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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가 필요합니다 (엡 4: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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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가 필요합니다 (엡 4:31-32)

최근 극장가에 흥행하는 영화중에 뮤지컬 영화로서 500만을 돌파한 <레미제라블>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 영화로는 보지 못하신 분들도 원작인 [빅토르 위고] 의 소설을 한번쯤은 읽어봄직한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 작품의 내용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주인공 <장발장> 이 감옥에서 억울하고 분해서 수차례 탈옥을 되풀이 하는 사이에 무려 19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석방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냉대합니다. 실제로는 빵 한 조각을 훔치고 감옥에 갔지만 계속 된 탈주 죄로 인하여 19년이라는 형기가 그를 흉악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장발장을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직장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염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던 어느 날, 고맙게도 한 늙은 주교가 그를 맞아들여 저녁을 먹게 하고 잠자리까지 마련해줍니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던 장발장의 눈에 성당의 은촛대가 보입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정신없이 은촛대를 훔쳐서 밤거리로 도망치고 맙니다. 하지만 순찰을 돌던 순경한테 곧 붙잡히고 어디서 훔쳤느냐고 다그치는 순경에게 주교 실에서 훔쳤노라고 털어놓게 되고 장발장은 주교 앞에 끌려왔습니다. 

여차 여차히 되었노라는 순경의 말을 들은 주교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은촛대는 내가 이 사람에게 주었다네. 저 사람이 훔친 것이 아닐세.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간걸!” 주교의 이 말에 순경은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고는 그냥 돌아가고 맙니다. 이제 장발장에게 주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장발장, 이제는 더 이상 악에게 속하지 말고 선에 속하라. 나는 이 촛대로 너의 영혼을 샀다. 그 오랜 세월동안 너는 감옥에 있었지만 사람이 바꾸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시간에 너를 용서함으로 너의 영혼은 달라졌다.” 여기서 감동을 받은 장발장이 비로소 새 사람이 됩니다. 

무엇을 느낍니까? 새로운 사람이란 심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기회란 정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처넣는다고 해서 새 사람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도 우리는 실감하며 살지 않습니까?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세상에 이런 현실을 가장 잘대변해주는 작품이라고 여겨집니다. 

새로운 기회와 새 사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일생일대에 가장 중요한 순간을 경험하고 나서 주어지는데 그 중요한 경험이란 바로 엄청난 용서를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인류가 시작 된 이래로 쉼 없이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을 용서하시는 역사가 순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용서의 종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인간은 죄에 대해 무지하고, 무감각하며 불 신앙적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이지 우리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에 대해 무감각합니다. 그래서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때로는 무지해서 죄인 줄도 모르고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 사람으로 살 수 있고,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늘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 때문이라는 참으로 감사하고 가슴이 벅찬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용서 속에 사는 사람들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있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받은 이 용서로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삶입니다. 이타적이며 더 적극적으로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본문 32절입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지난주일 사랑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의 모드를 결정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의 형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용서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에 대한 모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용서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겠다는 내 고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용서를 하겠다는 의지적인 결단만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내 마음속에서 용서를 거부하는 느낌이 들더라도 자기의지를 사용해서 “나는 너를 용서한다.” 라는 선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첫걸음입니다. 

언젠가 내 마음이 움직이면 용서하겠고, 느낌이 있을 때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의 느낌에 의존해 살다가는 평생 용서할 줄 모르고 살다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용서는 느낌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입니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은 속여서 자신의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위선적인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아, 일어나고 싶다.’ 는 느낌이 강해서 일어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대부분이 아침에 이불 속에서 빠져 나오면서 ‘아, 일어나기 싫다. 좀 더 잤으면...좀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그렇습니다. 새벽 4시에 참 일어나기가 정말 싫습니다. 그러니 그 느낌으로 하자면 일어나지 말고 편히 자야 됩니다. 하지만 내가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인도한다는 의지적 결단이 매일 새벽 저를 깨우고 일어나게 만듭니다. 

어떤 분이 그래요. “아, 목사님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다 깨워 주시는 것 아니에요. 평생 새벽기도 하셔야 할 양반들인데...”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사만 평생 새벽기도 해야 하는 겁니까? 얼렁뚱땅 빠져나가려고 합니다만 이게 아니거든요. 목사도 새벽에 일어나기 싫어요. 그 느낌은 똑같이 가지고 있다고요. 그러나 의지적인 결단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을 보고 자신을 숨기는 위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건 결코 위선이 아닙니다. 의지적 결단입니다. 

사실은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느낌과 정반대로 일해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만약에 느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옳다면 많은 사람들이 세수도 하지 않고 목욕도 안하고 살지 모릅니다. 주부들은 밥 짓는 일, 설거지 하는 일, 다 포기할지 모릅니다. 실상을 느낌으로 보자면 하기 싫고 귀찮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억누르고 해야 할 일, 목표를 향해서 의지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오늘 용서라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 느낌으로는 마음으로부터 용납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내키지 않는 마음의 느낌을 억누르고 의지적 결단으로 용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렇게 용서를 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안해집니다. 그러니까 의지적 결단으로 용서하고 보니까 그 느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게 순서입니다. 용서에는 의지적 결단이 먼저요, 그 뒤에 느낌이 오는 것입니다. 마치 깨달음이 오면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믿고 보면 깨달음이 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느낌이 오면 용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나니까 좋은 느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용서에 이와 같은 의지적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용서의 동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그 중요한 용서의 동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가장 즐겨 쓰는 말입니다. “In Christ(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용서의 동기가 내 기분에 있는 것도 아니요, 내 느낌에 달린 것도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우리가 겨우 백 데나리온에 매달려서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얼마나 한심한 이야기입니까?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옛날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용서의 현장인 십자가 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용서를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는 대제사장들도 있었고,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서의 복음을 보고, 듣고, 깨달았으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살다간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아래서 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세상에 흩어져서 용서의 복음을 전하며 용서를 베풀었던 사람들도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그 중에는 백부장도 있었고, 사도들도 있었고, 벤허도 있었습니다. 그 후손들 가운데는 주기철 목사도 있었고, 손양원 목사도 있었고, 오늘 우리들도 있습니다.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흩어져서 용서를 베풀었을 때 거기서 기독교의 정신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를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용서를 베푸는 자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혹시 무슨 이유에서든지 오늘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의지적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과 내 느낌을 믿다가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 자존심 때문에 먼저 용서받기까지 기다리는 소극적인 인품이 아니라 이제 먼저 용서해 주는 의지적 결단의 용기를 가져봄이 어떻겠습니까? 용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용서할 때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악의의 찌꺼기들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시대에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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