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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았다 하나 죽은 자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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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다 하나 죽은 자 (계 3: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현자들의 거짓말』이라는 책에 실린 글입니다. 런던의 어느 달동네에 두 사람의 재단사가 서로 마주 보고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늘 그렇게 서로 마주 보며 일해 왔습니다. 어느 날 한 재단사가 다른 재단사에게 물었습니다.
“금년에 휴가 갈 건가?”
“아니”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 재단사가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1964년에 휴가를 갔었지.” 
“그래? 어디로 갔었나?” 

첫 번째 재단사는 무척 놀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친구가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가득차서 그때 그 휴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난 그 때 벵갈로 호랑이 사냥을 갔었지. 빛나는 금빛 총을 두 개나 들고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말 엄청나게 큰 호랑이를 만났지. 내가 총을 쏘았어. 그러나 그 놈은 내 총알을 피하고 나를 덮쳤지. 내 머리가 그 놈 이빨에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더군. 그리고 나를 먹기 시작했어. 마침내 그 놈이 내 마지막 살 한 점까지 다 먹어 버렸어.”
깜짝 놀라서 첫 번째 재단사가 소리쳤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호랑이는 자네를 삼키지 않았어. 자넨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 
그러자 두 번째 재단사가 다시 실과 바늘을 잡으며 슬프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이걸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먹고 살기에만 바쁘고 직업의 의미나 보람을 잃어버린 직장인의 모습을 풍자한 글입니다. 살아 있기는 하나 죽은 것과 같은 무의미한 삶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유명무실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름은 있는데 열매는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기대하고 갔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응당 기대하는 바가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실망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고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 또한 그렇습니다.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평가는 이 한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기대하신 바가 있는데 전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곳에서는 다른 교회들에서는 익숙한 이단이나 훼방자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좋아서인가요? 아닙니다. 죽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교회는 이단도 건들지 않습니다. 말이나 소가 없으면 외양간은 깨끗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외양간입니다. 차라리 시끄럽고 분란이 있는 곳이 더 났습니다. 그래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는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 말씀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사데 교회를 칭찬하기 위해 칭찬거리를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해 난감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빛과생명 교회라는 간판은 걸려 있는데 전혀 빛과 생명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죽은 교회는 아닙니까? 가끔 전도를 하다가 “여기도 교회가 있었어?” 하는 말을 들을 때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교회 간판을 세운지 5년째가 되어 가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에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색깔도 어떤 쓸모도 없는 그런 모습으로 비추고 있지 않나 두렵습니다. 오직 종탑의 십자가만 나 여기 있소 하며 홀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이처럼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처럼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바닷물은 엄청 짭니다. 그래서 소금이 아주 많이 들어갔겠거니 생각하지만 바닷물 평균 농도는 3.5%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김치의 염분도 3-4%이고 아주 짠 김치라도 5%를 넘지 않습니다. 이 3.5%라는 소량의 소금이 그 큰 바다를 썩지 않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 입맛을 돋우기도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20%에 달하는 염도입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부정적인 것 외에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짠 맛을 잃었습니다. 아무리 양이 많아도 맛을 내지 못하는 죽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죽은지는 오래 되었고 다만 이제는 그 고기를 나누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요즘 “살아 있네!”라는 말이 유행인데 여러분은 살아 있습니까?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활어회를 먹다보면 생선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인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회를 다 뜨고 앙상한 뼈만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꿈틀댑니다. 죽은 지 오래 된 생선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삶에 활력소가 되는 사람들은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에너지가 주변에 전달이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일터에서,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무한 에너지 공급원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이 생명의 영이 우리 마음속에서 열정으로, 기대로, 소망으로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제가 붙잡고 있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소망이나 희망이나 비전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 그 소망을 향해서 기도하고 달려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금년도 표어를 Hope in God이라 하였는데 하나님 안에서 이 소망을 기대하고 키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소망 안에서 살아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깨어나라

주님은 살아 있다 하나 실상은 죽어버린 사데 교회를 향하여 깨어나라고 명령합니다. 2절입니다. “너는 일깨어라” 영어성경에는 “Wake up!”입니다. 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요 일어날 때라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깨어나는 것은 스스로 깨기 어렵습니다. 엄마가 아침에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비몽사몽입니다. 그러다 화가 솟구친 엄마가 불벼락 같은 호통을 치거나 엉덩이를 걷어찰 때 벌떡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깨워주시길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법은 독특합니다. 그중에 뺨을 치는 것과 고함 수행이 특이합니다. 선승들 중에 스승 황벽과 제자 임제의 관계가 유명합니다. 황벽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 임제를 세 번이나 그의 뺨을 때렸습니다. 나중에 깨닫고 난 후에는 임제가 스승의 뺨을 자주 때렸습니다. 육신을 쳐서 정신의 세계를 각성시키고자 하는 수행법입니다. 선사 임제는 또한 ‘할’이라는 고함으로 유명합니다. 정신 못 차리는 제자가 있으면 ‘할’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임제의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 ‘할’하고 고함을 치고 다녔을 정도입니다. ‘할’은 깨달음의 고함입니다.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병아리가 계란을 깨고 나올 때 이 ‘할’이라는 소리에 톡 깨고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루터의 곁에 우레를 쳐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듯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도적같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오시는데 종이 잠만 자거나 게으르거나 권리만 남용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방탕하게 살다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롬13:11)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롬13:12)는 말씀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지금이 얼마나 위중한 때인지 아는 것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탕진하던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결산하자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 밑동에 놓여 있음을 아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이미 3년이 지났고 이제 마지막으로 유예된 1년만 남았음을 포도원지기가 아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시간은 마구 지나가고 주님이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처럼 사데 교회에 적절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데라는 도시가 역사적으로 깨어 있지 않다가 망한 전례를 두 번이나 겪었기 때문입니다. 사데라는 도시는 난공불락의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입구쪽만 잘 방어 하면 되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엄청난 양의 사금이 산출되었습니다. 사금이 나는 시내는 황금천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아테네의 솔론이라는 개혁정치가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당시의 왕이었던 크로이수스는 그에게 왕국의 황금과 보물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테네의 현인이여 당신이 만난 사람 중에 누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하오?” 크로이수스 왕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기를 내심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때 솔론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생애를 마칠 때까지는 아무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솔론의 이 말을 실증하듯 크로이소스 왕에게 위기가 곧 닥쳤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대군을 이끌고 이곳을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크로이수스 왕은 사데 성이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절벽 쪽을 지키고 있던 한 병사가 실수로 투구를 성밖으로 떨어뜨렸는데 이 병사가 절벽 틈새를 타고 내려와 투구를 주워 다시 올라가는 모습이 목격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페르시아 군대는 이 절벽을 타고 급습을 하였습니다. 이곳이 난공불락이라 믿었던 크로이소스 왕은 허술한 경계를 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크로이소스 왕은 붙잡혀 화형을 당했고 마지막 죽어가면서 “솔론이여, 솔론이여”하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의 안일함이 화근을 부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마지막 날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 그러므로 매일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매일 깨어 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밤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5:4) 우리가 할 일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길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8) 자기 주어진 일에 충실한 사람은 비록 잠깐 잠을 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예비한 사람들입니다.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급히 불을 밝혀 그 잔치에 참여하면 그만입니다.

깨어나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죽어가는 것들을 다시 살려내는 일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부족한 것을 찾아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연약한 지체가 있으면 찾아가서 그들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가장 취약한 것을 찾아 보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연적 교회성장을 주장하는 NCD에서는 최소치 성장의 원리를 말합니다.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8 가지 질적 특성들이 있는데 그 8 가지가 골고루 갖추어져야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8개의 지표는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은사중심적 사역, 열정적 영성, 기능적 조직, 영감 있는 예배, 전인적 소그룹, 필요 중심적 전도, 사랑의 관계 등입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부족하면 그 부족한 만큼만 성장한다고 합니다. 마치 8개의 나무틀의 대어 만든 양동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틀이 작거나 부족하면 이곳으로 담긴 물이 새고 맙니다. 부족한 부분을 세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한 기관이 있으면 이쪽을 건강하게 세워주어야 온 몸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감사를 회복하고 주어진 것을 지키려는 노력입니다. 대개 이방 교회들은 복음을 어렵게 받았습니다. 가족과 민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복음을 받았습니다. 재판정에 끌려가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받은 복음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우리의 마음이 해이해질 때는 처음 믿을 때 어땠는가를 돌이켜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손해와 핍박을 감수하고 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감사가 솟아 날 것입니다. 

또한 사데 교회는 닥쳐올 위험에 대해서 경고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행한 밀레도 설교에서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20:29-30)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믿었고 또 위험에 대해서 누차에 걸쳐 경고를 받았으니 그것을 생각하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들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기본은 감사를 회복하는 것이고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매일 QT를 하고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어야 우리 신앙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감동도 주시고 할 일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 책망을 많이 하셨지만 그래도 사데 교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곳에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세태나 이단에 물들지 않고 흰옷을 입은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면서 가지시는 희망도 여기에 있습니다. 소수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소수의 성도들, 소수의 교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감히 그런 교회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향한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유는 그곳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몇 명의 성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만 있다면 그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 더럽히지 않은 흰옷을 입은 순수한 사람들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의 모습은 야고보서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세상은 자꾸 사람들을 각박하고 인색하게 만듭니다. 죄와 타협하게 만듭니다. 같이 더럽게 만듭니다. 흰옷은 여기에 더러운 것이 묻으면 금방 눈에 띱니다. 주님은 신앙인들을 세상의 죄악을 재는 바로미터로 세웠습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더러운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들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옷이 더러우면 세상이 어떻게 죄악의 무서움과 더러움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던지 간에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은 또한 승리자들입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승리를 축하할 때 만백성이 다 흰옷을 입었습니다. 그렇게 축하하는 도시를 ‘우릅스 칸디다’ 곧 ‘흰색의 도시’라고 불리웠습니다.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들은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승리자요 그들은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5) 무엇보다 좋은 것은 주님의 인정입니다. 주님은 흰옷을 입은 저들을 하나님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시인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2절에서 “내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란 말씀과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주님의 기쁨이 흰옷을 입은 자들에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은 더러운 때가 묻어도 부요한 옷이 좋다고 하지만 주님이 보시는 눈은 그 옷의 값이 아니라 그 옷의 성결함입니다. 성결함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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