 우리 마음을 변질시킵니다. 그래서 종말론적 신앙이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종말론적 신앙을 굳건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진실된 마음으로 바꾸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발에서 신을 벗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마음의 신을 벗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가 보니 당시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전했고 힘주어 가르쳤던 말씀을 저들이 기억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론적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는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했습니다. 마 26:75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 장담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밤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끌려가셨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이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남몰래 예수님께서 심문 당하시는 대제사장 집 뜰에 숨어들었습니다. 그 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며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가 펄쩍 뛰며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자리를 피해서 앞문 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또 부인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고 나자 바로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됐습니다.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말씀이 생각나자 베드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사람을 회개하게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말씀이 믿음을 다시 새롭게 합니다. 말씀이 종말론적 신앙을 굳건하게 지켜줍니다.

시 119:61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시인이 악인들의 온갖 간계와 협박이 있었지만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풍조에 휘둘려 종말론적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전생 이야기에 현혹되어 종말론적 신앙이 흔들립니다. 종말이 없다고 주장하는 소리에 미혹되어 종말론적 신앙이 흔들립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섰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시인이 주의 말씀을 잊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주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 22:7)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말론적 신앙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끝이 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 또한 반드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 중에 새 하늘과 새 땅 저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가 올 그날을 준비하며 고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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