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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과 소리 (요 1: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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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소리 (요 1:19-28)


역사적으로 보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400년간의 시간적인 공백이 있습니다. 이것을 구약과 신약의 중간의 시기라는 의미에서 중간사 시대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리기서를 쓴 말라기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후에 침묵하셨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400년이나 이어졌습니다.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400년 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다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선지자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머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시니 말씀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며 환호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 한 마디에 큰 반응을 보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든지 당시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헤롯 왕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세례 요한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400년간의 중간사 시대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 요한에게 왜 그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를 사하겠다는 예수님께 실망하고 돌을 던지며 ‘예수를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간사 시대는 대부분 헬라제국이 지배를 하던 시대입니다. 헬라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이 헬라 문화를 중심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 헬라제국은 셋으로 나뉘어 통치되었습니다. 하나는 마케도냐 본토를 중심으로 왕가가 세워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류키드 왕가가 세워졌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애굽을 중심으로 톨레미 왕가가 세워졌습니다.

그 중에 셀류키드 왕가와 톨레미 왕가는 중동과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대륙에서 활동하였기에 서로 간에 세력 다툼이 매우 심했습니다. 두 왕가의 치열한 싸움은 이스라엘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두 왕가는 갈등이 일어나면은 화풀이를 이스라엘에 퍼부었습니다. 두 왕가가 전쟁을 하려면 이스라엘 지역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두 왕가의 세력 다툼 사이에서 온갖 화를 다 당하는  것입니다. 두 왕가의 세력 갈등이 가장 심각할 때가 있었는데 셀류키드 왕가의 안티오쿠스 4세 때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가 톨레미 왕가를 공격했다가 로마 군대의 개입으로 패하고 맙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전쟁에서 패했을 뿐만 아니라 패장으로서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안티오쿠스 4세는 퇴군하던 중에 예루살렘을 통과하면서 전쟁에서 당한 모든 화풀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습니다. 그때 안티오쿠스가 죽인 이스라엘 백성이 400만 명이었습니다.

중간사를 읽어보면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일 때 얼마나 악랄하게 죽였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 정도로 처참한 내용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때에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므로 유대인을 가장 많이 죽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티오쿠스 4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인 시기가 기원전 175년경이라는 점과 당시 인구 비례를 기준해서 볼 때 400만 명을 죽인 안티오쿠스 4세는 역사상에 가장 많은 유대인들을 죽인 사람입니다. 후대 역사가들는 안티오쿠스 4세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불렀습니다. ‘에피파네스’라는 말은 헬라어로 ‘미친 놈’이라는 뜻입니다. 역사가들이 그를 미친놈이라고 부를 만큼 악한 폭군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 때의 사건을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중간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사모하며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이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모세를 통해 해방시키신 하나님께서 다시 메시야를 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70년간 종살이 할 때 느헤미야와 스룹바벨 등의 지도자를 통해 해방시키신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메시야로 보내 주셔서 구원해 주시기를 사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다시 개입하심을 알리는 선지자의 등장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모하며 기다려도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400년간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잊으셨고,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생각하며 자포자기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광야에서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400년 만에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400년 동안 선포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이라는 선지자를 통해 다시 선포되는 것입니다.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 세례 요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례 요한이 선포하는 말에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 요한이 있는 광야로 구름 처럼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열광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 한 마디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의 인기와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메시야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시 종교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세례 요한의 정체성을 묻는 것입니다. 즉 ‘네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냐?’라는 물음입니다. 그 질문에 세례 요한이 이사야서 40장 3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 대답합니다. 그것이 본문 23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한은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 그 메시야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말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소리’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소리’라는 단어를 통해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시작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우주의 근원이며 곧 하나님이십니다. 즉 메시야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메시야가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일어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다’고 외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주위로 몰려들며 기대감을 가지고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야속하신 ‘말씀’이요? 즉 ‘메시야’요?”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은 “아니, 나는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증거 하는 매체인 ‘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말씀’과 ‘소리’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말씀’은 내용이고, ‘소리’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매체입니다. ‘말씀’이 목적이라면 ‘소리’는 수단입니다. 이런 예를 통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언어 장애가 없는 이상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 소리를 통해서 우리들은 한국말을 합니다. 소리를 통해 ‘말’ 즉 ‘내용’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리를 낼 수 있는데 내용을 전달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용을 모를 때입니다. 

우리들은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으면 러시아어를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말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말의 내용을 모르면 우리의 소리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소리’라고 고백합니다. 즉 ‘말씀’이신 예수님이 없으면 ‘소리’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은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전하고는 사라지는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 역할이 요한복음 1장 6절에서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요한은 빛이 아닙니다. 빛은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며 예수님께서 빛의 사역을 시작하실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이기를 기대하며 자신의 주변에 모일 때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도 맬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단지 그 분을 소개하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받고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기독교 안에 이단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에 의해 조금 인정 받고 힘이 생기면 자신이 ‘소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소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리’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리’의 역할로 부름을 받았는데 ‘말씀’의 역할을 하며 주목을 받으려 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고통과 염려는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높아지고,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을 돼지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돼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욕심이 많지 않습니다. 돼지는 자신의 위의 크기에 75-80% 이상은 먹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위의 크기에 150%까지 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은 위장병에 걸려도 돼지는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일이 없답니다. 인간 세계의 복잡한 갈등은 무조건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높아지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가정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약 25000개에서 30000개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인디언들은 약 27에서 30개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순된 것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 보다 적은 것을 가지고 사는 인디언들이 더 행복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이 순교하는 만큼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조건 많은 것이 축복이고 성공이라는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우리들은 ‘말씀’의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는 무리들 가운데서 ‘소리’의 자리로 내려오는 세례 요한의 ‘소리의 영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 내면의 세계를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소리의 영성’은 ‘겸손의 영성’ ‘내려놓음의 영성’입니다. ‘소리의 영성’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평안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받고 높아지고 조금만 영향력이 커지면 종종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쭐해 하며 교만을 떱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그릇 크기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축소시킨다면 겸손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을 키웁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을 소개하는 사람일 뿐인데 나는 그 분의 신발끈 조차도 맬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세례 요한은 자신을 낮춥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소개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주 동안 살아가면서 세례 요한의 ‘소리의 영성’을 배워가기 원합니다. ‘소리의 영성’이 만들어 지는 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하심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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