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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유대인의 왕 (요 18: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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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 (요 18:28-40)

빌라도의 판결을 요청함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신 주님은 한 밤중 내내 유대인들 앞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심문 받고, 가야바가 주재하는 공회에서 사형까지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새벽이 밝아 오자 총독 관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28상) 관정이란 브라이도리온(praitwvrion)이라고 부르는 총독 관저를 말합니다. 당시의 총독 관청은 지중해변의 가이사랴에 있었는데, 명절 때가 되면 치안 유지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습니다.  
  
재판장은 빌라도입니다. 빌라도!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외우고 있는 이름입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는 예수를 죽인 책임자로써 지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약 10년간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의 제 5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있었습니다. 그는 행정 관료로서는 유능하다고 인정되나, 정치적 소신이나 결단력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보면 그는 줏대 없이 예수님과 고소자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빌라도의 모습을 양심과 대중의 압력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소자들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은 이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예수님만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밖에 서서 외쳤습니다.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28하) 유대인의 계율에 보면 유대인이 이방인의 거처에 들어가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민수기 19:11에 보면, 죽은 사람이 있는 집에 들어갔을 경우 7일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미쉬나에는 이 계명을 확대하여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자도 7일간 부정하다고 규정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인입니다. 이방인이지요. 그러므로 비록 총독 관정일지라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서 고소만 했던 것입니다. 만일 관정에 들어간다면 유월절 예식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해질까 봐 이방인의 마당도 안 밟는 사람들이 사람 죽이는 일에는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 

빌라도는 고소자들에게 왜 고소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재판장이 죄목을 물은 것은 당연합니다. 고소자들은 두루뭉술 대답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30) 그들은 구체적 죄목을 대지 못했습니다. 죄의 증거도 없었습니다. 행악자가 아니면 고소할 리 없다는 말만 했습니다. 

“행악자”란 말(h\n ... kako;n poiw'n,)은 문법적으로 악행을 계속하는 자란 뜻입니다. 말하자면 “습관적 범죄자”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떤 법에도 “평소에 나쁜 자”라는 죄목은 없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의 질문에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군대까지 동원해 준 빌라도가 당연히 자기들이 선고한 사형을 허락해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고소하느냐고 죄목을 대라고 하니까 당황하여, 막연히 “평소에 나쁜 자”라는 식의 대답을 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31) 구체적인 죄목도 없이 막연히 “행악자”라고만 하니까, 빌라도는 재판 건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당시의 로마 정부는 식민지에 대하여 꽤 많은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적인 자치권도 상당히 부여했습니다.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소요죄(騷擾罪)나, 황제에게 반대하는 반역죄가 아니라면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종교 문제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총독 빌라도 역시 행정권이나 사법권을 대폭 유대인들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보기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는 죄목은 로마법에는 전혀 저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대답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31) 예수에게 내린 사형 선고를 확정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당시에 사법적인 자치권이 인정되어 있었지만 사형 선고만은 로마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소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으니 로마법의 사형을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군중들의 외침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32) 

일찍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죽으리라는 사실을 예언하신바 있습니다.(3:14,8:28,12:34,32)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이 “정해진 죽음으로 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셨습니다.(8:59, 10:31)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이며,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도록 빌라도에게 요청하는 것이 바로 그런 죽음이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는 마지못해 심문을 시작합니다. 빌라도 질문의 핵심은 예수님의 왕권 문제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18:33, 마27:11,막15:2,눅23:3) 앞서 대제사장이나 공회는 예수님께 무엇을 가르쳤는지 물었습니다. 종교적 내용이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관심사는 오직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예수가 왕이라고 하는데 과연 로마 황제에게 도전했는지? 

빌라도의 질문은 4복음서가 다 같은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su)”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냉소적인 표현입니다. “너” 같은 사람이 과연 왕의 재목이냐? “너” 같은 위인이 로마 황제를 반역하겠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이사야의 예언처럼 예수님에게서 혁명 투사의 모습이나, 정치 선동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정치적 구호도 없었고, 외쳐대는 군중도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직관적으로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는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그것은 네 말이냐? 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이 들려 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34,공동번역)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인가 아닌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란 말이 빌라도의 말인지, 남에게 들은 말인지 반문하십니다. “왕”이란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하시려는 뜻입니다. 만일 빌라도가 스스로 한 말이라면 그 의미는 가이사와 같은 현세적인 의미에서의 왕이란 뜻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말한 것을 인용했다면, 왕이란 말의 의미는 메시야와 같은 종교적인 의미의 왕일 것입니다. 유대적 의미라면 대답은 긍정이 될 것이요, 로마적 의미라면 대답은 부정이 될 것입니다.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 빌라도는 예수가 로마의 반역자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왜 “유대인의 왕”이란 말에 지독한 거부 반응을 나타내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36) 

세상에 속한 나라의 특징은 군사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군사적 행동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나라”(basileiva)의 의미는 “realm”(영토, 영역)이라기보다는 “reign, rule, kingship” 즉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분명히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분명히 주님은 현세 와 내세와 정신계에 군림하시는 통치권자이심은 틀림이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에게 명령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상에 영토가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빌라도는 아무튼지 예수님이 왕이란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37) 예수가 말하는 왕국이 있다면, 현세든지 내세든지 어쨌든지 왕이란 말이 아닌가? 유대인들은 예수가 왕권을 사칭했다고 고소했습니다만, 빌라도는 어찌됐든지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분명히 답변하십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37) 

주님은 우선 자신이 왕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은 세상적인 의미의 왕국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신 것도 인간적인 폭력이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왕으로 “났으며” 왕으로 “왔나니” 하셨습니다. 육신으로는 나셨고 영으로는 오셨습니다. 주님이 왕으로 오신 목적은 진리를 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진리의 왕 진리의 왕국

“진리가 무엇이냐?”(38) 왕권 문제에서 진리 문제로 화제가 바뀝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모든 철학자들의 공통된 화제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질문은 아주 공허한 질문입니다. 그가 말한 “진리”란 말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막연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진리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진리가 뭐나고 물었으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에게 진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질문은 속된 말로 이런 뜻입니다. “진리가 뭐 말라 죽은 것이냐?” “진리가 밥 먹여 주느냐?”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진리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생명보다 더 중요한 진리라고 외치던 공산주의자들도 빵을 위해 사상을 버렸습니다. 밥 한 그릇이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세상의 진리입니다. 세상의 진리는 배부름이요, 권력이요, 명성이요, 지식이요, 경험이요, 느낌과 감각이요, 알쏭달쏭한 이론들입니다. “진리는 뭣 말라죽은 진리냐?” 이것이 곧 세상 사람들의 철학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무엇이 진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동양 철학의 논리적인 체계가 진리일까요? 서양의 경험론이나, 이성적 사유가 진리일까요? 저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오직 한 가지 진리를 깨닫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도가 다 진리입니다. 주님이 세우려고 하신 진리 왕국은 하나님의 인격이 계신 곳이요,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는 곳이요, 하나님의 의도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리 왕국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진리 왕국이요, 예수님은 바로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세상적 의미에서 국가란 세 가지 구비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영토와 주권과 국민입니다. 주님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의 영토는 주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우주 전체입니다. 주님의 나라의 국민은 바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지금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눅17:20-21)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왕국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지금도 그 백성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속죄의 길을 열어주시고 천국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진리는 구원을 줍니다. 진리는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진리는 천국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전해주신 것이 바로 구원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진리가 아니라 구원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진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신 것이 바로 그런 구원 진리입니다. 진리란 논리적 구성이 아닙니다. 능력이요 효력입니다. 인생을 바꿀 만큼의 큰 유익을 줍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우리 반에 재미있는 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산수를 못했어요. 그래서 어느 날 선생님이 나무라셨어요. “너는 도대체 산수를 그렇게 배워서 어디에 써 먹을래?” 그랬더니 이 아이가 대답합니다. “콩나물 장사 하는데 써 먹지요!” 그 아이의 어머니는 콩나물 장사를 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산수 배워서 콩나물 장사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리란 크든 적든 인생에 유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진리는 죽음을 해결하는 것이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리의 왕으로 영접할 것인가 말 것인가?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판결하든지 말든지, 혹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 하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왕으로 임명 받으실 필요도 없고, 로마 황제에게 공인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왕이시요, 구주십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 왕국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그 왕권에 불복하고 그 왕국 밖에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그 왕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왕국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차별 없이 부르셔서 자기 왕국을 채우십니다. 세상 나라는 시한부 존재입니다. 역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나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 나라들은 언젠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지금은 미국 시민권 일본 시민권 자랑하지만, 장차는 모든 나라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만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지금 세상 나라는 온갖 거짓과 술수와 부정한 권력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조만간 아주 사라지고, 오직 진실만이 힘을 발휘하며 정의만이 대접을 받는 진리 왕국이 다가옵니다. 진리 왕국은 혁명가들의 꿈처럼 혁명이나 개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리 왕국은 인간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세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진리 왕국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구원 진리로 백성들을 모으시고, 진리로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왕이십니까? 아니면 심부름꾼이십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들이세요. 예수님의 명령에 살고 죽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 진리 왕국의 시민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라바를 선택한 군중들

빌라도 재판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예수는 무죄다!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고소자들이 제시한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이 기껏 종교적인 것이라면, 로마법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빌라도는 예수를 유월절 특별 사면으로 풀어주자고 제안합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심에서 예수를 고소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마27:18)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39)
  
그러나 백성들은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합니다.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 바라바. “son of Abba” “son of father” 공관복음은 바라바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명한 죄수”(마27:16),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눅23:19)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막15:7) 

아마 그는 민족 독립운동을 하던 열심당의 지도자였던 같습니다. 열심당은 바리새파 중에서 과격 행동주의자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으로, 바리새 파가 온건 이론가들이었다면 이들은 폭력 혁명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라바는 이런 열심당의 지도자로서 폭동을 주동하고 사람을 죽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민중들에게는 애국적인 혁명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사면 대상자로서 이 바라바를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바라바냐? 예수냐? 군중들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바라바는 민족주의자인데 예수는 박애주의자입니다. 바라바는 유혈 혁명가인데 예수는 철저한 자기 희생의 사람입니다. 바라바는 세상 권력에 항거했으나 예수는 세상 권력에 초연했습니다. 바라바는 칼을 사용했으나 예수는 사랑과 봉사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바라바는 민족 국가를 꿈꾸었으나 예수는 영원한 진리 왕국을 계획하셨습니다. 바라바가 하는 모든 일은 널리 선전되었으나, 예수의 의도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대부분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바라바를 놓아주도록 사주했습니다.(막15:11)
  
저는 오늘날의 현실도 그와 같다고 봅니다. 예수냐, 바라바냐?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바라바가 하는 일은 눈에 보입니다. 현실적입니다. 당장의 이익이 눈에 보입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이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문명의 화려함 앞에 진리 왕국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를 느끼면서 진리 왕국 대신에 문명 왕국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무엇이 인생에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입니까? 예수가 줄 수 있는 것과,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을 옳게 구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들은 물론 빵과 의복도 그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공중의 새 한 마리까지 기르시는 주님의 왕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무엇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바라바냐, 예수냐? 그 선택이 곧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 선택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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