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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지기 인생 (눅 12: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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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기 인생 (눅 12:35-48)


오늘 본문은 혼인집에 간 주인을 기다리는 청지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인들은 주로 낮에 결혼식을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밤중에 결혼식을 했습니다. 신랑이 저녁 무렵에 신부 집에 도착하면 잔치가 일찍 시작되지만, 신랑이 자정이나 되어서 오면 한 밤 중에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청지기들은 혼인 잔치에 간 주인이 언제 돌아올는지 알지 못합니다. 혹 이경에 올지 삼경에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경은 요즘 시간으로 밤 9시부터 자정까지를 말하고, 삼경은 자정부터 밤 3시까지를 말합니다. 혹은 하루나 이틀쯤, 또는 닷새 쯤 머물다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주인이 오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부류의 청지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주인이 언제라도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에도 평소와 같이 집안에 있는 종들에게 일을 시키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줍니다. 또 하나는 미련하고 악한 청지기로서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마치 자기가 주인인양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 때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곧장 나가 문을 열고 반갑게 주인을 맞이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자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손수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겨서 관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악한 청지기는 술에 취해서 골아 떨어졌기 때문에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심히 노하여 이 청지기를 엄히 때리고 벌을 내렸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을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 각 자는 청지기로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주관이 강해서 남의 간섭 없이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자신이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기독교에서 살인이나 자살을 금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함부로 끊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가 평복을 입고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던 중 한 군인을 만나서 길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군인이 어찌나 거만한 태도로 대답하는지 황제가 그에게 “당신의 계급이 어떻게 되지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한번 맞추어 보게.”라고 했습니다. 황제가 겸손하게 “당신, 중사인가요?”라고 묻자, “아니, 그 위일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소위인가요?” “아니, 그 위야.” “그러면 대위이십니까?” 그제야 군인은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번에는 대위가 황제에게 “자네도 계급이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네, 대위님. 한 번 맞추어 보십시오.” “자네, 일등병 아닌가?” “아니, 그 위입니다.” “그러면 자네 하사인가?” “아니, 그 위입니다.” 그렇게 해서 중위, 대위, 대장에 이르렀지만 황제는 계속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면 원수 각하십니까?” “아니, 그 위요.” 원수보다 위라면 니콜라이 황제뿐이었습니다. 대위는 그만 “폐하”하면서 땅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황제가 대위를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일어나라. 너나 나나 마찬가지다. 우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여러 계층으로 나누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습니다. 재산이 많든 적든, 학식이 있든 없든, 신분이 높든 낮든, 남자든 여자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모두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더라도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자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건강, 시간, 물질, 재능, 지식, 등 어느 것 하나 본래부터 우리의 것이라곤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유용한 것은 다 주님의 것을 잠시 빌려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춥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되어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장사 밑천을 나누어주되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주인이 떠난 후에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갑절의 이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그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을 불러 결산을 보는데,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이 와서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말하기를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그리고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달란트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재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 시간, 물질 따위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장사해서 갑절의 이문을 남겼다는 것은,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무관심하게 산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큰일을 이루고 크게 성공했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지 않은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악한 종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지혜를 가지고 자기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다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달란트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을 주님을 위해 선용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 종들에게 때를 따라 일을 맡기고 양식을 나누어주고 보살폈습니다. 이것은 그가 봉사의 삶을 살았음을 말합니다.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봉사 생활은 가진 것이 많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봉사와 헌신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고 하셨습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성전의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 넣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 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습니다. 렙돈은 가장 값어치가 낮은 동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를 보십시오.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아낌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 광경을 보고 화를 내면서 “어찌 이같이 낭비하느냐?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겠도다.”고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만 두어라. 이 여자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일은 좋고 선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고하든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선용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 때 나의 것을 드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것을 도로 주님께 드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아무리 많이 드리고 열심히 봉사할지라도 아깝지 않고 드리면 드릴수록 더욱 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항상 주인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주인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인도 선교사였던 와일더 박사가 하루는 인도에 도착한 미군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장교가 “선교사들이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일할 필요가 있나요? 미국에서도 충분할 텐데 인도인들에게 기독교가 필요할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와일러 선교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장교님, 만일 당신의 사령관이 오늘밤 당신에게 군대를 이끌고 필리핀으로 가라고 하면 당신은 떠납니까?” “그렇지요. 명령이라면 가야지요.”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사령관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하셨기에 나는 그 명령에 따라서 지금 여기에 왔습니다.” 청지기 인생은 주님의 명령 앞에 “예”만 있고 “아니요”는 없습니다. 언제나 내 인생의 사령관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청지기의 비유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사는 날이 한정되어 있음을 말해 줍니다. 혼인 잔치에 갔던 주인이 돌아온 것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제라도 강림하시면 인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껴서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 땅에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라고 노래합니다. 또는 이 땅에서 성공 출세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성공하는 것이 죄가 아니고, 장사하고 사업을 경영해서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지 않고 오로지 세상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나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을 다하며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설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 째로, 이 비유는 우리에게 주님의 강림을 준비하라고 일깨워 줍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올 것을 알고 깨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던 전 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행할 바를 명하시기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언제라도 떠날 태세를 갖추고 유월절 어린양 고기를 먹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올지라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오는 것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혼인집에 가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 집에 가셨으며, 머지않아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고 계시는데, 처소가 다 준비되면 구름을 타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성도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주님의 강림은 한갓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으며, 천사들이 증거했으며,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그 날,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살아있던 성도들은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으로 주님을 영접하러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혼인집에서 돌아온 주인이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를 칭찬하시고 그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긴 것처럼, 강림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진실하게 주님을 믿은 성도들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이르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이 받을 상급에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이르기를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3장 13절 이하에는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모두 차별없이 받지만, 상급은 각 사람이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되이 청지기의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강림을 믿고 성실하게 믿음을 지켜나가는 성도들을 보고서 비웃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도들이 살아 있을 당시부터 계속해서 말세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도 주님의 강림이 가깝다고 했는데, 벌써 이 천 년이나 지났지 않느냐, 그러니 예수님의 강림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이, 저들은 주님의 강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세상 일에 몰두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 1장 7절에 보니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애곡하는 자들은 주님의 강림을 믿지 않고 아무 준비 없이 세상일에 몰두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주님의 강림이 심히 가까운 때입니다. 다니엘서 12장 4절에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하였는데, 과연 오늘날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고 있으며, 정보화 시대가 되어서 나날이 지식이 더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주전 6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언한 이 말씀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오늘 이 시대에 성취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라’(마 24:7)고 하셨는데, 과연 이 말씀과 같이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민족 분규와 국가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기근과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빈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하셨는데, 과연 오늘 이 세계는 불법이 성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식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끝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보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지만 시대의 징조들을 보아서 그 날이 매우 가까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강림 일시를 알려 주지 않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서 주님의 강림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혹 주님의 강림이 우리의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각 자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호흡을 거두시면 언제라도 “예” 하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사는 것이 아니고 길어야 백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한 번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날이 언제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 주님 앞에 서는 날인 것처럼 여기고 항상 준비하는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 13:35)고 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청지기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깨어서 재림의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인생은 청지기 인생입니다. 청지기 인생은 언젠가 주인 앞에서 결산할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언제 어느 시에 오시든지 반가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제라도 “오라”고 부르시면 두려움 없이 그 앞에 설 자신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늦기 전에 깨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과 물질과 건강과 재능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씁시다. 여러분 모두,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등잔에 불을 밝히고 주님의 강림과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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